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와 대중음악 경계 넘나드는 그녀의 직업은?

조회수 2020. 9. 17. 16: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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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가수 이예랑씨

jobsN은 전통 문화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직업인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잊혀져 가는 한국 고유 문화의 불씨를 되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중에는 국가에서 인정한 무형문화재 보유자와 이수자도 있습니다. 세번째 편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 및 산조 이수자 이예랑씨입니다. 


국내 최초 가야금 가수, 최연소 대통령상, 가야금 대중화 선도자,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석사 수석 졸업….


우리나라 전통 현악기인 가야금에 평생을 바치고 있는 이예랑(37)씨에게는 이런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다. 전통문화 종사자에게는 흔치 않은 팬클럽까지 거느리고 있다. 서울대 인류학과 대학원을 나온 쌍둥이 동생 이사랑씨와 함께 결성한 가야금 듀오인 ‘가야랑’ 팬클럽의 회원수가 1300여명에 달한다.  

출처: jobsN
쌍둥이 가야금 듀오 '가야랑' 멤버 이예랑씨

가야랑은 2008년 국악과 트로트를 접목시킨 퓨전음악으로 가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가야금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해 아이돌에게 가야금을 가르쳐 이슈가 되기도 했다. 가야랑은 정규앨범을 2집까지 냈으며, 이씨의 개인 연주 앨범도 한 차례 나왔었다. 요즘엔 KBS ‘가요 무대’에도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 “가수가 우리나라 악기 하나는 연주할 줄 알아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이씨의 말에 충격을 받은 가수 마야는 2년간 그녀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마야는 현재는 ‘국악 가수’로 거듭나고 있다. 한창 즐겼던 오토바이 운전대 대신 전통악기를 만지는 것이다. 


전통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이씨는 가야금의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 10년간 활동한 가야랑이 국악인의 개런티 수준을 제법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가야랑은 회당 공연료를 수백만원 받는다. 소속 기획사나 홍보해주는 사람 하나없는데도 순전히 관객의 사랑만으로 여기까지 왔다. “돈으로 예술인을 평가할 수 없다”는 이씨는 먼저 개런티를 흥정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정말 자신을 절실하게 원하는 무대라면 낮은 개런티도 개의치 않고 달려간다고 한다.   

출처: 이예랑씨 인스타그램
이예랑과 이사랑 자매

세금과 경비 등을 제외하고 가야랑이 올리는 순수입은 월 1000만~3000만원. 이를 자매끼리 나눈다. 사실 대학생 시절 레슨으로만 의사 수준의 수입을 올렸기 때문에 수입에 큰 차이는 없다. 그때와 비교하면 “훨씬 몸이 고되지만 행복하다”고 이씨는 말했다. 전통 음악계에 눌러 앉아 있었다면 최연소 교수직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그녀가 굳이 어려운 길을 택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가야금 집안에서 태어난 천재  

전주 출신인 이씨의 어머니는 가야금 연주자인 옥계 변영숙 선생이다. 전국 각지에 제자를 둔 변 선생은 가야금계의 대모 중 한 명이다. 이씨는 또한 우리나라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였던 황병기 선생의 마지막 제자이며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보유자 강정숙 선생에게 사사 받았다. 친척 중에도 국악인이 많다. 


자연스레 동생과 함께 어릴적부터 가야금을 접한 이씨는 국악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천재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물려받은 피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가야금은 연습량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정서가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악보를 한 장 넘길 때 저는 8장 정도 넘겼어요. 그러나 항상 교만하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명심했습니다.” 전쟁 나면 다른 재산을 모두 제치고 챙길 물건 1호로 가야금을 꼽을 정도로 그녀는 천상 국악인이었다.

  

가야금은 크게 정악, 산조, 현대창작 세 가지 분야로 나뉜다. 전공자는 이를 다 배우지만 각자 특화하는 분야가 있다. 이씨가 특히 두각을 드러낸 분야는 독주로 연주하는 산조였다. 가락의 짜임이나 연주기법에 따라 특정 명인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유파가 있다. 사람 이름을 앞에 붙여 ‘OOO 류(流)’로 부른다. “보통 한 가지 류를 전공합니다. 많이 하면 2~3개까지 합니다. 저는 7개까지는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워낙 욕심이 많았어요.”  

