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가정주부, 한국 최고 '알부자' 된 비결

조회수 2020. 9. 22. 11:4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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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 숨은 '알 부자'의 꿈은?

“아마 제가 한국 제일의 ‘알 부자’일 겁니다.”


김귀선(53)씨는 알공예(egg art) 전문가다. 타조알, 거위알, 계란, 메추리알 등 자연의 알을 조각해 공예품을 만든다. 평범한 알에 기하학 무늬를 새긴다. 금실을 입히고 구슬이나 크리스탈을 박아 보석처럼 반짝이게도 만든다. 작품 하나 만드는데 짧게는 하루, 길게는 수개월이 걸린다.


20여년간 그가 만든 작품은 약 500점. 이 작품을 모아 부산에서 알공예 박물관 건립을 준비 중이다. "알 공예만 전시하는 박물관은 아직 국내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국내 최초의 '알공예 박물관'이 될 겁니다."


그는 2002~2004년 동아대 사회교육원에서 에그아트 지도사 과정 외래교수로, 경성대 평생 교육원 에그아트 전문과 과정 지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현재 알 공예 체험교실을 열어 부산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 본인 제공
알 공예가 김귀선씨 모습.

평범한 회사원, 잡지에서 본 알공예 작품에 매료

처음 알공예를 알게 된 것은 1990년대 초. 김씨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비행기 타고 고향인 부산에 갈 때 우연히 잡지에서 알공예 사진을 봤어요.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한 장 찢어 한참 보다가 수첩에 넣었죠.”


몇 년 뒤 결혼과 함께 퇴사했다. 아이 키우며 가정 주부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1990년대 후반이었다. ‘내가 살면서 정말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었나’ 하는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때 떠오른 게 수첩에 들어있던 찢어진 잡지 한 장이었다. “나도 저런 공예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알 공예를 가르치는 곳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한국에선 알 공예라는 게 생소할 때였습니다.” 독학으로 알 공예를 시작했다. “날계란 먹을 때 젓가락으로 계란 위아래에 구멍을 내죠? 그렇게 내용물을 빼낸 다음 껍질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출처: 알공예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알공예 박물관에 전시된 에그아트 작품들.

숱하게 계란을 깨뜨리며 작업했다. 가위로 자르기도 하고 줄톱으로 갈아보기도 하며 어느 부위가 강하고 약한지, 어디를 깨뜨려야 하는지 노하우를 익혔다.


-알공예 전문 도구는 없나요


“제가 사용해본 도구 가운데 제일 좋은 건 치과의사가 사용하는 치아 치료용 커팅기였습니다. 이를 갈아내는데 쓰는 작은 전동톱같이 생긴 기구였죠. 친구 남편이 치과의사여서 한두 번 사용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음에 쏙 들게 계란을 자르고 모양낼 수 있더군요. 나중에 ‘알’과 치아의 표면 성분이 비슷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의료용 기구를 계속 사용할 수 없었다. “치료기구인데 공예에 필요하니 빌려달라고 할 수 없었죠. 당시에도 그 기구는 수천만원이 넘어서 구입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공예가들을 수소문한 끝에 금속공예 전문가들이 치아 치료기구와 비슷한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당 기구를 만드는 공장을 찾아가 20만원에 맞춤 장비를 마련했다.  

출처: 본인 제공
알공예 작업중인 김귀선씨 모습(왼쪽)

전문가 찾아 일본까지 유학…비자 받으려 일본 영사도 설득 

-계속 독학으로만 공부하신 겁니까


“남편과 결혼기념일에 일본 여행을 갔다가 일본에도 알 공예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와타베 가즈미(渡部和美)’ 선생님이 나오더군요. 이분께 배우고 싶어서 일본 주소를 찾아 한 달에 1~2통씩 1년간 편지를 보냈습니다.”


일본어 실력은 썩 좋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일본어 교양수업을 1년 들은 게 전부였다. 일본어 회화 책을 펴들고 문장에 단어만 바꿔가면서 편지를 썼다. 가령 ‘홍길동 선생님 안녕하세요’ 라는 문장이 회화 책에 나온다면 이름만 바꿔 ‘와타베 가즈미 선생님 안녕하세요’하고 고쳐 쓰는 식이었다.


1년의 고생 끝에 에그아트 수강을 허락받았지만, 비자가 문제였다. “당시 한국에서 일본을 갈 때 비자가 잘 안 나왔어요. 학생이라면 가능한데, 가정주부인 저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번엔 일본 영사에게 편지를 보내 설득에 나섰다. 일본에서 에그아트를 공부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와 와타베 가즈미 선생과 주고받은 편지를 첨부했다. “일본 영사가 직접 불러서 3개월이든 6개월이든 원하는 만큼 일본에 다녀오라며 비자를 해결해줬습니다.” 3개월에 한번씩 한국과 도쿄를 오갔다. 2001년에는 1년간 일본에 머물며 에그아트 마스터 과정을 마쳤다. 비용은 남편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2002~2004년까지 동아대와 경성대 평생교육원에서 에그아트 전문가 과정을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수업은 아니었지만, 대학에서 알 공예 전문 수업이 생긴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많은 학생이 듣지는 못했습니다. 2년 동안 약 50명, 그중엔 지금 에그아트 강의를 직접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이후 에그아트 전문가로 방송에 소개되면서 대기업 사원 연수에 나가 공예 강의도 했다. 알공예 작품으로 개인 전시회를 6번 열었다. 

출처: 에그아트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박물관 내부 모습(왼쪽), 박물관에 전시된 에그아트 작품.

알공예 박물관 준비, 의미있는 공간 만들고파

-박물관 구상은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일본에서 공부할 때 처음 생각했습니다. 가즈미 선생님이 구상 중인 에그아트 뮤지엄 도면을 보면서 박물관이 완공되면 스태프로 일하다가 나도 국내에 만들어야지 했거든요.”


가즈미씨의 에그아트 박물관 건립 계획이 개인 사정으로 무산되면서 스태프로 경험을 쌓겠다는 그의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미국엔 하우스뮤지엄, 홈 뮤지엄, 갤러리도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꼭 박물관이 으리으리할 필요는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는 최근 부산에서 오피스텔을 얻어 알공예 박물관으로 꾸미고 9월 개관을 앞두고 있다. 2016년에는 중소기업청 창업스쿨에 등록해 경영을 위한 컨설팅과 마케팅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알 공예 작품이 비싸다고 들었습니다


“비싼 작품은 하나에 수백만원이 넘습니다. 특히 기업인들 가운데서 알의 상징성을 높게 평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탄생, 새로운 시작, 희망’ 같은 의미가 있거든요. 어떤 분들은 타조알이 가장 크니 값도 비싸겠다고 하시지만, 값이 크기로 매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운반이나 관리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만든 작품은 다른 사람이 옮기지 못하게 합니다. 포장도 하나하나 직접 합니다. 어떤 부분을 손으로 잡아야 하는지, 혹은 건드리면 안 되는지 저만 알거든요. 반대로 제자가 만든 작품을 제가 마음대로 만질 수 없습니다. 그 작품에 대해서는 만든 사람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죠.”


-다른 목표가 있습니까

“도시에서 버려진 빈 공간을 찾아 알공예 복합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알은 음식 재료로도 쓰이잖아요. 껍질로는 공예 체험을 하고, 내용물은 요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알의 탄생 의미를 극대화해 알공예 박물관을 스몰 웨딩 장소로도 활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알공예를 하는 많은 분들에게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글 jobsN 이병희

jobarajob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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