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저런 글 붙이고 일만 하던 삼성맨 퇴사, 왜?

조회수 2020. 9. 22. 11:45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40세 앞두고 제2의 '사춘기' 찾아온 대기업 '일 중독' 직장인의 좌충우돌 창업기
삼성화재 다니다 식당 창업한 이정훈氏
성과 좋은 '일 중독' 직원에서 사장님·연사로 변신
주체적 삶 꾸려가는 퇴사 이후의 생활
삼성화재 다니다 퇴사해 식당 창업한 이정훈씨

잘 나가던 13년차 ‘일 중독’ 대기업 직원 이정훈(41)씨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회사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 싱글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둘 있는 아빠였고, 외벌이였다. 그의 사의(辭意) 표명은 공부밖에 모르던 모범생의 ‘자퇴 선언’ 이상의 충격이었다.


퇴사 사유도 의외였다. “아이들을 더 좋은 교육환경에서 키우고 싶어서 (아무 연고도 없는) 호주에 가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호주 대학원에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당분간 살고, 현지 회사에 취업하겠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항상 좋은 업무 평가를 받고 사내 핵심 부서에 근무했으며, 주말 근무와 ‘7 to 12’(7시 출근, 밤 12시 퇴근)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범 직원이었다. 직장인의 꽃이라는 ‘임원’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직원들 중 한 명이었다.


회사는 몇 번을 뜯어 말리고, 타일렀지만 그의 눈빛은 결의에 차 있었다. 결국 사표가 수리됐고, 6개월 후 회사에는 책이 배달됐다. ‘평범한 회사원의 연매출 5억 식당 창업보고서’라는 부제가 달린 창업 서적이었다. 저자는 이씨였다. 

출처: 이정훈씨 제공
삼성화재에 다니던 시절의 이정훈씨. 사무실 책상에 적힌 '내가 열심히 일하지 아니하면 애들이 고생한다'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제가 나름 말 잘 듣고 열심히 일하던 직원이었던만큼 식당 때문에 회사를 나간다고 말씀드리면 너무 험난할 것 같았어요. 회사에서 이해를 못할테고, 뜯어말렸겠죠. 혹시나 식당이 잘 안되면 뵐 면목도 없으니까 밝히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독하게 마음 먹고 퇴사 사유를 거짓으로 대는 강수(強手)를 둔거죠. 책 내고서 사정 설명 드리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회사에서도 격려해주시고, 식당에 많이 찾아와주세요.” 

왜 다른 마음을 먹었나 

이씨는 2003년 성균관대 경제학부 졸업 후, 삼성화재에 입사했다. 15년 전 삼성화재 초봉은 4000만원(세전)이 넘었다. 은행보다 보수가 높은 금융권 ‘꿈의 직장’ 중 한 곳이었다.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2003년 입사해 2004년 결혼하고, 2005년 첫 아이를 낳았다. 체제 순응적 삶이었다.


마케팅 기획·전략 등 주요 부서에서 일하다보니 ‘오전 7시 출근, 자정 넘어 퇴근’이 일상이었다. 주6일을 밥 먹듯이 했고, 주7일 할 때도 있었다. 높은 업무 강도에도 큰 불만은 없었다. 당시 회사 선배들도 비슷한 생활을 했고, 충분한 보상과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연말이 되면 두둑한 성과급이 나왔고, 업무 고과는 늘 좋았다.


퇴사 직전 각종 성과급 등을 포함해 그가 받은 연봉은 1억원을 훌쩍 넘었다. “일 열심히한다”며 회사에서 대학원도 보내줬다. 2010년 카이스트 경영전문대학원에 입학해 1년 반동안 출근 안하고 월급 받으면서 공부만 했다.


“일뿐인 삶이었지만 대체로 만족했어요. 외벌이임에도 가계 경제를 걱정해 본적이 없어요. 충분히 번다고 생각했고, 계획적으로 소비하지 않았어요. 한 푼이라도 아끼는데 에너지 낭비하느니 차라리 일에 집중하겠다는 생각이었죠.” 

출처: 이정훈씨 제공
해외 출장지에서 직장 동료들과(왼쪽). 오른쪽 사진은 카이스트MBA 졸업식날.

일밖에 모르던 그가 40세에 가까워지면서 ‘사춘기’가 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엄습했다.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아무런 준비 안하고 이렇게 일만 하면 다 해결될까’라는 근원적 회의감이 들었다.


