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장애 딛고 특급 디자이너, 머슬마니아 챔피언으로

조회수 2020. 9. 23. 10: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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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마음, 인생을 디자인하고 싶어요
몸, 마음, 인생을 디자인하고 싶어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겸 모델 이연화씨
20대 초반부터 실력 인정받은 전문가
집념과 운동으로 희귀병 극복

4월 29일 열린 ‘2017 머슬마니아 아시안 챔피언십. 1위(그랑프리)를 수상한 이연화(26)씨는 여러 가지로 화제를 모았다. 사회자는 그를 ‘청각장애를 이겨낸 선수’라고 소개했다. 174cm 큰키에 몸무게 51kg, 작은 얼굴과 완벽한 비율을 본 사람들은 그의 직업이 ‘모델’이라 생각했다.

출처: 이연화씨 제공
2017 머슬마니아 아시안 챔피언십 그랑프리를 받았을 때.

그러나 그의 본업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겸 디자이너’다. 제품과 브랜드의 방향과 콘셉트를 정하는 사람이다. 대학생 때부터 정부, 삼성전자·제일기획·포스코 같은 대기업 프로젝트를 맡았다.


주목받는 디렉터인 이씨에게 의도치 않은 시련이 닥쳤다. 2015년 양측 중증 이관개방증과 오른쪽 귀에 돌발성 난청(우이전농) 진단을 받았다. ‘이관개방증’은 귀에서 압력을 조절하는 ‘이관’이 항상 열려있는 희귀병이다. 양귀를 손으로 막을 때처럼 자신의 목소리나 신체기관이 움직이는 소리는 크게 들리지만, 바깥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뚜렷한 원인도 치료법도 아직 모른다. 이씨가 앓은 돌발성 난청은 ‘감각신경성 난청’이다. 단순히 기관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청력세포가 죽는 희귀병이다.


이씨는 이런 불행을 극복하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한다. 요즘엔 방송출연과 화보촬영까지 한다. 잡스엔(jobsN)이 그를 만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의 삶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방법, 인생관을 들었다. 

출처: jobsN

48시간이 모자랐던 대학생활 

누구보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대학생이었다. 경희대에서 4년 내내 예술학과와 산업디자인학과 수석을 차지했다. 각종 디자인 대회와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고 예술디자인학부 학생회장까지 맡은 교내 유명인사였다. 예술학과가 있는 서울 캠퍼스, 산업디자인학과가 있는 경기도 용인 국제 캠퍼스를 오가며 시간을 쪼개 공부했다.


“특정 지식만 달달 외우진 않았어요.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어느 부분에서 이런 개념을 말했는지를 떠올리며 공부했습니다. 주관식 시험이 많아서 이런 공부법이 잘 맞았어요.”

출처: tvN 문제적 남자 캡처

-'독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심히 산 이유가 있습니까.


“노력한 만큼 나오는 결과와 성취감이 좋았습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도 좋았어요. 어릴 적부터 ‘성공’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는데 중학교 진학할 무렵 망했어요. 드라마에서나 보던 빨간 딱지가 집안에 붙고, 집은 경매에 3번이나 넘어갔어요. 집에 들어오지 않던 아버지와 우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기억나요. 그때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초등학생 때는 나누기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학원 다닐 형편이 아니라 선배들이 버리고 간 노트를 주워다 공부했다. 반에서 15등, 8등, 6등으로 성적이 점차 올라 전교 2등까지 했다.


고등학생 때 미술 선생님의 제안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아 실기 작품이 독창적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2013년 ‘디자인 서바이벌 :K DESIGN’에 출연해 6명을 뽑는 최종결승전까지 진출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한국통상자원부가 주최하고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주관한 행사로 신진 디자이너를 뽑는 경쟁 프로그램이었다. 국내 대기업·글로벌 기업 디자이너, 레드닷·IF 같은 세계적 디자인 대회 수상자들이 경쟁자로 출연했다. 대학생은 이씨가 유일했다. 타고난 디자인 감각에 승부사 기질, 긍정적 성격이 참가자 사이에서 돋보였다.

이후 청계천 거리·버스 정류장 디자인 개선, 송도 신도시 인테리어 디자인, 분당 추모공원 휴 건축 같은 국가사업에 참여했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내 브랜드와 콘셉트를 만드는 프로젝트 팀에서도 일했다. 2015년 참여한 제일기획 광고는 칸 국제광고제에 출품해 상을 받았다. 모두 20대 초반에 이룬 일이었다.


“예술학과 산업디자인 전공지식이 도움 됐어요. 슈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이라든지 고대 예술학, 르네상스에 대한 이해를 산업 디자인에 풀어낸 걸 좋게 봐주신 것 같습니다.”

출처: 이연화씨 제공

집념과 운동으로 되찾은 일상 

그는 체력에는 늘 자신이 있었다. 코피 한번 흘린 적이 없었고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 바쁠 땐 이틀에 한번 자기도 했지만 버틸 정도였다. 늘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커피와 카페인 음료를 쌓아두고 마셨지만 큰 탈이 난 적도 없다. 건강을 지나치게 자신했던 것일까. 2015년 귀에 이상이 생겼다.


-언제 증상을 알았나요.


“평소와 다름없이 프로젝트 팀 미팅을 끝나고 점심을 먹을 때였어요. 몸이 서서히 아픈 것도 아니고 갑자기 증상이 나타났어요. 귀에서 삐- 소리가 나면서 감각이 없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아, 이게 남들이 말하는 이명인가 보다’하고 했죠. 저녁까지 귀가 잘 안 들려서 다음날 아침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어요. 그때 의사 선생님이 ‘응급실에 가라’고 했습니다. 미팅이 계속 있어서 바로 가진 못하고 또 다음날 대학병원에 갔어요. 거기서 ‘왜 당장 안 오고 지금 왔냐’고 했습니다. 이미 세포가 다 죽었다면서요.”


