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화상 이겨냈지만.. 끝내 숨진 연극인 '삶에 감사'

조회수 2018. 11. 5. 09:3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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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 돕는 사회적 기업 '아이디 서포터즈'

불의의 사고로 온몸에 전신 3도 화상을 입고 서른번 넘는 수술을 받았던 이동근씨가 21일 사망했다. 사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인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도 '연극 연출가'의 꿈을 접지 않았다. 사고 후 사비를 털어 연극인을 돕는 사회적 기업 '아이디 서포터즈'를 차려 연극 '주먹 쥐고 치삼'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런 그는 지난 1월 잡스엔과의 인터뷰에서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다. 그를 추모하며 생전 인터뷰 전문을 공개한다. 

28살에 입은 전신 화상
생명보험금으로 연극인 돕는 회사 설립
공연기획자로 제 2의 인생 꿈꾸다

2015년 1월 16일 서울 논현동의 한 상가 빌딩. 4명이 일하던 방 한 칸짜리 사무실에서 '펑'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불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덮쳤다. 지인을 만나러 잠깐 들린 이동근(30)씨도 이 중 한 명이었다.  

  

그 길로 이씨는 병원에 실려갔다. 전신 3도 화상. 8개월 동안 28번 수술을 받으며 죽을 고비를 4차례나 넘겼다. 사고가 남긴 건 화상으로 달라진 얼굴과 생명보험금 6억원. 그는 이 돈으로 연극인을 돕는 사회적 기업을 차렸다. 이름은 '아이디(ID·Impossible Dream) 서포터즈'. 뮤지컬 ‘맨오브라만차’ 주제곡 'Impossible Dream'에서 따왔다. 신진 연극인의 '이룰 수 없는 꿈'을 도와주겠다는 의미다. 

  

아이디 서포터즈는 극단에 막 들어온 연극인을 지원한다. 배우, 작가, 홍보팀을 포함해 직원 9명. 공연으로 발생한 수익은 인건비를 제외하고 다음 공연 준비를 위해 쓴다. 2015년 10월부터 공연 10편을 기획했다. 이 가운데 ‘불후의 명작-대한민국 희곡 작가전’은 20대부터 70대까지 대표 작가의 희곡을 낭독극으로 올려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화상사고 후 '제2의 인생'에 도전하고 있는 이씨를 만났다.

출처: jobsN
이동근 PD, 화상 사고로 기도가 다쳐 말할 땐 성대를 막기 위해 호스 구멍을 막는다.

연극과 사랑에 빠진 경남 남해 소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 학교 공연 때 처음 연극 무대에 섰다. 떨림이 좋았다. 그 해 겨울부터 고등학교까지, 방학이면 왕복 10시간 버스를 타고 서울에 연극을 배우러 갔다.  


-중학생이 서울까지 올라와 안 힘들었나요 

"그저 좋았어요. 연극 배우려고 고1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350만원을 제 힘으로 벌었죠. 방학 때 강남구립청소년극단 근처 하숙집에 살며 연극을 올렸어요. 서울 사는 애들 틈에 지방에서 직접 돈 벌어 온 학생이 있으니 많이 예뻐해 줬습니다." 


- 대학은요? 연극을 전공했나요

"청주대학교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었어요. 극단에서 친해진 형들 얘기를 들으면 역사도 오래되고 연극을 학문처럼 탐구하는 곳으로 멋있어 보였죠. 고3 때 원서를 넣었는데 떨어졌어요. 오만했던 거죠. 노력을 별로 안 했어요. 다른 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붙었는데 돈이 없어서 못 갔습니다." 


-스무 살 때 바로 일터로 뛰어들었습니까

"네.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은 못 가니까, 남해 김밥천국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밤 9시부터 아침 9시까지 12시간 일했어요. 월급이 150만원이었죠. 2년 반 동안 지각 한번 안 했습니다." 

출처: 이동근씨 페이스북
화상 사고 입기 전 이동근씨. 일 잘 하는 청년으로 인정받았다고 했다.

