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금 털어먹고 지구 5바퀴 돈 남자가 찾은 직업

조회수 2020. 9. 22. 11: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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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의 세계일주, 지구 다섯바퀴를 돈 남자가 선택한 직업
여행디자이너 길형택씨
건설업→음향·조명 엔지니어→대안학교 교사
시간·요령 없는 사람에게 여행 계획 짜주는 직업

지구를 다섯 바퀴쯤 돈 사람이 있다. 2008년부터 세계 일주를 3번이나 했다. 10년 동안 86개국을 돌아다녔다. 주인공은 길형택(43)씨. 여행을 다니느라 퇴직금, 전세금을 모두 털어먹었다. 1년 중 해외에 있는 날이 더 많아 한국에 자기 집이 없다. 떠날 때 짐은 친척 집에 맡긴다.


그는 원래 7년 동안 건축·토목 설계 일을 했다. 경원대(현 가천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2000년 경인엔지니어링에 입사했다. 벽산·한신·LG·대림 아파트, 곤지암리조트 스키장과 골프장 짓는 일에 참여했다. 하지만 2006년 회사가 부도났다. 32세 대리 때였다. 이후 취미였던 음향·조명 엔지니어 일을 하며 여행을 다녔다. 2008년 대안학교 학생들의 세계여행을 인솔한 뒤 본격적으로 여행가로 나섰다. 

출처: 길형택씨 제공

“2003년부터 패키지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고 틈틈이 20개국을 돌아다녔어요. 이 사실을 알고 지인이 중국에 있는 대안학교에서 여행을 가는데 인솔교사를 맡아달라고 했죠. 이 학교는 여행 자체가 공부인 특이한 콘셉트의 교육기관이었습니다. 2년 정도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어요. 경비만 지원받고 급여는 받지 않았어요.”


그가 인솔교사로 일했던 곳은 중국에 있는 한 국제학교다. 이곳의 한국 학생 5~6명만 모아 2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녔다.


“인솔교사로 일하고 난 뒤 혼자 10개월 동안 20개국을 또 돌아다녔어요. 그전에도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이때는 마흔을 앞둔 나이라 의미가 달랐습니다. 나름 남들보다 여행을 많이 다녀봤는데 이 경험을 그냥 썩히기 아까웠어요.”


그의 직업은 ‘여행디자이너’다. 2013년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창직’(직업을 만듦)했다. 시간이 없는 사람, 여행을 다녀 본적 없는 사람을 대신해 여행 계획을 짜고 숙박·교통 예약을 대신한다. 10일 정도의 장기여행 계획을 짜주고 50만원을 받는다. 2박 3일 단기여행에서는 10만~15만원을 받기도 한다.


여행 상품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로지 한 고객을 위한 맞춤형 여행 계획을 짠다. 남들이 다 가본 ‘명소’와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장소’를 적절히 조합해 색다른 여행을 만든다. 오랜 여행 경험에서 나오는 노하우다.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 손자까지 대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자동차 여행’을 기획한다. 그가 자동차를 몰며 2주~한달 동안 가족을 안내한다. 또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여행지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그는 ‘트래블로(Travello)’라는 여행업 사업자 등록증을 갖고 있다.


‘여행’을 업(業)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여행가이드, 여행작가, 여행 상품 기획자, 여행 코디네이터 등 무수히 많은 직업이 있다. 이런 직업을 두고 ‘팔자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생각하는 ‘여행디자이너’란 무엇인지 들어봤다. 

출처: 길형택씨 제공
(왼쪽) 포르투갈 밤 비행기 안에서 찍은 사진과 스페인 론다에서.

1. ‘여행, 가보면 안다’고 말하는 이유


‘여행 좀 다녀봤다’고 말하는 여행 전문가는 여행을 해봐야 견문을 넓히고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여행에서 어떻게 견문을 넓히고 자아를 찾아야 하는지 뚜렷하게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하나같이 ‘가보면 안다’고 말한다. 길씨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여행계획을 타이트하게 짜는 분들이 있어요. ‘첫째날 오전 10시에는 뭘 해야 하고, 12시에 몇 번 버스를 타고 30분 동안 이동해서 1시간 동안 박물관을 둘러본다’는 식으로요. 하지만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 여행하다 보면 계획대로 안될 때가 많아요. 길을 잃는다거나, 날씨가 좋지 않다거나, 버스가 늦는다거나. 실수하고 깨지면서 ‘이런 상황에서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다음번에는 이렇게 해야겠다’고 깨달을 수 있어요. 이걸 두고 견문을 넓히고 자아를 찾는다고 말하는 거예요.


또 낯선 곳에서는 관찰력이 높아져요.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것들을 낯선 곳에선 유심히 보게 돼요. 시장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물건을 살 때는 어떤 표정을 하는지를 볼 수 있어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투영해볼 수 있습니다. 여행 1년을 하면 인생 경험 10년 치를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길형택씨 제공
(오른쪽)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현지인과 찍은 사진. 길씨는 처음 가는 곳에서는 현지인 도움을 받아 일정을 짠다.

