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여정도 찾아 쓰는 한국 안경 회사 연매출 40억원

조회수 2020. 9. 23. 10:3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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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취향저격한 안경점 '라디오아이즈'..20년간 '안경' 한 우물 판 이세현 대표

트렌디한 안경 전문점 '라디오아이즈'

20년간 안경 사업한 이세현氏가 대표

창업 4년여만에 20만개 넘는 안경 판매


라디오아이즈(radioeyes)는 20~30대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안경 브랜드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이 브랜드의 안경을 쓰고 브랜드명을 해시태그(#)한 게시물을 쉽게 볼 수 있다. 젊은 감각의 트렌디한 제품과 명품 스타일의 제품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 라디오아이즈의 장점으로 꼽힌다.


2013년 8월 오픈한 라디오아이즈는 지난 4년간 10만장 넘는 안경을 팔았다. 다른 매장에 납품한 물량까지 합하면 20만장이 넘는다. 신사동 가로수길에 1호점을 냈는데, 현재는 전국에 총 8개의 지점이 있다. 최근 3년간(2014~2016년) 평균 연 매출은 약 40억원이다. 

출처: jobsN, 라디오아이즈 제공
라디오아이즈 이세현 대표. 오른쪽 사진은 유럽 출장 때

라디오아이즈 대표는 이세현(48)씨. 대학에서 안경을 전공하고, 20년 넘게 안경 장사를 했다. 국내에서 거의 처음으로 ‘부띠크’ 개념의 안경점을 내 주목 받았으며, 국산 안경 브랜드 ‘알로(ALO)’의 부흥을 이끈 안경업계 고수(高手)다. 잡스엔(jobsN)이 그를 만나 안경 장사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한 눈 안 팔고, 안경 외길만 걸어오신 것 같습니다

“1987년 대구보건대 안경광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안경 관련 학과는 대구보건대가 유일했어요. 친척이 안경 장사를 하셨는데 벌이가 좋았죠. 아버지가 안경 관련된 일을 권유하셨어요. 대학 졸업 후 군대 있을 때인 1991년 안경사 면허를 땄습니다. 이후 1994년 대구 동성로에 첫 안경점을 냈습니다. 이후로는 계속 안경 관련된 일만 했습니다.”


-안경점을 오픈하기까지 어떤 것들을 준비했나요

“프랑스의 한 렌즈회사 한국법인 본부장의 해외 출장에 동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1~2년간 이탈리아·프랑스·스위스와 일본 등 유명 안경 장인들의 공방과 안경 공장들을 둘러봤습니다. 안경점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창업부터 해외 견학 등에 들어간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저는 ‘흙수저’는 아녜요. 아버지는 미군 부대 군무원이셨는데, 부자까지는 아니었지만 여유 있는 편이었습니다. 대학 졸업해서 6개월 정도 안경점 직원으로 일했는데, 밤 늦게까지 안경 관련 서적을 들여다보고, 안경 도면도 그려보는 제 모습에 집에서도 놀랐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돈을 보태줄 테니 차라리 네 안경점을 운영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죠. 감사히 지원을 받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첫 안경점 창업 전, 해외 견학을 다니던 때의 이세현 대표

-장사는 잘 됐나요

“1994년 대구 동성로에 ‘루카스’(Lucas)라는 이름의 안경점을 냈어요. 15평(약 49.6㎡) 크기였어요. 사실 처음 가게 열 때의 심정은 ‘돈 많이 벌자’보다는 ‘안경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자’였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제품들을 많이 진열했어요. 이태리, 프랑스, 일본 등에서 건너온 고가의 안경테들이었죠.


당시 가격으로 20만~30만원을 받았으니 1%도 아닌 0.1%를 위한 가게였어요. 간판에도 ‘안경점’이라는 말을 안 썼어요. 그냥 영문으로 ‘Lucas’라는 제 영어 이름 쓴 게 전부였습니다.


안경점인 줄도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요. 해외 견학을 많이 다니면서 바람이 많이 들어갔던 시절인 것 같습니다. 제 만족에 취해서 돈 보다는 ‘나는 남들 파는 안경은 취급 안 해, 난 달라’ 이런 생각에 젖어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장사는 당연히 잘 안 됐고,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했어요. 경험을 쌓았습니다.


돈이야 실력만 있으면 언제든 벌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서 안경 애호가나 연예인이 자주 찾았습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 그룹이던 R.ef(알이에프) 멤버들이 생방송 직전 저희 가게에 들러 안경을 사기도 했어요.”


이씨는 첫 가게를 4년여 만에 접고, 1998년 동성로에 다시 안경점을 냈다. 70평(231.4㎡) 규모의 대형 안경점이었다. 당시 대구에서는 가장 컸고, 전국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규모였다.


초기 창업 비용인 보증금 3억원, 월세 600만원은 대구 서문시장에서 섬유 사업을 크게 하던 친구 아버지에게서 빌렸다. 안경 전문가인 이씨를 눈 여겨 보던 친구 아버지가 “잘 되면 수익을 배분하자”며 투자 개념으로 돈을 빌려줬다.   

