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게 성공" 편견과 싸우는 이 걸그룹의 정체

조회수 2020. 9. 18. 11: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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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sN Heritage ④] '국악으로 밥벌어 먹고 살겠다'는 걸그룹
2015년부터 해외 버스킹 공연
근엄한 국악계 분위기 깨고 나온 걸그룹
"성공할 때까지 버티겠다"

국밥. 걸그룹 이름 치곤 다소 촌스럽다. 뜻을 알고 나면 이해가 간다. ‘국악으로 밥 벌어먹기’의 준말이다.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동창생 3명이 모여 만든 ‘국악 걸그룹’이다. 춤을 추는 이이령, 비파를 연주하는 한수진, 가야금을 뜯는 이현정씨는 91년생 동갑내기다. 2014년 말 모였다.


이 신인 걸그룹은 2015년 스페인·포르투갈 14개 도시를 돌며 ‘버스킹 공연’을 했다. 2016년에는 미 대륙을 횡단하며 공연했다. 국악 버스킹은 국악계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품격있게 공연해야 한다는 편견을 산산이 부쉈다. 

출처: 국밥 제공
(왼쪽부터) 무용수 이이령, 비파 연주자 한수진, 가야금 연주자 이현정.

일부 스타 국악인을 빼고 대부분 국악 전공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세 사람은 ‘국악으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국밥’을 만들었다. 작곡·편곡·안무·홍보·마케팅·영상·의상 제작까지 스스로 하는 ‘자체 제작 걸그룹’이다. 2016년 ‘됴타’라는 싱글을 냈다. 가수 장범준의 '벚꽃엔딩'을 편곡해 연주한 영상은 유튜브, 판도라TV를 합해 조회수 220만건을 넘었다.


국밥 공연으로 세 사람이 버는 수입은 다 합쳐도 한해 2000만원 남짓. 한겨울 1~2월과 한여름 7~8월에는 공연이 없어 돈을 벌지 못한다. ‘국악으로 밥 벌어먹겠다’는 포부치고 큰 수입은 아니다. 생계를 위해 각자 시간제 교사나 강사로 일한다. 하지만 반드시 ‘국악으로 밥 벌어먹고 살겠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출처: 국밥 제공
2016년 미국 오클랜드 First Friday 페스티벌에서.

’신선하다’ vs ‘국악계 욕보인다’

버스킹 공연 시간은 20~30분. ‘벚꽃엔딩’ 같은 케이팝으로 관심을 끈다. 사람들이 모이면 ‘뱃노래’ 같은 전통국악으로 넘어간다. 활동하기 좋은 캐주얼복이나 생활한복을 주로 입는다. 선글라스도 낀다. 관객들은 흥겨운 가야금과 비파 소리에 맞춰 무용수와 함께 춤을 춘다.


“처음에는 시멘트 바닥에서 공연한다는 게 어색했습니다. 공연장에서는 화려한 의상과 분장, 조명 때문에 단점이 가려집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벌거벗은 느낌’이었죠. 관객들과 거리가 1m도 안될 때가 많으니까요. 지금은 버스킹이 편해요. 관객과 눈을 맞추며 반응을 바로 볼 수 있어요.” 

국악은 비인기 장르다. 댄스나 발라드가 음원 인기 순위를 독식한다. “케이팝은 하루 만에 순위가 바뀝니다. 하지만 국악은 신곡을 내면 6개월 동안 순위가 달라지지 않아요. 신곡을 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없어요.”


국밥을 가리켜 ‘국악을 욕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무대가 아닌 길거리에서 국악 공연을 하기 때문이다. 또 국밥의 악기 구성은 특이하다. 보통 국악 합주는 피리 같은 관악기나 장구 같은 타악기가 있다. 반면 국밥은 현악기(가야금·비파)와 무용수 뿐이다. 자연스럽게 붙은 별명이 ‘국악계 이단아’다. “‘국악 대중화’를 위한 과도기라 생각합니다. 관객이 찾아주기만을 바라지 않고 저희가 다가가야 할 때입니다.” 

출처: 국밥 제공
(왼쪽부터) 이이령씨, 한수진씨, 이현정씨.

