대기업 남편·서울대 아들둔 주부, 수십억대 사업가 된 비결

조회수 2020. 9. 23. 15:3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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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세에 출발한 여성 리더, "지금은 늦었다는 말 할 수 없는 시대"
한국원예디자인협회 여봉례 이사장

출산과 육아로 경단녀(경력단절 여성)가 된 이들, 취업이 늦고 고시에 낙방해 초조한 이들, 적성이 맞지 않아 진로를 바꾸고 싶어도 용기가 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다. 25년간 전업주부로 지내다가 49세에 박차고 일어나 라움그린 대표와 한국원예디자인협회 수장으로 열심히 달리는 여봉례 이사장을 만나면 힘이 날 것이다.  

서울시청 로비를 바쁘게 오가며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60대의 나이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지난해 연말 ‘웰니스(wellness) & 크리스마스’라는 테마로 한국원예디자인전시회가 서울시청에서 열릴 때였다. 코엑스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마땅치 않아 서울시에 타진하면서 서울시청과 함께 주최하여 5일 동안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시청 1층 로비에서 열린 첫 번째 꽃 전시회여서 더 큰 관심을 끌었다.


한국원예디자인협회는 원예디자이너 100여 명이 가입한 꽃예술 분야의 대표적인 단체다. 전국의 원예디자이너 가운데 90여 명이 전시회에 참여했는데 콘테스트를 겸한 행사여서 열기가 더욱 뜨거웠다. 전문가 부문과 학생 부문으로 나누어 디자인 계통 전문가와 교수들이 심사를 했고, 대상에 서울특별시장상을 수여했다.


“회원들끼리 선의의 경쟁을 하며 실력을 높이고, 학생부도 따로 응모할 수 있게 해서 참여도가 높고 의미도 있었어요. 격려하는 뜻에서 소정의 상금도 드렸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면 분명한 성과를 내는 여봉례 이사장의 성격대로 장소 섭외에서 행사 기획까지 열심히 뛰어 새로운 개념의 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작은 꽃집에서 수십 억대 사업가로


사업가로도 성공한 여봉례 이사장을 롤모델로 삼은 이들이 많다. 모두들 어떤 계기로 뒤늦게 결심하게 됐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좋은 성과를 냈는지 궁금해한다. 경희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99년까지 전업주부였던 그녀는 외아들이 대학교 2학년이 되면서 일을 시작했다. 대기업 간부인 남편을 잘 보필하면서 아들을 서울대에 입학시킨 그녀가 이제 골프를 치며 편안하게 지낼 것으로 생각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남편은 지방 근무를 하고 있었고 아들은 학교에 가고, 혼자 있으려니 외로운 거예요. 그때 꽃집에 앉아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이 못 하게 할 게 뻔해서 무조건 가게를 계약했죠. 그러고는 바로 태국으로 날아갔어요. 거기서 남편한테 전화해 꽃집을 하게 해주면 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놨죠. 꼭 해야겠다는 결심에서 그렇게 한 겁니다.”


결국 남편이 동의하면서 작은 가게를 열었다.


“하루아침에 꽃집을 하게 된 게 아니에요. 꽃꽂이를 꾸준히 배우고, 성당에서 꽃꽂이 봉사를 계속하며 마음을 품었죠. 경력이 단절된 기간에도 미래를 꿈꾸며 조금씩 준비를 하는 게 중요해요. 기회가 될 때마다 미국에 가서 플라워 클래스를 이수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죠.”


꽃집을 개업한 뒤에도 공부를 이어갔다. 숙명여대 평생교육원에서 테이블 장식을 배우고 3년간 독일을 오가며 그룬베르크 원예학교에서 독일 상공부가 인정하는 ‘플로리스트 마이스터(국가공인자격)’를 획득했다. 그 기간에 꽃집은 2호점을 낼 정도로 번창했다.


“제가 꽃집을 낼 때만 해도 장미 꽃다발을 만들 때 꼭 안개꽃으로 감쌌어요. 고정관념 때문에 모두들 안개꽃을 넣는데 내가 고객을 리드하자는 생각을 했지요. 안개꽃 없이 만든 유럽 스타일의 파격적인 꽃장식이 큰 인기를 끌면서 주문이 많이 들어왔어요.”


