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세에 영화 한 편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인

조회수 2020. 9. 18. 15:2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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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악녀'서 촬영감독이 와이어에 매달려 촬영

감독이 ‘아버지’라면 촬영감독은 ‘어머니’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 영화계에 몸담아


살인 병기로 길러진 최정예 여성 킬러가 복수에 나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 ‘악녀’. ‘악녀’는 지난 5월 제70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 초청을 받았다. 1인칭 시점으로 촬영한 오프닝 장면과 빠른 템포의 액션이 주목을 받았다. 1인칭 시점은 화면에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이 보는 세상을 보여준다. 영화 '악녀' 개봉 후 한국 액션물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 영화의 촬영을 맡은 건 경력 16년 차 박정훈(35) 촬영감독이다. 고등학생 시절에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2009년 장편영화 데뷔를 한 박 감독을 영화 '악녀' 이후 다시 봤다는 사람이 많다. 박 감독에게 촬영감독의 세계와 촬영감독이 되는 방법에 대해 들어봤다.  

출처: 배급사 NEW 제공
영화 '악녀' 포스터

◇험난했던 영화 ‘악녀’ 촬영기


영화 ‘악녀’는 오프닝부터 화려한 액션을 선보인다. 여성 킬러가 홀로 좁은 건물 복도를 내달리며 수십 명의 남성을 쓰러뜨린다. 오프닝 장면은 온라인 게임 '서든 어택'을 연상시킨다. 스크린에는 달려오는 상대편 남성과 주인공 숙희의 팔만 보인다. 그래서 1인칭 시점이다. 관객들은 자신이 마치 숙희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영화 ‘악녀’에서 1인칭 시점으로 촬영한 오프닝 장면이 화제다

“1인칭 시점으로 촬영을 하기 위해 오토바이 헬멧에 서브 카메라를 장착해서 헬멧 캠을 만들었다. 달려오는 상대 남성 연기자의 표정이나 움직임을 잘 담기 위해선 헬멧을 쓴 사람이 목을 정교하게 움직여 카메라 앵글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주인공 역을 맡은 김옥빈씨 대신 전문 스턴트맨이 연기했다. 마지막에 편집할 때 배우의 숨소리를 입힌 건데, 많은 분들이 김옥빈씨가 직접 카메라를 메고 찍은 줄 아시더라.”


-영화 ‘악녀’ 액션 신 촬영을 위해 특별히 신경 쓴 게 있다면 

출처: 배급사 NEW 제공
20kg이 넘는 카메라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 손수 카메라를 개조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정병길 감독은 ‘규격화되지 않은 액션 영화’를 찍고 싶어 했다. 촬영은 4개월에 걸쳐 이뤄졌는데 총 70회차 촬영 중 50회차가 액션 신이었다. 다른 영화는 기본적으로 100회차 정도 촬영이 진행되는 걸 감안하면 이 영화는 촬영 횟수가 적었다. 그러면서도 액션 비중은 높았다. 앞서 설명한 1인칭 시점 촬영을 하거나 배우 가까이에서 속도감 있는 촬영을 하기 위해 카메라를 개조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제작에서 사용하는 카메라는 모니터나 배터리 등 보조장치까지 모두 합치면 무게가 20kg나 나간다. 큰 카메라는 고해상도를 유지하고 좋은 색감을 잡아낸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무래도 다양한 앵글, 기동성 등을 구현하기는 어렵다. 이번 영화에서는 배우 가까이에서 속도감 있는 액션 신을 잡아내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손’으로 들 수 있도록 개조를 한 것이다. 이른바 ‘핸드헬드’ 방식이라고 한다. 특화된 카메라 연결 고리를 이용해서 손으로 쉽게 잡을 수 있도록 직접 제작했다.”


-직접 와이어에 매달려 촬영을 했다고 하던데 

출처: 배급사 NEW 제공
박정훈 감독은 직접 와이어에 매달려 촬영을 진행했다.