출처: 이씨 인스타그램
가야금을 연주하는 이예랑씨

이씨가 유명세를 떨치게 된 분야인 산조는 “할머니들이 타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지구력은 약하지만 집중력은 남달랐다고 했다. 국악고에 다닐 때는 두 눈이 가야금 나무 틈 사이에 빠져드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가야금은 똑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그때 그때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씨는 “유명 셰프들은 MSG 사용을 최소화하고도 풍미를 내지 않느냐”며 “저도 오동나무와 연주실을 통해 뿜어내는 가야금 본연의 향미에 집중하는 편”이라고 했다.  


이씨는 한 번 몰입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이 때문에 한예종에 입학한 뒤 의도치 않게 레슨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학부 2학년때 자신이 가르친 첫 제자가 서울대 실기 장학생으로 합격하면서 가야금계가 발칵 뒤집혔다. “고3을 가르치면 저도 고3이 돼야합니다. 대충하는 성격이 못 돼서 될 때까지 가르쳤어요. 평소에는 학교 생활하고, 주말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아이들과 함께 숙식하면서 레슨을 했습니다.” 

수세기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 연주

물론 모든 제자들이 입시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제자 중 한 명이 1차 실기시험 합격 후 2차 면접 및 시창시험에서 떨어진뒤 그 학부모가 “잘못 가르쳐서 떨어진 것 아니냐. 선생을 바꾸겠다”고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국악계는 “스승을 바꾸는 것은 부모님을 바꾸는 것과 같다”는 말이 나오는 곳이다. 상처를 받은 이씨는 스스로를 돌이켜봤다. “남의 인생만 돌보다 정작 내 인생은 돌보지 못한 것 아닌가 싶었어요. 나에게 집중을 한 번 해보자고 결심했죠.” 


그래서 준비한 대회가 2005년 국내 최고 권위의 가야금 콩쿠르인 김해전국가야금대회였다. 초등, 중등, 고등, 대학, 일반부로 나뉜 대회에서 한예종 대학원 1학년이었던 이씨는 일반부로 출전했다. 일반부는 이씨처럼 갓 대학원생부터 중장년층의 대학 교수, 강사급 베테랑까지 총출동하는 부문이다. 입상은커녕 예선통과도 낙관하기 어려웠다. 어머니조차 “괜한 고생 하지 마라”며 출전을 만류할 정도였다. 

출처: 이예랑씨 인스타그램
가야금과 함께 찍은 사진

그러나 이씨는 수백명이 출전한 예선을 뚫고 수십명이 겨루는 본선에 진출, 최종 1위를 했다. 25살이던 그녀는 대회 역사상 최연소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서울대 이재숙 교수는 “수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연주였다. 심사를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고 극찬했다. 항상 구박만 하던 어머니도 처음으로 “어떻게 그런 연주를 할 수 있느냐”고 했다. 그때 이후 이씨에게 ‘젊은 명인’이란 타이틀도 붙었다.  


이씨는 “일찍 큰 상을 받은 건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가야금의 대중화에 힘써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대중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까진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동생과 함께 MBC ‘얼쑤 우리가락’ 진행을 맡았을 당시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빠이빠이야’ 등 히트곡을 만든 작곡가 정의송씨로부터 가수 데뷔 제의를 받았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정씨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동생에게 이씨는 “‘딴따라’는 우리가 할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2년 정도 흘렀을까. 동생과 함께 치킨을 먹던 이씨는 월드컵 응원송 ‘빠라빠빠’를 들으며 “저런 노래로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데 가야금으론 왜 안 될까”라고 했다. “언니 그때 그 작곡가가 만든 곡이야! 얼른 전화해봐” 동생이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작곡가 정의송씨가 '연락이 올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우릴 위해 만들었다며 다섯곡을 주고 한달 동안 고민해보라고 했어요.” 

출처: 본인 인스타그램
이예랑씨는 인스타그램으로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한다. 여기에 '셀카'도 많이 올린다

국악계에는 대중성을 높이면 자신만의 예술 세계가 깨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런 분위기 때문에 국악은 일부 매니아층만 듣는 음악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다른 음악과 교류가 적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씨 주변엔 대중음악을 하라고 응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악순환을 깨야 한다고 주변에서 많이 말씀하셨어요. 황병기 선생님은 ‘네가 하면 마이클 잭슨보다 잘할 수 있다’며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고심 끝에 데뷔를 결정했다. 동생과 함께 활동하는 가야금 가수 듀오, 가야랑은 그렇게 탄생했다.  