돈 버는 게 유일한 목표였던 삶

주인 할머니가 신촌에 있는 큰 김밥천국을 함께 꾸리자고 제안했다. 김밥천국 장사꾼으로 성공하고 싶었다. '고졸'과 무일푼으로 맞닥뜨린 현실엔 선택지가 없었던 탓이다. 연극에 대한 꿈은 잠시 접고 우선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도 마음대로 안됐다. 21살,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사지마비가 왔다. 그가 돌봐야 했다. "차라리 군대로 도망가고 싶었어요. '소년 가장'을 이유로 입대도 면제받았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무조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벼룩시장에서 한 달에 400만원 벌게 해준다는 일자리 광고를 봤어요. 한 캐피탈 회사에서 대출 권유하는 업무를 하게 됐죠. 사람들의 빚이 많아져야 돈을 버는 일이었어요. 첫 달에 7만원, 나중엔 2700만원까지 벌었어요. 25살에 아버지를 모실 생각으로 부산은행으로 이직했습니다." 


그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동근씨가 돈을 벌던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다시 물은 꿈

다시 ‘연극’이 생각났다. 27살 가을에 친구 중 한 명이 열정대학 조교로 활동하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못 간 대학에 미련이 남았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열정대학에 들어갔다.  


열정대학은 청년 진로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소셜 벤처기업이다. 대한민국 20대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일정 등록금을 내고 입학해 원하는 과목의 수업을 개설하고 한 학기(3개월) 동안 활동한다.  


-어떤 일을 했습니까

"남들과 얘기할 수 있는 소재가 연극밖에 없었는데 모르는 게 많았죠.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 '공연문화비평학과'를 개설했어요. 수업 정원수가 8명이었는데 몇 배 인원이 몰렸습니다. 1년 반 동안 200편이 넘는 연극을 보고, 연극평론가협회 회장 허순자 교수 등 10명의 연극 대가를 만났습니다. 초 단위로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열정대학 총학생회장도 맡았다. 1년 반 열정 대학 생활로 2015년 1월 대학로에서 '28페스티벌'을 열었다. 18분짜리 야외극, 20대만의 축제였다.

출처: 이동근씨 페이스북
이동근씨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OST인 'Impossible Dream'에서 글자를 따 기획사 '아이디(ID) 서포터즈'를 차렸다. 공연을 기획하고 다양한 연극 관련 활동을 벌인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두려웠던 시간

페스티벌을 성황리에 마쳤다. 두 번째 축제를 계획하던 2016년 1월 16일, 지인의 부름을 받고 찾은 사무실에서 대형 화재 사고가 났다. 


-사고 얘기해줄 수 있습니까

"사무실 안에서 터져 오른 불길이 나가는 길목에 제가 있었어요. 정신을 잃었죠. 깨어나 편의점 유리에 비친 모습을 봤는데 얼굴이 하얗게 떴어요.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가는 동안 아프진 않았어요. 3도 화상으로 신경층까지 손상돼서 그랬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병원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두 가지가 두려웠어요. 죽을 수 있다는 것과 이 모습으로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것. 처음엔 너무 억울해서 의사 선생님, 간호사한테 매일 화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게 제 선택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받아들였어요. 제 성격이기도 해요. 제 책임이고, 제가 감당할 몫이었던 거죠." 


-30번의 수술을 받으며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지 않나요? 

"주변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너무 많이 봤어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느꼈어요."   


수술 고통을 이겨내면서, 살아나면 진짜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자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도 '연극'이었다. 

출처: 이동근씨 페이스북
전신 3도 화상, 눈꺼풀이 타버려 눈을 감는 것이 어려웠다.

생명보험금으로 6억을 받았다. 화상치료 이후 남은 금액 전부를 연극을 위해 쓰리라 다짐하고 8월 13일 퇴원했다. 제2의 인생이 시작하는 날을 기념하며 핸드폰 뒷자리도 0813으로 바꿨다.  