점차 실내조경과 화훼 인테리어 계통 의뢰가 많아지면서 2008년에 라움그린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회사를 경영하느라 바쁠 때도 공부를 계속해 2010년에 숙명여대 라이프스타일디자인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단순히 꽃을 나열하던 방식에서 벗어난 그녀만의 입체적인 스타일이 주목을 받으며 매년 사업 규모가 커졌다.


“공간 장식과 테이블 데코 등을 한국과 독일에서 계속 공부하면서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다 보니 저만의 디자인이 나온 겁니다. 디자인을 가미한 조경, 자연과 조형예술의 조화, 자연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합니다.”


서울 구로구 교통섬 미화작업을 비롯해 도봉구 창포원, 상암동 하늘공원, 상도동 근린공원, 홍익대 캠퍼스 조성공사, 제주도 오션스타 콘도, 서희건설 아파트, 골프장 등 다양한 조경 공사를 수주했고 지금도 활발하게 달리고 있다.


뒤늦게 출발하여 10명이 넘는 직원과 함께 매년 수십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가 되면서 2013년부터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서울지회장을 3년간 역임했다. 350명의 회원을 이끌면서 자금지원 및 정보공유, 교육컨설팅, 회원장터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여성 사업가들의 사업 규모가 크지 않아 대형 언론의 인터뷰가 쉽지 않았지만 여봉례 이사장은 한국경제신문에 50인의 여성 경제인 릴레이 인터뷰가 실릴 수 있도록 열심히 뛰기도 했다.  

필요한 곳에 점을 찍으라


김영란법이 발효되면서 화훼디자인 업계의 성장세가 주춤해진 것에 여봉례 이사장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2016년에 화훼산업이 많이 어려워졌어요. 그만두거나 간신히 유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죠. 꽃이 안 팔리니 2017년에 꽃을 심지 않는 농가가 늘어났고, 결국 꽃을 수입해오는 일까지 벌어졌어요. 우리나라의 뛰어난 화훼기술이 자칫 사장될까 봐 걱정입니다. 좋은 방안이 나와서 다 같이 윈윈할 수 있도록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여러 단체의 대표로 일하면서 여성들의 사회활동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는 그녀는 제도가 마련되지 않더라도 우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뭘 할 것인가, 목적을 갖고 자기계발을 해야 기회가 옵니다. 저는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면서 이 애가 독립할 때 나도 나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꽃꽂이를 계속 배웠어요. 성당 꽃 봉사를 하기 싫을 때도 쉬면 나태해질까 봐 앞날을 위해 꾸준히 했어요. 자신과 가장 잘 맞는 분야를 찾아서 조금씩 준비를 하고 있으면 꼭 기회가 옵니다.” 

결혼을 하지 않거나 출산을 미루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풍토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토로했다.


“힘든 세상인 건 분명하지만 여성이 하려고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개척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아서 키워야 해요. 아이를 기르면서 얻는 게 너무 많아요. 제 아들은 ‘엄마 일을 하세요. 공부하세요. 공부하는 즐거움이 가장 큽니다’라며 나를 많이 격려해줬어요. 시간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것도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미래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실행하는 게 중요합니다.”


여봉례 이사장은 “55세에 석사과정을 시작했는데 이러다가 나 박사까지 할지도 몰라요”라며 활짝 웃었다. 사업과 사회활동으로 분초를 쪼개가며 달리지만 여전히 꿈을 꾼다고 했다.


“늦었다고 말할 때가 이른 때입니다. 지금은 늦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시대잖아요. 수명이 길어졌고, 인터넷이 발달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요. 예전보다 모든 여건이 좋아졌어요.”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망설이는 여성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실타래를 만들고 반드시 한 점을 찍으라”고 당부했다.


글 jobsN 이근미 조선뉴스프레스 객원기자

사진 서경리 조선뉴스프레스 기자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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