“직장 선배들의 성공 가도를 따라가려 했었고,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회 환경이 바뀐 것을 간과하고 있었죠. 직장 선배들은 성장기 시대를 살았어요. ‘공부 열심히해서 좋은 대학가면 취업 잘 된다’, ‘평생 안정적으로 회사 다니면 노후는 저절로 보장된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대출 받아서 강남에 집을 사면 자산 증식이 저절로 이뤄졌고, 주식도 많이 올랐고요.


그런데 취업난과 노후 빈곤은 이제 시대 흐름이 됐어요. 명문대 나와서 백수가 되고, 대기업 은퇴해도 노후 생활은 암울하죠. 이제 우리 세대는 대기업을 다녀도 대출 받아 강남에 집 사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이미 엄청 올랐거든요. 앞으로 더 오를 것이라 확신할 수 없어요. 성장기 시대의 선배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점점 나아지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우리는 같은 길을 걸어도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과실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시 아내의 대학원 학비, 두 자녀의 학원비로 월 300만원 넘는 돈이 나가는 것도 불안했다. 연말 성과급을 제외한 당시 월급은 400만~500만원 정도. 저축은 거의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월급으로 굴러가는데, 이게 만약 중단 된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출처: SBS방송화면 캡처
최근 SBS스페셜의 '퇴사' 관련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이정훈씨

“4인 가족의 생존권이 오롯이 제 월급에만 의존하는 상태가 불안했어요. 일에 미쳐서 나중에 임원되고 계속 승승장구하면 문제가 해결되죠. 그런데 그건 제 인생 계획일 뿐이지 결정은 회사가 내리는 거잖아요? 제가 주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상당히 큰 하자가 있는 불안정한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아내와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제가 직장 다니는 상태에서 창업을 한 번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단, 예상 금액 내에서만 가게를 운영하고 추가 자금 투입이 필요한 경우에는 깔끔히 가게를 접는다는 원칙을 세웠죠.”

어떻게 준비했나 

2013년 여름 이씨는 창업 아이템을 식당으로 정했다.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었지만, 직장 생활하며 식당 밥 수천 끼를 먹은 내공을 믿었다. 어머니가 한식당을 운영하는 것도 영향을 줬다. 곁눈질로 배운 식당 운영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창업은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회사는 물론 가족친지,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가끔 일찍 퇴근하는 날과 주말을 활용해 입지 조사와 인테리어, 내부 설비 등을 계획했다. 가게 입점 장소는 서울 남산(후암동)으로 정했다. 직장(을지로)과 집(동부이촌동)이 가깝고, 직장인 상권인 곳이었다. 치킨집이 망하고 나간 점포여서 권리금은 없었다. 보증금 2000만원, 월세 200만원에 계약했다. 인테리어를 위해 업체에 문의했더니 1억원을 불렀다. 예상 비용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였다. 

출처: SBS 화면 캡처
퇴사 관련 내용으로 SBS 방송에 출연했던 이정훈씨. 왼쪽 사진은 이씨가 직장생활 할 때의 모습, 오른쪽은 가게를 준비할 때 그렸던 내부 인테리어 스케치

이씨는 설비·목공·철공·전기·도색 등 공사 및 인테리어 전 과정을 직접 섭외해 비용을 아끼기로 했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사람을 구했고, 5000만원을 절감했다. 밖을 다니면서 본 가게나 인터넷에서 본 사진을 스케치해서 인테리어 지시를 했다.


아무리 남는 시간을 활용한다 해도 현장에서 공사를 감독하고, 물품을 사올 사람이 필요했다. 가게 오픈 2개월 전부터 요리사 겸 직원 2명을 채용했다. 아직 열지도 않은 가게이다보니 취업사이트에 채용 공고를 내기도 어려웠다. 이씨 부부는 취업사이트에서 수백장의 공개 이력서를 조회해 연락했다. 어렵사리 7명 면접을 보고 2명을 채용했다. 가게 오픈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당시 제 상황을 그분들께 충분히 설명했어요.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운영할 것이기 때문에 사업파트너라 생각하고 일해달라’고 했습니다. 부탁만 한게 아니라 실질적인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어요. 손익분기점을 넘는 매출의 일정 비율을 가져가게끔 해주겠다고 제안했죠.” 