2. '여행'을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도 슬럼프는 있다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하찮아 보여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돈만 쓰고 있구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인도의 타지마할을 봐도 아무 느낌이 없는 거죠. 일종의 직업병이자 슬럼프, 매너리즘이에요. 실제 많은 여행작가, 여행전문가들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보통 6개월쯤에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땐 ‘일단 그곳에 멈추라’고 말합니다. 움직이지 말고 그곳에서 일상생활을 해요. 제일 좋은 건 춤이든, 어학이든 무엇이든 배우는 겁니다.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불법이면 안 되겠죠. 2012년 3번째 세계일주를 할 때 저도 슬럼프를 겪었습니다. 이때 에콰도르의 한 어학 학원에서 돈을 받지 않고 일했어요. 대신 숙박을 해결했습니다. 청소부터 운전, 어학교재 만드는 일을 했는데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어요.” 

출처: 길형택씨 제공
(왼쪽) 교토시에서 찍은 사진과 호주에서 스노클링하는 모습

3. 장비는 중요하지 않다


“‘무슨 카메라 쓰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오래 여행하려면 DSLR처럼 무거운 카메라는 못 갖고 다녀요. 비싼 카메라 신경 쓰느라 여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10만원짜리 디카(디지털카메라)를 씁니다. 스마트폰도 자주 이용해요. 아무리 잘 해도 사진작가보다 잘 찍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요.


다만 사진을 찍을 때 다른 목표는 있어요. 사진을 본 사람이 여러 가지 해석을 했으면 좋겠어요. 가령 ‘리우데자네이루’에 가면 팔 벌린 예수상을 많이 찍어요. 그런데 찍는 각도가 다들 똑같아요. 앞에서만 찍지 않고 뒤에서도 찍을 수 있죠. 체코 시계탑에서는 시계가 아니라 그 탑에 올라 내려다보며 사람들을 찍을 수도 있어요.” 

출처: 길형택씨 제공
그는 여행할 때마다 '우체통'을 찍는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 누군가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 등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중년·어르신일수록 여행이 좋다


“‘여행’에서 중년이나 어르신들은 상대적으로 멀어져 있습니다. 여행하면 청년, 도전, 열정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르죠. 하지만 은퇴 후 중년, 50~60대 분들도 적극적으로 여행을 다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살면서 굳었던 습관이나 생각을 다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언어가 안돼서 걱정하시는 분도 있는데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르신들은 그동안 살면서 쌓은 ‘눈치’로 다 해결할 수 있어요.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이 대단합니다. 실제로 가족여행을 함께하다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 어르신들 많아요. 영어 한마디 못해도 호텔 안내데스크, 시장에서 무리 없이 대화합니다. 영어를 제2외국어로 쓰는 나라가 훨씬 많습니다. 영어를 모국어가 아닌 제2외국어로 쓰는 사람끼리 만나면 말이 더 잘 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출처: 길형택씨 제공
필리핀 세부에서.

5. "여행은 돌아오는 거야"


“‘여행을 마냥 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하지만 여행은 결국 일상생활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 생각해요. 여행을 하다보면 결국 돌아간 후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주는 상사를 어떻게 할까'는 고민부터 '앞으로 어떤 삶을 살까'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죠. ‘내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기 위해 여행만큼 좋은 것도 없습니다. 여행이 제2의 인생을 살수 있게 하는 수단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

여행디자이너의 경쟁력

여행업은 레드오션이다. 여행사와 여행전문가들이 수도 없이 많다. 길씨는 기존에 있던 여행 상품이 아니라 고객을 위해 여행 계획을 짜주고 안내한다. 한 가족의 여행을 책임지기 때문에 스스로를 ‘여행 집사’라고도 부른다. 얼핏 들어선 ‘한 끗’ 차이다. 그가 갖는 경쟁력은 무엇일까. 

출처: 길형택씨 제공

“블루오션은 레드오션 속에서 찾는 거라고 하잖아요. 여행디자이너는 고객의 취향과 스타일을 듣고 여행지를 조합하는 직업입니다. 여기에 제 의도가 10~20% 들어가요. 여행 경험도 중요하지만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여행의 가치, 철학도 중요한 것 같아요. 가족여행을 계획할 땐 소도시를 한 군데 꼭 넣습니다. 대도시에서는 아이들 신경 쓰느라 신경이 곤두서요. 반면 작은 마을에 머무르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런 식으로 여행 일정에 제 취향과 경험을 담은 비밀 장소를 넣어두고 ‘여기에 가보는 것도 좋다’고 제안해요.


저는 특히 가족여행이라면 ‘아버지를 가정에 돌려주자’고 생각해요. 평소 가족과 어딜 가면 아버지가 운전하고 표 끊느라 모처럼 낸 시간마저 대화를 못합니다. 가족이 온전히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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