“그렇다. 촬영감독이 직접 와이어에 매달려 카메라 촬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번 영화가 끝나고 ‘고생 많았다’는 이야기를 더 들은 것 같다. 정병길 감독은 기존에 없었던 ‘날 것’ 같은 액션 이미지를 구현하길 열망했다. 더 빠른 움직임을 담아 속도감 있는 영상을 만들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영화 시작하는 단계부터 와이어 촬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프리프로덕션(영화 제작 준비 단계) 때부터 개인적으로 액션스쿨에 가서 훈련했다. 4개월가량 매주 2-3번은 액션스쿨을 찾아 두 시간 이상 연습했다. 김옥빈씨도 같은 훈련장에서 연습을 했다. 거기서 바로 리허설도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실제 촬영을 할 때 무술팀에서 제 안전 문제를 가장 많이 신경 써줬다. 2억원이 넘는 고가의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배우나 스턴트맨들보다 2-3배 많은 안전장비를 장착해줬다.”


-액션 영화는 ‘합’을 짜는 게 중요하다고 하던데 촬영이 어렵지는 않았나

“전반적인 액션 흐름을 모르면 배우 가까이에서 액션 신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다. 저 배우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 것이고 그 이후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에 관해서 훤히 꿰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영화 제작 단계 때 ‘3D 비주얼 콘티’를 만들었다. 영화 한 컷 한 컷에 대해 철저히 계산하기 위해서다.


무술 스턴트맨들은 마치 아이돌이 안무를 외우듯 액션 합을 금방 따라 하고 외워버린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더라. 또 미리 계산 해둔 대로만 액션 신이 흘러가지도 않는다. 사람이 하다 보니까 정작 실제 촬영 때에는 액션 합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출처: 박정훈 감독 제공
영화 '악녀' 박정훈 촬영감독(왼쪽)과 권귀덕 무술감독(오른쪽).

그래서 무술감독에게 의지했던 부분이 많았다. 액션 합이 바뀌어서 제가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할 때에는 무술감독인 권귀덕 감독이 제 등 뒤에서 ‘왼쪽!’ ‘칼!’이라고 외쳐주면서 카메라 움직임을 컨트롤해줬다. 권 감독과는 이번 작품에서 처음 만났지만 평소에 대화를 많이 했다. 그렇게 친분을 쌓다보니 실제 촬영이 수월해졌다.”


◇비디오 가게 아들이 촬영감독이 되기까지


박 감독은 충남 태안에서 나고 자랐다. 부모님이 고향에서 조그맣게 비디오 대여점을 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어렴풋이 영화 쪽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영화학과 진학은 하늘에 별 따기였다. 합격 커트라인 점수가 높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2학년 때까지는 입시 미술을 준비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가슴속에 묻지 못하고 결국 졸업도 하기 전에 서울로 올라갔다. 대학 진학은 포기했다.


-원래부터 촬영감독이 꿈이었나

“그런 건 아니었다.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셈인데 ‘재수를 할까’ 고민하다가 지인 소개로 바로 단편 영화 제작 현장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 영화에서 만난 촬영팀 선배 소개로 2002년에 개봉한 영화 ‘취화선’의 정일성 촬영감독 팀 막내 스텝으로 들어갔다.


그땐 연출, 조명, 촬영 등의 개념 자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뭘 딱히 하고 싶단 생각을 하기 전이었는데, 제 눈에 유독 촬영감독을 비롯한 촬영팀 전체가 멋져 보였다. 현장에서 보면 연출팀만 해도 미술담당 연출부·인물담당 연출부 등으로 나뉘고, 조명 스텝도 서로 흩어져서 일을 한다. 하지만 유독 촬영팀은 카메라 한 대에 6-7명 스텝이 달라붙어서 일을 한다. 카메라를 두고도 렌즈, 트라이포트 등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 카메라 주변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어서 촬영감독을 꿈꾸기 시작했다.”