귀는 청각뿐만 아니라 평형감각도 담당하는 기관이다. 조금만 걸어도 어지럽고 두통이 왔다. 앞사람이 말을 해도 마치 뒤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윙윙-’, ‘삐-’하는 소리가 귀에서 하루 종일 들렸다. 잘 들리지 않으니 발음이 어눌해지고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대화를 나누는 게 하루아침에 가장 힘든 일이 됐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사람을 자주 만나고 의사소통이 필수인 직업이다. 갑작스러운 청각 장애는 아무리 성격이 긍정적이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 대체 왜 시련이 오는지' 원망스러웠다. 치료할 생각도 없이 한달 동안 울기만 했다.


-치료는 어떻게 했습니까?


“유명 병원에 가서 ‘고용량 스테로이드제’ 주사를 맞았어요. 하지만 일주일 동안 나아지지 않아서 치료를 멈췄어요. ‘세포는 죽으면 살아날 수 없는 게 의학 상식’이었어요. 알고 보니 스테로이드제 부작용 때문에 일주일 넘게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포기할 수 없었어요. 다른 병원에 가서 ‘부작용을 부담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한달 동안 치료를 받았습니다. 스테로이드 부작용 때문에 몸이 퉁퉁 부었어요. 다행히 청력세포가 30% 정도 돌아왔어요. 기적이었죠.”


이씨가 동시에 앓은 ‘양측 중증 이관개방증’은 국내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당시엔 정확한 병명조차 몰랐다. 수소문 끝에 이관개방증 치료법을 연구하는 일본 의사가 있다는 걸 알았다. 1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3차례 수술을 받았다. 증세가 조금 나아졌지만 완치는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분기마다 일본에 가 상태를 확인한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고개를 숙이거나 코로 약을 넣어야 한다. 이명이 들리거나 귀에 압력이 높아져 불편하기 때문이다.

출처: 이연화씨 제공

-치료를 위해 운동을 시작했나요?

“정확히는 마음을 치료하고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어요. 예술 역사에서 ‘인간의 본질’을 고민한 시기가 있어요. 디자이너인데 본질이 아닌 껍데기에만 신경 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강, 몸도 디자인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유산소 운동은 할 수 없었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귀에서 크게 울리기 때문이다. 숨이 차지 않는 무산소 운동을 주로 하다 보니 근육이 생기기 시작했다. 올초 피트니스센터 대표가 이씨에게 ‘2달 후 열리는 머슬마니아 대회를 나가보라’고 제안했다.

출처: 이연화씨 제공
2017 머슬마니아 아시안 챔피언십 그랑프리를 받았을 때.

-대회 준비는 어땠습니까?

“본업이 있어서 운동시간을 내기가 힘들었어요. 하루에 2시간씩 개인 트레이닝을 받았어요. 식단 관리도 했습니다. 집에서는 걷는 법과 포즈를 연습했어요. 발표는 많이 해봤지만 소위 말해 ‘끼 부리는 포즈’를 해본 적은 난생처음이어서 어색했어요. 대회에서 입을 옷도 직접 만들었습니다. 대회 날짜가 코앞이라 정신없이 준비했어요.”


총 3번의 심사를 거쳐 아시안 챔피언십에서 1위를 차지했다. 1위 수상자는 세계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이씨는 6월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머슬마니아 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나갔다. 패션모델 부문에서 1위를 했다. 전체 부문에서는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

출처: 이연화씨 제공
(왼쪽) 2017 모델 월드 유니버스 파이널 챔피언십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모습.

지금 생을 다시 살아도 좋을 만큼 

최근 이씨는 광고 사진 한장으로 운동화를 완판시켰다. 타깃층인 10대 여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콘셉트를 정확히 읽은 결과다.


프로젝트 기간은 트렌드 조사·화보 작업·팝업스토어 기획 등 일부 단계에만 참여하면 1~2주 안에 끝나기도 한다. 한 브랜드에 관한 업무 전반을 맡을 때는 6개월~1년이 걸린다. 지금은 한해 2억~3억원을 번다. 최근 한 방송에서는 "한 프로젝트에 8000만원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장기적이고 큰 프로젝트라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저희는 일당 개념으로 계산하는데, 프로젝트 기간에 일당을 곱하는 거죠. 시장조사, 디자인 등 단계마다 추가되기도 하구요. 실력을 인정받을수록 페이가 커지겠죠.” 

출처: tvN '문제적 남자' 캡처
tvN '문제적 남자'에 출연했을 때.

-아이디어를 성과로 이어지게 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트렌드를 읽고 그 트렌드를 목표 소비자가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게끔 고민합니다. ‘내가 봤을 때 좋아야 남들이 봐도 좋다’고 생각해요. 사실 처음부터 목표치를 높게 잡습니다. 결과물이 100% 만족스럽지 못해도 그 과정에서 한번이라도 더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완성도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해 의사소통하는 노하우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는 편입니다. 험담도 하지 않아요. 누군가 제게 짜증을 내면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 자체를 보려고 합니다. 저도 단점이 있으니까, 굳이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볼 필요는 없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문화적으로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절대 제 본래 직업에 소홀하진 않을 겁니다. 3년 새 많은 걸 경험하면서 생각도 함께 변했어요. 이전에는 열심히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악바리처럼 살았어요. ‘성공’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요. 친구들에게도 ‘놀 때가 아니다’고 말하곤 했죠. 지금은 ‘행복’이 중요해요.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데, 제 모토는 ‘이 인생을 다시 한번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입니다. 맹목적인 성공에 집착하진 않지만, 도전정신은 잃지 않을 겁니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출처: 이연화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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