대구 동성로에 차린 '루카스' 안경점

-두 번째로 낸 안경점은 컨셉이 완전 바뀌었네요, 계기가 있었나요

“상위 1%에게만 판매한다는 것이 허망하다고 생각했어요. 유명 브랜드 안경을 가져와서 판매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고요. 제가 디자인 한 안경, 제 이름을 단 안경 브랜드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양질의 안경을 만들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판매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두 번째 가게를 열면서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안경을 만들어서 공급했습니다. 대구 안경 공장에 주문을 넣기도 했고, 중국 선전(深圳) 공장에 의뢰해 안경을 받기도 했어요.


당시만해도 중국에서 대량으로 안경을 주문해 가져오는 업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선전이 대형 상업도시가 됐지만, 1995년 처음 선전에 갔을 때만해도 소달구지 보이는 시골이었어요.


안경 관련 해외 견학도 자주 갔고, 국내 안경 공장 하시는 분들도 많이 알고 지냈기 때문에 제가 원하는 방식의 장사를 하려면 선전에 가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직접 디자인한 안경 도면과 실제품을 선전에 들고 가서 ‘이대로 만들어달라’고 주문을 넣었죠.”


그의 두 번째 안경점은 ‘대박’ 행진을 벌였다. 오픈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월 매출이 1억원을 넘었다. 당시 유행은 다양한 디자인과 색감의 ‘뿔테’ 안경이었다. 뿔테 안경은 값싼 노동력이 집중 투입돼야 하는 제품이었다. 한국보다는 중국에 맞는 제조 방식이었다. 이씨는 이를 간파했고, 여러 디자인의 값싼 뿔테를 발 빠르게 국내 시장에 공급할 수 있었다. 1999년에는 경북 대경대에 안경디자인 관련 강의를 나가기도 했다.   

1993년 안경점 직원으로 일하던 시절의 이세현 대표(왼쪽), 1994년 해외 견학 때(오른쪽)

하지만 곧 위기가 찾아왔다. 이씨는 1999년부터 OEM 제품 판매와 함께 샤넬·프라다·페레가모 등 유럽 유명 안경 브랜드 수입 판매도 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거의 최초였다. 하지만 유럽 유통업체들이 납기일을 지키지 않아서 유행이 지나버리거나 주문 상품이 아닌 다른 상품이 배달되는 등 사고가 많았다. 또 세무에 어둡다 보니 재고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막대한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었다.


이씨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2004년 폐결핵·당뇨 등에 걸리며 몸에 큰 이상이 생겼다. 80㎏이 넘던 몸무게가 몇 개월 만에 40㎏대까지 빠질 정도였다. 결국 이씨는 2006년 운영하던 가게 문을 닫았다.


2006년부터 3년 간은 암흑기였다. 병원 치료에만 매달렸다. 딸과 아내를 부양해야 했던 이씨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34평 아파트에 살다가 18평짜리 전세로 옮겼고, 아내는 친정에서 쌀과 반찬을 얻어왔다. 아내가 간간히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힘겹게 버텼다.


-일은 어떻게 다시 시작했나요

“건강을 회복할 무렵인 2009년 국내 안경 브랜드 알로(ALO)를 창업한 박형진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박 대표가 대구로 내려와서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당시 알로는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제 건강상태도 완전치 않고, 아직 일을 시작할 준비도 안 된 것 같아서 박 대표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박 대표는 거듭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알로의 재건에 힘을 합치기로 했습니다.”


-알로에서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이사 직함을 달고 알로가 새롭게 시작하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저는 박 대표에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땅에 가게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임대료가 높은 곳은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대구에서 동성로를 고집했던 이유였고요. 명동에 14평(약 46㎡)짜리 1층 가게를 얻어 입점했습니다. 월 임대료가 6000만원 넘는 자리였어요.


명동은 우리나라에서 상품 판매의 폭발력이 가장 센 곳입니다. 명동에서 1등하면 우리나라 1등이란 뜻이죠.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관광객이 많으니 해외 진출의 발판도 될 수 있습니다. 신촌에 있던 알로 매장을 처분해 시드머니를 만들었습니다. 자금 상황이 매우 안 좋았는데, 모험을 한 거였어요. 박 대표와는 ‘여기서도 안 되면 우리 같이 한강에서 죽자’며 결의를 다졌습니다.”


-알로를 어떻게 바꿨나요

“컨셉을 완전히 뜯어 고쳤습니다. 고객과 상담하는 조용하고 정적인 공간이라는 안경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기로 했어요. 전자댄스음악(EDM)을 클럽처럼 크게 틀었습니다.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요. 또 손님이 들어와도 점원이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점원을 부르면 그때 가서 친절히 응대했습니다.


