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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꽃피운 재능..그녀에게 돌아온건 시기와 질투였다

조회수 2020. 9. 21. 17:5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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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끈기와 집중력, 창의성을 요하는 직업 주얼리 디자이너

주얼리 디자이너

주얼리 디자이너들은 다양한 소재의 보석을 가지고 주얼리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전문적인 단계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개설하는 추세다. 강동대학교와 인덕대학교, 대전보건대학교는 주얼리디자인과에서, 국민대학교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한양대학교, 부산대학교 금속공예과에서 주얼리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 굳이 학과 전공을 하지 않더라도 학원이나 교육기관에서도 어렵지 않게 주얼리 디자인을 접할 수 있다. 

주얼리 디자이너들은 주얼리의 소재에 따라 자신이 다룰 주얼리를 결정한다. 주얼리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액세서리를 뜻하는 주얼리는 ‘커스텀 주얼리’다. 커스텀 주얼리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모조 보석이나 유리, 플라스틱 등을 주요 소재로 사용한다. 패션 주얼리라고도 불리는 커스텀 주얼리는 패션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그만큼 트렌디하다. 그다음은 ‘파인 주얼리’다. 파인 주얼리는 고가의 주얼리다. 금과 백금, 여러 보석이 소재인 파인 주얼리는 클래식하고 고풍스러운 디자인을 자랑한다. 마지막으론 커스텀 주얼리와 파인 주얼리의 중간 성격을 갖는 ‘브리지 주얼리’다. 브리지 주얼리는 14K보다 낮은 함량의 금속과 은, 합성석을 사용하여 비싸지 않은 가격에 스타일을 뽐낼 수 있는 주얼리다.  

주얼리가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으면서 주얼리 디자이너의 역량 또한 중요해지고 있다. 주얼리 디자이너는 주얼리 생산에 있어서 모든 과정에 관여하고 책임진다. 먼저 제품을 구상하고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며 주얼리의 외관과 소재를 결정한다. 이후 이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거친다. 주얼리 제도를 통해 주얼리를 디자인하고 설계도를 작성한다. 그리고 프로그램 그래픽을 이용해 렌더링과 캐드(CAD)로 디자인을 세분화한다. 그다음에는 주얼리의 명암, 채색 등을 고려해 더욱 섬세한 디자인을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세공하기 위해 치수를 적은 도면을 작성하여 세공사와 함께 최종 제품을 생산한다.  

화려하고 빛나는 오브제인 보석과 광물을 다룬다는 점만 보고 무작정 주얼리 디자이너의 길을 선택하면 후회할 수 있다. 주얼리 디자이너는 엄청난 끈기와 집중력, 그리고 창의성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직접 세공을 하는 육체노동도 동반된다. 디자인을 위한 최신 트렌드와 유행을 분석하는 건 물론이고 주얼리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기술적인 요소까지 두루 갖춰야 하는 게 바로 주얼리 디자이너다.


주얼리 브랜드 ‘예명지’ 예명지 대표


“티파니나 까르띠에 같은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주얼리 디자이너들은 공방이나 편집숍을 차려 주얼리를 소량 생산하거나, 관련 기업에 취직해 주얼리 디자인을 하기도 한다. 또한 성공한 주얼리 디자이너의 경우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 주얼리에 관한 모든 걸 총괄하며 일을 하기도 한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청담동에 위치한 주얼리 브랜드 ‘예명지’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들어가자마자 화려한 주얼리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예명지’는 국내 최고의 주얼리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예명지 대표가 자신의 이름을 따 만든 주얼리 브랜드다.


예명지 대표는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까지 가졌지만 처음부터 주얼리 디자인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은 아니다. 예명지 대표는 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대학 졸업반 시절, 어머니와 함께한 파리 여행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 그의 어머니는 옥공예가인 서지민 작가다. 그는 파리에서 열린 어머니의 개인전 〈조선 최고의 옥 남양옥〉을 보고 주얼리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얼리 디자이너로서 예명지 대표는 재능을 일찍 꽃피웠다. 국내에서 주얼리 디자이너 관련 상을 휩쓸었고 해외에서도 전시 제의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돌아온 건 박수갈채와 찬사가 아닌 시기와 질투였다. 유명 옥공예가인 어머니의 존재 때문에 그의 커리어가 만들어졌다고 오해하는 불편한 시선 탓이었다.


“어머니와 같이 간 파리 여행에서 보석 디자인을 처음 접했어요. 이거다 싶었죠. 그래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어머니에게 말했어요. 보석 디자인을 하고 싶다고. 어머니는 저에게 하라고 강요하진 않았어요. 제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게 된 거예요. 어머니와 저는 예술이란 분야를 걷지만 하는 일은 달라요. 어머니는 전통공예 작가고 저는 현대적인 보석을 다루는 작가니까요. 아버지가 한복디자이너라면 아들이 양복디자이너가 되는 거랑 비슷한 거죠. 저는 목걸이, 반지 등 주얼리를 디자인하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도 제가 초창기에 무슨 상을 타면 어머니 얘기가 나오니까 힘들었어요. 제가 현대 장식물 쪽으로 작품을 내도 어머니가 심사위원 아니냐 그러고, 큰 상을 타도 그러고. 청와대 영빈관에서 전시했을 때도 그런 오해를 받았죠.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어요. 내가 무언가를 잘해도 나의 것으로 생각해주지 않았어요.”