해외 버스킹으로 '국악 대중화' 가능성 봐

고등학생 땐 평생 국악으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을 녹록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이 ‘여기 있는 30명 중에서 단 3명만 국악으로 밥 먹고살아도 성공한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린 끝까지 음악 할 건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 보니 녹록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전공을 살려 직업을 갖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이령씨는 이화여대 무용과를, 이현정씨는 추계예술대 국악과를, 한수진씨는 서울예대 한국음악과에 진학했다. 2014년 졸업을 앞두고 막막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없는 현실에 눈앞이 캄캄했다.


세 사람은 한때 현실에 굴복해 다른 일을 하기도 했다. 이이령씨는 무용수이지만 무용단에서 행정직으로 일했다. 가야금 연주자 이현정씨는 공기업에서 사무직으로, 비파 연주자 한수진씨도 입시학원에서 일한 적이 있다.

출처: 국밥 제공

“2014년 여름에 서로에게 '밥 벌어먹고 있냐'고 물었어요. 밥은 먹고 사는데 행복하질 않았어요. 다른 일을 할수록 ‘국악’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서 스트레스받느니 우리가 ‘국악으로 밥 벌어먹을 수 있는 판을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대중이 국악을 왜 듣지 않을까'를 고민했다. 국악을 들을 기회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공연장이 아닌 '길거리 공연'을 하기로 했다. “국악은 다른 장르와 달리 공연장에서만 들을 수 있어요. 자주, 쉽게 국악을 들려주기 위해 버스킹을 선택했습니다.”


2014년 말 한강, 덕수궁 돌담길, 남산, 운현궁 같은 명소에서 버스킹을 시작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버스킹만 해서는 성과를 얻기 힘들었다. ‘국밥’이라는 이름을 알릴 만한 프로젝트하기로 했다. 궁리 끝에 ‘해외 버스킹 공연’을 떠올렸다. 

출처: 국밥 제공

“두 달 동안 해외 버스킹 투어를 하기로 했어요. 어려운 프로젝트를 성공시킨다면 저희의 진정성을 알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취지는 좋았지만 경비가 없었다. 기업이나 단체와 함께하면 홍보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00개가 넘는 기업에 기획서를 넣은 끝에 ‘풀무원’에서 연락을 받았다. 변웅준 풀무원 홍보팀 담당자는 "회의에서 '청년들이 자신의 진로를 개척하는 모습이 좋다'는 평이 나왔다"고 했다. "풀무원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풀무원에서 경비 절반과 먹거리를 지원하기로 했다. 2015년 1월 1일 바르셀로나를 시작으로 2개월 동안 해외 버스킹을 했다. 국밥 멤버들은 이때 국악 대중화의 가능성을 봤다.


“저희 공연을 보다 갑자기 들어와서 같이 춤을 춘 관객들이 많았어요. 스페인 세비아에서 한 분은 공연을 잘 봤다면서 저희한테 커피를 한 잔씩 사준 적도 있습니다. 한 사진작가는 바닥에 누우면서까지 저희를 열정적으로 찍어주고 공짜로 사진을 보내줬어요. 여행하며 만난 한국 분들은 '국악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국악’이 지루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얻을 수 있는 장르임을 깨달았습니다.” 

출처: 국밥 제공

'순대 국밥'말고 우리가 첫 번째로 나오길 

예술을 전공하기 때문에 '금수저'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부모님에게 한 푼도 지원받지 않고 있어요.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이만큼 공부시켜주셨으니까 꼭 보답하겠습니다."


국밥의 노력은 차츰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2015년 스페인·포르투갈 해외 버스킹을 성공적으로 끝내 2016년에도 미 대륙 버스킹을 할 수 있었다. 해외 버스킹 이후 공연 섭외가 늘었다. 해외 버스킹 모습을 담은 영화로 2016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다. 지난 4월에는 한국·베트남 수교 25주년 기념식에 초청 공연을 다녀왔다. 내년 1월 3번째 해외 버스킹에 나설 예정이다.


국밥 공연으로 번 수익은 ‘공금’으로 저축한다. 이 돈은 다음 해외 버스킹 경비다. 국밥의 최종 목표는 포털 사이트에 국밥을 검색했을 때 ‘순대 국밥’이 아닌 이들이 나오는 것이다.


“누군가 말하더라구요. '버티는 게 성공하는 거다.' 저희는 끝까지 버틸 겁니다. 국악 전공자들이 배고프지 않을 날을 만들고 싶습니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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