“국악인이 웬 대중음악?” 편견과 싸웠던 그녀

대중음악 세계는 만만치 않았다. 한 기획사와 계약을 했는데 알고 보니 ‘노예 계약’이었던 적도 있다. 소속사 대표가 횡령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펑펑 울었다. “웬만한 기획사 대표보다 제가 더 법을 잘 알아요. 이 세계는 만만하게 생각하면 큰코를 다치는 곳이었습니다.” 


‘국악 전공자가 대중음악계로 튀었다’ ‘탈선했다’ ‘돌연변이’ 등 별의별 말이 다 나왔다. 후학 양성에나 힘쓰라는 선배도 있었다. 오로지 관객을 보고 달려온 지 햇수로 10년. 그녀는 자신이 걸어 온 길은 “탈선이 아니라 경로 확장이었다”고 생각한다.   

“가야금이라는 악기 하나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게 대단하지 않나요? 항상 우리를 섭외한 무대에서 왜 불렀는지 공부를 하고 갑니다.” 예를 들어 새만금 조성사업 축하공연에선 사업의 역사를 줄줄이 꿰고 갔다.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는데 수천년 역사의 가야금을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자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당시 사업을 발표한 새만금개발청의 한 임원이 “나보다 브리핑을 잘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농담할 정도였다. 이 임원은 나중에 가야랑 팬클럽 회장이 됐다.  


“관객 반응이 중요한 행사에선 우리가 1순위입니다. 해변 축제를 가면 해변 관련 노래, 베트남 정부 행사를 가면 베트남 국가를 외워서 갑니다.” 영어 동시통역이 가능한 동생 덕분에 외국인에게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행사엔 가야랑이 단골로 등장한다. 시장부터 예술의 전당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아이돌이 몰려 나오는 무대에 선 적도 있다. 요즘 들어선 인문학과 예술을 결합한 ‘렉처 콘서트’를 자주 한다.

출처: 이예랑씨 인스타그램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왼쪽부터 가수 임창정, 개그맨 이경규, 셰프 이연복과 함께한 모습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 위한 열정은 몸이 부서져라 뛰어다니는 원동력이었다. 어깨에 담이 오거나 대상포진이 발병한 적도 있었다. 가장 바쁜 성수기엔 사흘 동안 5000㎞를 이동한 적도 있다. 아침 비행기로 제주도를 찍고 점심엔 서울로 돌아와 공연하고, 저녁에 창원을 갔다가 부산을 넘어가는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쓰러질 것 같이 피곤하다가도 무대에만 오르면 고통과 피곤함이 싹 사라진다고 했다. “방송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나온 반응을 실제로 객석에서 봅니다. 가야금으로 이런 반응을 이끌어낸다는 건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보면 아프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어요.”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  

올해는 이씨에게 무척 의미있는 해이다. 새 정규앨범을 발매할 계획인데다 ‘백년 가약’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양대 박사과정도 논문 제출만을 남겨놓고 있다. 매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가야금 독주회도 준비 중이다. 최근 출산한 동생 덕분에 의도치 않게 활동량이 줄어들며 ‘자유 시간’이 생겼던 그녀는 평생의 인연을 만났다. “일도 가정도 이제 새로운 시작인 것 같아요.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가정을 잘 꾸리고 싶습니다.”  

출처: 본인 인스타그램·본인 제공
'5월의 신부'가 되는 이예랑씨

“예전엔 또래보다 서너발 앞서 가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항상 처음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가야금 덕분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며 “행복한 것이 성공이라면, 나는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했다. 


“한 변호사는 저를 만나고 제 연주 덕분에 살 수 있었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생님만큼 연주할 수 있으면 돈 한푼 없어도 행복하겠다’는 제자도 있어요. 이 정도면 성공한 것 아닌가요?”  


이씨는 가까운 미래에 ‘K-ART(한국의 문화예술)’ 열풍이 불 것이라고 했다. 

출처: 이예랑씨 인스타그램
무대에 선 가야랑

“분명 국악의 인기가 높아지는 시대가 올 거예요. 비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국악계에서도 김연아나 박세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아이돌과 같이 무대에 설 때면 10대 친구들이 깜짝 놀라요. ‘기회가 되면 배워보고 싶다’고 응원해줍니다. 가야금을 드높이는 게 저를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야금 대중화의 밀알이 되겠습니다.”  


글 jobsN 오유교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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