-어떤 영화 현장들을 거쳤나

“임권택 감독님의 ‘취화선’ 작품 이후 영화 ‘청풍명월’ ‘하류인생’ 제작 현장에서 촬영 스텝으로 일했다. ‘하류인생’ 촬영 마치고 3일 후에 바로 입대를 했다. 말년 휴가 나와서는 ‘천년학’ 크랭크인(촬영 개시)을 했다. 이후에 장율 감독과 전수일 감독의 저예산 예술영화 스텝으로 참여했고, 2009년에 김희정 감독의 ‘청포도 사탕’으로 첫 장편영화 데뷔를 했다. ‘노리개’ ‘통통한 혁명’ 같은 제작비 1억 미만의 영화도 촬영했고 2015년에는 배우 박소담과 김태훈이 출연한 ‘설행’이라는 작품을 맡았다.”


-필모그래피를 들어보니 액션 작품을 많이 찍진 않은 것 같은데

영화 '하류인생' 스틸컷(왼쪽)과 '설행' 포스터

“저는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다. 당연히 빠른 템포의 액션을 많이 해본 촬영감독이 아니다. 감각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영화 ‘악녀’를 찍는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느린 호흡의 드라마 장르를 찍는 걸 선호한다. 유럽 영화들처럼 작가주의 성향이 강한 영화를 맡게 된다면 더 잘 찍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영화 한 컷 한 컷에 낭비가 없고, 컷마다 의미를 담고 있는 영화 말이다. 그래서 오는 9월에 크랭크인 하는 작품은 드라마 장르로 선택했다.”


◇촬영감독, 주목받는 포지션은 아냐


박 감독은 ‘촬영감독’이란 직업에 대해 설명하면서 ‘서포터’라는 말을 줄곧 사용했다. 전체 영화를 리드하는 감독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으면서, 감독이 그리는 이미지를 제대로 시각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언자’란 뜻이다.


-영화계에는 유독 ‘감독’이란 직함이 많은데 업무적으로 각각의 관계가 어떻게 나누어져 있나

“전체 영화 감독이 있고, 촬영감독, 조명감독 등이 있다. 전체 영화와 관련한 최종 선택은 모두 감독이 한다. 그래서 저는 회의를 하거나 시나리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감독의 말을 충분히 듣고 의견을 말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전체 책임을 맡고 있는 감독이 그 시나리오에 대해 훨씬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촬영감독은 감독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를 시각화해주는 서포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감독이 시키는 대로만 일하는 ‘아바타’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촬영감독=서포터’라는 말은 ‘촬영감독=영화 제작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각적 조언자’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영화 현장을 하나의 사회로 본다면 가족 단위로 대입해 봤을 때 전체 감독이 ‘아버지’ 촬영감독은 ‘어머니’ 역할이다. 어머니라는 역할이 전체 안살림을 총괄하듯, 촬영감독이 제작 현장을 총괄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가장 오랫동안 시간이 걸리는 일이 카메라와 조명 세팅이다. 촬영감독은 화면에 보이는 비주얼과 관련한 총책임자이다.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의 우위를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시각화 부분에서 ‘조명’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 때문에 촬영감독이 일일이 체킹 한다. 그래서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촬영감독이 구체적으로 하는 일은 뭔가

“영화 제작 과정은 ‘프리프로덕션(영화 제작 준비 단계)’과 ‘프로덕션(실제 영화 제작 단계)’으로 나뉜다. 프리프로덕션은 시나리오 작업, 캐스팅부터 시작해서 배우 리딩, 공간 헌팅 등이 포함된다. 보통 프리프로덕션 기간은 4개월 정도를 잡는다.