편견 극복 

초반에는 오해에서 비롯된 시기와 질투가 예명지 대표를 괴롭게 했다. 그러나 그는 선과 공간의 아름다운 조화를 바탕으로 한 ‘입체 망사 디자인’으로 자신만의 주얼리 디자인 영역을 구축했다. 주얼리 디자인에 새로운 캐드캠(CAD/CAM) 방식을 도입해 선구자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주얼리 디자이너로서의 능력은 국제적인 수상과 전시 초청으로 이어지며 더욱 인정받았다. 한국 최초 이탈리아 비첸차오로 보석쇼에 초청을 받고, 일본 왕세자비 초청 주얼리쇼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최근에는 런던 서니아트갤러리 (Sunny Art Gallery) 초대전에서 작품을 전시했다. 세계적인 권위의 주얼리 콘테스트에서 수상은 물론 롯데와 MCM, 폴로 랄프로렌 등의 기업들과 디자인 컬래버레이션도 진행했다.


“사실 저는 트렌디한 작가가 아니에요. 독특한 작가인 거죠. 그 독특함 때문에 해외에서 저를 많이 찾아주신 것 같아요. 저만의 세계를 만들어온 게 여태까지 일을 할 수 있는 힘이었던 거죠.”


최근에는 ‘미네랄 컬렉션(Mineral Collection)’이란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주얼리의 재료가 되는 광물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우주를 테마로 한 이야기로 만들어 스토리텔링 전시를 하는 것이다.


“‘주얼리 디자이너’라고 하면 액세서리 작업만 하는 줄 알아요. 저는 광물과 자연과학에 주목하고 싶었어요. 광물이란 소재는 모든 주얼리의 시초예요. 이 광물의 세계는 굉장히 깊어요. 그래서 이를 작품적으로 설명하는 게 요즘 하는 작업이죠. 간단히 말하면 우주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보석 스토리로 꾸민 전시죠. 운석이나 산소가 생겼을 때 나온 광물, 진주, 물을 담고 있는 보석을 위주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올 초 미국 세미나를 갔다 왔는데 요즘 하고 있는 미네랄 컬렉션을 소개하기 위해 간 거였어요.”


예명지 대표는 자신을 ‘주얼리 디자인 전도사’라고 이야기했다. 국내에선 상대적으로 생소한 주얼리 디자인을 위해 사람들에게 주얼리의 기원부터 시작해 주얼리에 담긴 철학적·사회적 의미를 얘기한다고 했다. 한양대학교에서도 강의를 하면서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기도 하다.


“저는 주얼리 디자인 전도사 역할을 많이 했어요. 2대째 예술을 하고 있기도 하고 유학 1세대이기도 하니까 주얼리 디자인을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주얼리의 기원설은 두 개예요. 장식을 위한 미적 기원설과 심리적 안정을 위한 주술 기원설이 있거든요. 심리적인 것부터 인류의 기원과 함께하는 게 주얼리 분야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세미나를 다 끝내고 나서 마지막에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나의 주얼리를 통해 여러분이 생명의 기쁨을 느꼈으면 한다’고 말이죠. 인류의 시작과 함께한 주얼리에 감사하고 주얼리를 선사한 자연에도 감사하자는 철학적인 말입니다.”


세계적인 주얼리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20년간 주얼리 디자이너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 온 예명지 대표는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예명지’를 만들었다. 현재는 브랜드 창립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저는 디자이너가 잘할 수 있는 것만 했어요. 처음에는 브랜드란 꿈은 갖고 있었지만 그 세계를 잘 알지는 못했어요. 근데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작가로서의 활동을 하다 보니까 이게 초석이 되었고, 지금은 초석은 잘 닦아 놓은 상태가 됐죠. 그런데 브랜드를 만들어놓으니까 고민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학문도 하고, 디자인도 하고, 숍도 운영하고, 기업과 디자인 컬래버레이션도 하고. 순수한 작가들이 보면 마케팅을 잘한다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마케팅을 전문으로 하는 곳에서 보면 저를 굉장히 순수한 작가로 보고 있죠. 그리고 어떤 분은 제가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다 보니 브랜드를 운영할 때 소비자와의 접점을 찾기 힘들 거라고도 말씀해주셨어요. 작가로서의 생활과 브랜드 창립자로서의 생활은 다르잖아요. 저는 아직 브랜드 창립자로서의 활동이 익숙하지는 않아요. 20년간 초석을 다져놓았다면 앞으로의 20년은 이 브랜드를 성장시켜야 할 숙제가 남은 거죠.”


인터뷰가 끝나고 예명지 대표는 자신의 오픈 갤러리를 구경시켜줬다. 그러다가 액자에 걸려 있는 예명지 대표의 과거 기사를 봤다. 지금보다 앳된 모습의 예명지 대표는 그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티파니(Tiffany)나 까르띠에(Cartier) 같은 럭셔리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이 꿈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인터뷰 말미에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했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이렇게 말했죠. 그러다가 제가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이 꿈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이 이야기를 했네요.(웃음)”


글 jobsN 안희찬 대학생 명예기자(한국외국어대 2학년)

사진 서경리 조선뉴스프레스 기자, 사진제공 예명지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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