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이자 아내 김은희 작가, 그는 재능이 없습니다"

조회수 2020. 9. 25. 22: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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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밤> 장항준 감독 "관객이 쓴 2시간이 아깝지 않기를.."
<기억의 밤> 장항준 감독

테이블 위에 몇 병의 자양강장제가 나뒹굴었다. ‘1 : 다(多)’ 인터뷰가 일반적인 요즘, 드물게 ‘1 : 1’ 인터뷰를 진행한다고 했다. 아마도 숱한 기자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하느라 기력이 쇠했으리라 예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활기찬 얼굴로 자리에 앉아 말똥말똥한 눈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치 생전 처음 하는 이야기인 양 눈을 반짝였다. 같은 질문을 받았더라도, 그는 다르게 말했을 것이다. 인터뷰가 이루어지는 이 작은 공간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몇 번이나 각색되었을까를 생각하니 잠시 웃음이 났다. 그렇다고 그가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의 측면들, 사실의 조각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마치 건축무한육면각체처럼 그의 이야기는 하나의 변곡점을 돌아 또 다른 측면을 향해 나아갔다.


― 어릴 적부터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고 들었습니다.

“엄청 좋아했죠.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주는 게 사는 낙이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그래요. 일단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죠.”


― <기억의 밤>도 연말 합정동의 술자리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죠.

“한 친구가 그러는 겁니다. 사촌 형이 집을 나갔다가 며칠 만에 돌아왔는데 영 다른 사람이 되어 왔다고요. 그 얘기를 듣다가 제가 그랬습니다. ‘야, 재밌다. 근데 진짜 재밌으려면 그 형이 사촌이 아니라 진짜 형이어야 해. 그리고 가출이 아니라 납치여야 하고’. 그런데 그 이야기가 어쩐지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붙들고 완성하는 데 9개월이 걸렸죠.” 

― 돌이켜보면 영화에 많은 힌트가 있습니다. 동시에 함정도 있죠. 함정에 빠지면 영화가 혼란스러워지고 힌트를 찾으면 흥미로워졌습니다.

“낮과 밤의 모습이 전혀 다르길 바랐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안온한 집이 해가 진 뒤에는 다른 모습이 되는 거죠. 등장인물들의 찰나의 표정이나, 집 안의 공기도 다르게 표현하려고 했죠. 그리고 하나의 방에서 계속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나는 거죠. 저희끼리는 그랬습니다. 우리 영화의 주인공은 유석(김무열), 진석(강하늘) 그리고 그 방이라고요.(웃음)”


― 진석이 겪는 일이 실제 겪는 일인지, 진석의 착란 증세인지도 헷갈리더군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신경증적인 아내와 자상한 남편이 있어요. 아내는 늘 히스테리를 부리죠. 어느 날 아내가 자기 모자를 찾습니다. 남편은 다정하게 그런 모자는 없다고 말해요. 아내는 남편의 말을 믿고 방 안으로 들어가죠. 그리고 카메라는 아내의 모자를 비춥니다. 그런 순간 관객은 섬뜩해지는 거죠. 남편은 뭐지? 이런 생각이 들고요.”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영화의 경험이라는 게 신기합니다. 이 모든 기억과 일들을 2시간 안에 담아낸다는 것도 그렇고요.

“2시간이 빈틈없이 채워졌으면 했어요. 관객이 쓴 2시간이 아깝지 않기를 바랐죠. 그리고 영화를 본 뒤에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어떤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했어요.”


― 그 안에는 ‘우리는 사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메시지도 포함되어 있겠죠.

“오늘 인터뷰를 하러 삼청동에 오는데 차를 유턴해야 했습니다. 도로를 통제하고 있더라고요. 왜 그런가 봤더니,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방한하는 날이라서 그랬습니다. 제 평생에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과 연결되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웃음) 우리가 알든 그렇지 않든, 원하든 그렇지 않든 사실 우리는 다 연결돼 있는 거죠.”

― 그런 면에서는 아내인 김은희 작가가 쓴 드라마 <시그널>의 메시지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당신과 현재의 우리, 혹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당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면에서요.

“그러네요. 그렇게 두 작품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지는 못했지만(웃음), 아마도 그럴 겁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이니까 같이 살고 있는 거겠죠.”


― 일전에 두 분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아내 김은희 작가의 훌륭함은 어제보다 0.01%라도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재능이 없습니다.(웃음) 아니, 없었습니다. 저와 방송국에서 선후배로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다 할 재능이 보이질 않았죠.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그는 성실합니다. 제가 놀라운 건 매우 성공한 지금도 그때 못지않게 노력한다는 겁니다. 쓰고 읽고, 쓰고 읽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은 거의 다 독파하고요. 하나의 고지에 오른 사람이 그러기란 쉽지 않습니다.”


― <기억의 밤> 역시 굉장히 촘촘한 구조로 쌓여 있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아니 이걸 다 어떻게 하려고 이러지?’라는 생각도 듭니다.

“흐흐흐. 그런 순간이 오죠? 시사회 끝나고 한 선배가 와서 그러더군요. ‘얘가 어쩌려고 이러나’ 싶었다고요. 이 작품을 만들려고 최면술 전문가도 찾아뵙고, 프로파일러, 심리학자 등과도 인터뷰를 했습니다. <싸인>을 만들면서 연을 맺게 된 국과수 분도 계시는데 그분에게 이런 스토리가 가능한지도 확인했고요. 놀라운 건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분석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무한애정 

― 유석의 1997년과 진석의 2017년은 여러모로 이어져 있지요. 이 두 시간이 연결돼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도 고민이 됐을 듯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때 그게 정확히 언제, 누구와 있었는지는 잘 몰라요. 하지만 그게 어떤 대통령의 재임기였는지는 의외로 기억합니다. 1997년에 IMF 구제를 받게 된 일이나,

2017년 현재 미국의 대통령이 트럼프라는 건 아마 대부분이 기억하게 될 겁니다. 그런 보편적인 기억과 개인사를 연결하고 싶었어요.”


― 보고 난 다음의 마음은 ‘먹먹함’이었습니다. 유석도 진석도, 가해자나 피해자로 보이지 않더군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죠.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고요. 아마 우리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 대부분이 그럴 겁니다.”


― 때문에 장항준 감독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인간에 대한 연민, 애정이 스릴러에서도 담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람을 정말 좋아해요. 사람에게 상처를 입는다고 해도, 그 사람이 잘못한 거지 온 인류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또 그렇게 쉽게 상처받을 나이를 지나기도 했고요.”


기억의 ‘방’이 아니라 기억의 ‘밤’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다. 장항준 감독이 15년 만에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어쩌면 우리는 그에게서 코미디나 휴먼 드라마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막상 그가 준비해 나온 것은 ‘스릴러’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있어 더욱 깊은 공포를 건드리는 집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우물의 바닥에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어떤 이야기들이 솟아 나왔다. 가장 큰 공포는 어쩌면 ‘잊히는 일’인지 모른다. 그때 인간을 구하는 것은 어쩌면 ‘너와 나의 연결고리’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기억의 밤>은 지금 관객 100만을 넘기며 장르영화로는 드물게 순항하고 있다. 스릴러에서도 한 줌의 온기를 길어내는 사람, 이야기꾼 장항준이 귀환했다.


글 jobsN 유슬기 조선뉴스프레스 기자, 사진제공 메가박스 (주)플러스엠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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