촬영감독은 먼저 시나리오 파악을 통해서 촬영 콘셉트를 잡는다. 저 같은 경우에는 일단 관객 입장에서 한두 차례 시나리오를 검토한 뒤 낮과 밤 그리고 각각의 공간에 따라 시나리오 분석에 들어간다. 촬영감독이 시나리오 분석 후 해당 공간들에 대해 어떤 콘셉트를 잡느냐에 따라 공간 헌팅이 달라지게 된다. 기본적으로 연출부에서 데스크 헌팅(인터넷 검색 단계)을 거치고 후보군을 보고하면 헤드 스텝들이 직접 찾아가서 확인한 뒤 섭외 여부를 결정한다. 이때 촬영감독이 함께 관여하는 것이다.


프로덕션 때에 촬영감독은 흔히들 생각하는 영화 촬영을 맡는다. 영화 촬영은 평균적으로 4-5개월 걸린다. 이 기간이 끝나고 편집을 마치면 촬영감독은 또 다른 업무를 해야 한다. 후반 화면 색상 작업이다. 촬영감독이 카메라 앵글 구도나 콘셉트를 짰기 때문에 채도 조정을 비롯한 화면 색보정은 모두 촬영감독이 맡는다.”


-촬영감독이 되는 과정이 따로 있나

출처: 박정훈 감독 제공
박정훈 감독과 촬영팀 스텝들

“예전에는 무조건 충무로 영화계 도제 시스템을 거쳐야 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 제작을 할 때 촬영팀 단위로 컨택을 했다. 촬영팀에는 대략 6-7명의 스텝이 활동하는데 ‘포스(막내)-서드-세컨드-퍼스트-B캠-촬영감독’ 순으로 직제가 나누어져 있다.


포스(Forth)라고 불리는 막내는 전체 카메라 장비를 체크하고 배터리를 충전하는 등 가장 기본적인 일들을 담당한다. 서드(Third)는 트라이포트를 맡는데 카메라가 놓일 자리에 미리 트라이포트를 챙겨 놓는 일을 한다. 굉장히 단순한 일 같지만 어디에 카메라를 놓아야 가장 앵글이 좋을지를 고민하면서 해야 하는 업무다. 세컨드(Second)는 렌즈 담당, 퍼스트(First)는 포커스를 맞추는 일을 한다. 촬영은 A팀, B팀으로 나누어서 작업을 하는데 ‘B캠’이란 촬영 B팀의 카메라 감독을 말하는 거다. 개인 능력에 따라 각 단계를 밟고 올라가는 시간이 다 다르다.


요즘에는 학과 졸업 작품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바로 촬영감독 기회를 얻거나 유학을 다녀오면서 경력을 쌓아오는 경우도 늘었다. 하지만 여전히 도제 시스템은 유효하다. 촬영팀에서 경험을 쌓은 후에 개인 단편 영화를 찍든 장편 데뷔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16년 전에 제가 촬영팀 막내로 일하던 시절에는 1년 6개월 촬영하면서 120만원을 벌었다. 촬영감독이 된 지금은 그래도 먹고 살 만한 수준은 됐지만, 여전히 촬영 인력 전반에 대한 노동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촬영감독은 스포트라이트 받는 포지션은 아닌 것 같은데

출처: 배급사 NEW 제공
제70회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영화 '악녀'.

“맞는 말씀이다. 영화가 잘 됐을 때 오히려 촬영감독은 초라해질 수도 있다. 영화가 해외 유명 영화제에 초청을 받아도 촬영감독은 별로 언급 되질 않는다. 결국 영화라는 매체도 상업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감독과 배우가 돋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촬영감독이 되고자 하는 분들이 이 점을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다.


더불어 촬영감독은 그 상대가 감독이든 배우이든 지속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내 것을 취하면서 상대방도 만족하는 작업이 가장 좋은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의 OK’가 ‘제일 좋은 OK’라는 말이다. 나와 상대를 모두 살리는 희생과 포기 정신이 공동작업에서 갖춰야 할 창작자의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 jobsN 박가영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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