출처: 이정훈씨 제공
직접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그려가며 가게 오픈 준비

“난관은 극복할 수 있다”

지금은 식당 평균 월 매출이 4000만원을 넘지만, 처음 2~3개월은 적자를 겨우 면하는 수준이었다. 주변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이면 몰려들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매상이 저조했다. 돌파구는 밖에서 찾았다. 남산과 서울역 인근의 외국인 관광객을 잡아보자는 전략이었다.


영어·중국어·독일어·일본어를 쓰는 외국인 유학생들을 각각 한 달씩 홀서빙 직원으로 고용했다. 시급 1만원을 주면서 그들에게 내린 미션은 한 가지. 외국인 손님이 오면 최대한 말을 많이 걸고, 친절하게 응대하고, 음식에 대한 설명을 많이 해주라는 것이었다. 적극적으로 사진을 찍어주라는 주문도 했다. 식당 메뉴판은 4개 국어로 준비했다.  

출처: 이씨 제공
이씨가 창업한 식당(왼쪽) 전경과 외국 사이트에 소개된 이씨의 식당

“식당 근처에 힐튼호텔·서울역도 있었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 주변에 많았어요. 외국인 손님이 많이 오게 하려면 그들이 현지에서 쓰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식당이 ‘맛집’으로 검색이 돼야 했어요.


지금은 돈 받고 해외 포털사이트에 맛집 후기를 올려주는 서비스도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 방식을 제 나름대로 고안한겁니다. 우연히 들른 외국인 손님들에게 음식에 대한 많은 정보를 줘서 SNS나 블로그에 음식 사진과 함께 멘션을 달 수 있게 해주고, 좋은 기억을 남겨주려 했습니다.” 

출처: 이씨 제공
꼼꼼하게 식당 관리를 한 이정훈씨

반응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현지 사이트에서 식당 후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국 음식을 경험해서 좋았다”, “맛있고 신기했다”, “외국어 하는 직원들이 친절해서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와 같은 호평이 많았다. 외국 언론사 몇 곳에서는 취재 요청도 들어왔다. 세계 최대 여행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에 올라 있는 10만개 넘는 서울 식당 중 이씨의 식당은 평가 랭킹 24위에 오르기도 했다.


외국인 고객이 늘면서 식당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점차 내국인 손님의 발길도 이어졌다. 현재 식당 매출의 3분의 1은 점심시간대 직장인 손님이고, 나머지 늦은 오후와 저녁 매출의 절반은 외국인 손님이다. 식당을 연 지 6개월쯤 뒤부터 순이익이 1000만원 가량 나기 시작했다. 식당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씨는 회사를 나왔다.     

퇴사 후 연사로도 활동 중인 이씨

앞으로의 목표 

이씨는 처음부터 창업 ‘실험’을 책으로 쓸 생각이었다. 창업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고, 사진을 찍었다. 퇴사 3개월 만에 글을 썼고, 6개월 후 출간했다. 책이 나오면서 이씨는 창업과 퇴직 관련 연사로도 활동 중이다. 삼성그룹 금융 계열사를 비롯해 현대해상, 우리은행, KEB하나은행, 노사발전재단 등에 강연을 나갔다. 최근에는 한 달 4~5회 정도 강단에 선다.


올해 4월에는 운영하는 식당 바로 근처에 ‘스테이크 펍’을 열었다. 전혀 다른 느낌의 음식점에 식당 운영 노하우를 적용해보고 싶어서다. 이씨는 식당 운영 경험을 살려서 조만간 외식경영 관련 박사과정에 들어갈 예정이다. 교육컨설팅업체를 차리기 위한 준비도 하고 있다.   

출처: 이씨 제공
이씨는 퇴사하던 날 회사 건물을 사진 속에 남겼다(왼쪽). 오른쪽은 두번째로 오픈한 음식점

“회사에서든 식당에서든 정말 열심히 해야만 살아남는 것 같아요. 하지만 회사 직원은 미래 결정의 주체가 아닌 ‘객체’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직원의 운명을 회사가 결정해주는 것이니까요. 회사 생활을 통해 많이 배웠고 감사한 경험과 기회를 얻었어요. 회사에서 배운 것들을 식당 운영에도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회사를 ‘잘 졸업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되, 고민을 멈추지 마세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마세요. 저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도전할 겁니다.”


글 jobsN 김지섭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