인테리어도 새롭게 시도했어요. 국내 설치 미술 작가와 협업해 예술적 느낌을 가미했어요. 전반적으로 정적인 공간에서 동적인 공간으로의 변화를 꾀했습니다. 고가의 유명 브랜드 제품은 판매하지 않았어요. 순수 국산 안경으로 채우고, 가격은 2만9000원, 5만9000원, 7만9000원 식으로 부담 없이 책정했어요.”


이씨의 예상은 적중했다. 알로는 명동 상권의 핫 키워드로 떠올랐다. 하루 종일 매장 안이 발 디딜 틈 없이 손님으로 북적였다. 첫 달 매출이 9000만원 정도 나왔고, 몇 개월 지나자 월 매출이 3억원에 육박했다. 이후 알로는 가로수길·종로·충무로에도 명동과 같은 컨셉의 매장을 추가로 오픈하며 전국적인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이씨는 이후 사업 운영 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2013년 알로를 나왔다. 그해 8월 평소 알고 지내던 안경 공예가 황순찬(41)씨와 ‘라디오아이즈’를 창업했다.


-라디오아이즈도 오픈과 함께 성공했나요

“처음 1년은 고전했습니다. 알로에서와 비슷하게 동적인 느낌의 화려한 컨셉으로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월 매출이 1000만원 정도 나왔는데, 인건비만 1000만원이 나갔죠. 적자였습니다.”

독일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한 라디오아이즈 안경테. 왼쪽은 2012년, 오른쪽은 2009년도 출품작

-어떻게 반등했나요

“가로수길에 연 가게인데, 명동처럼 장사를 했으니 전략이 잘못된 것이죠. 1년 후 동적인 요소들을 많이 줄이고, 내추럴하고 감수성을 자극하는 수수한 컨셉으로 바꿨습니다. 컨셉을 바꾼 것이 주효했습니다. 한 달 만에 매출이 7배가 뛰었습니다. 그리고 2014년 경리단길에 두 번째 가게를 열었습니다. 경리단길은 처음부터 장사가 잘 됐습니다.


이후 가게가 줄줄이 오픈해서 현재 8개가 됐습니다. 라디오아이즈 지점들은 저와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맡아서 하고 있어요. 일종의 공동 투자 창업이고, 돈을 그 친구들이 나중에 벌어서 갚는 구조입니다. 2015년에는 전 매장에서 총 50억원 넘는 매출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라디오아이즈 안경의 성공 비결을 꼽는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라디오아이즈는 현재 200개 모델, 색상이 다른 것까지 구분하면 총 800개 모델을 취급하고 있어요. 연간 100개 이상의 모델은 무조건 새롭게 만들어진다고 보면 됩니다. 종류가 매우 많은 편입니다. 트렌디한 안경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때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제때 공급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안경은 원래 신상을 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옷은 유명 연예인이 입고 나와서 화제가 됐다고 하면, 공장에 주문 넣어서 보름 만에 수만 장을 찍어낼 수 있어요. 하지만 안경은 아무리 짧아도 제품화에 2~3개월이 걸려요. 일단 재료가 있어야 하고, 그걸 깎고 만드는 제작 과정이 복잡합니다. 용접·도금 등이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짧은 유행 주기를 맞추는 것이 어렵습니다.


안경점 사장 입장에서는 잘 팔리는 안경이 있어서 재주문 요청을 넣어도 뒤늦게야 그 안경이 도착하기 때문에 매상을 올리기 쉽지 않죠. 제가 하는 사업의 특징은 100% 자가(自家)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대구 안경공장과 중국 선전에서 OEM 방식의 안경을 꾸준히 생산하고 있습니다. 저만의 고유 브랜드죠. 라디오아이즈 전 매장에서 팔리는 안경 숫자를 실시간으로 집계합니다. 어떤 제품이 잘 팔리는지를 알죠. 잘 팔리는 것은 미리 주문을 넣고, 안 팔리는 것은 생산을 늘리지 않습니다. 지난 20년간 축적된 효율적인 안경 제작 노하우가 빛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mbc 방송화면 캡처
배우 조여정이 방송에 쓰고 나온 라디오아이즈 선글라스

-안경이나 선글라스를 고를 때 신경써야할 부분들 조언해준다면

“선글라스 고를 때, 내면 코팅된 렌즈를 고르는 것이 좋습니다. 내면 코팅이 안 된 선글라스는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거나 뿌옇게 보여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내면 코팅을 하면 제조 단가가 높아집니다. 대부분의 소비자가 이를 확인하지 않기 때문에 제조업체는 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내면 코팅이 됐는지 여부를 확인하려면 렌즈 안쪽면을 형광등에 비춰보면 됩니다. 옅은 녹색이나 푸른색의 코팅막이 보이면 코팅이 된 제품입니다.”


-앞으로의 계획

“계속 다양한 디자인·색감의 안경테, 스토리를 담은 안경테를 만들고 싶습니다. 안경은 쓴 것과 안 쓴 것의 차이가 크고 같은 디자인이라도 색감에 따라서도 사람의 이미지가 확 달라집니다. 라디오아이즈가 최대한 많은 사람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안경테들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안경 하나로 사람들이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글 jobsN 김지섭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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