퇴원하고 가장 먼저 대학로 게릴라 극장 뒤편에 방을 잡았다. 그날 밤 숨을 못 쉬어서 병원에 실려갔다. 퇴원하고 다시 대학로로 갔다. 중학교 때 배우를 꿈꾸며 서울로 연극을 배우러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왕복 10시간 거리를 다녔지만 힘들지 않았다.


-연극 활동을 다시 시작하도록 도와준 사람이 있습니까

"열정대학 때 인터뷰했던 오세혁 작가한테 전화가 왔어요. '연극in'이란 연극 잡지 인터뷰를 했죠. 많은 분들이 봐주셨어요. 소극장 '혜화당'을 운영하는 분이 후원을 해줘서 본격적으로 연극 기획을 시작했죠."

출처: 이동근씨 페이스북
열정대학은 소셜벤처기업이 운영하는 청년 진로프로그램으로, 등록금을 내고 원하는 수업을 개설해 배우는 기회를 제공한다.

제2의 인생 '내일의 행복엔 관심 없다’

-화상 사고 이후 무엇이 가장 달라졌습니까?

"목소리요. 제가 듣기에도 불편해요. 좋게 변한 게 있다면 삶의 태도죠. 내일의 행복엔 관심 없어요. 처음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힘들었어요. 퇴원할 때 몸무게가 43kg이었거든요. 사람들이 좋은 의도로, 혹은 아무 의도 없이 나를 바라보는데 안 좋게 보였어요. 괜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 걸고, 차 타고 가다가 욕하고, 위협적으로 행동했어요. 살이 30kg 정도 찌면서 좀 나아졌어요. 지금도 사람 만나는 게 힘들어 주로 집에 있어요. 시선엔 좀 무뎌졌습니다. 이젠 좀 편해요. 얼굴에 사연이 있다 보니 나이 많은 사람과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요. KTX도 장애인 할인받아서 1등으로 탈 수 있죠."


-수술도 아직 안 끝났는데 일하는 게 힘들진 않나요?

"힘들죠. 평소에는 집 밖에 잘 안 나가요. 사람들 만나는 건 더 힘들고요. 그래도 일은 합니다. 직원들 생계에 대한 책임감도 있죠. 해야 할 일이 있다는게 저를 지탱하는 힘이에요."


-그날 사고 안 났으면 뭐하고 있었을 거예요?

"원래는 그해 여름에 영국에서 열린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가려고 했어요. 다른 나라의 연극은 어떤지 궁금했거든요. 공연기획자로 계속 도전했을 거예요.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찾아가서 희곡을 써달라고 하거나 팀버튼을 만나서 인형극을 만들자고 졸라보기도 하고 말이죠."

출처: 이동근씨 페이스북
이동근씨의 퇴원을 축하하는 파티

-어려움을 딛고 계속 도전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제가 가장 돋보이고 관심받을 수 있는 일을 잘 선택하는 것 같아요.  또 주변에 저를 따르는 동생들이 많아요. 제 옆에 오면 다들 무장해제를 하는 것 같아요. 날카로운 사람도 부드러워지죠. 아이디 서포터즈도 알고 지낸 친구와 동생들이 많이 돕고 있어요." 


퇴원 후 5개월 동안 연극 10편을 기획했다. 2015년 10월, '아이디 서포터즈'를 세웠다. 연극 세계에 막 발을 들인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사회적 기업이다. 올 2월엔 최초로 자신의 얘기를 담은 연극 '주먹쥐고 치삼'이 개막한다.


-공연기획자로 어떤 일을 하나요?

"연극 기획, 홍보, 경영 지원까지 다 해요. '주먹쥐고 치삼' 연극 희곡 초안을 썼고요. '아이디 서포터즈'에서 신인 연극인이 낭독극에 서는 '불후의 명작' 공연도 기획했죠. 화상환자를 돕기 위한 콘서트 기획과 진행도 하고 있어요."

출처: 이동근씨 페이스북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2월에 개막하는 연극 '주먹쥐고 치삼'을 잘 마무리하는 게 지금 목표에요. 그 후에 어떤 작품을 올릴지는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보험금을 다 써버려 일단 돈을 벌어야 해요. 보험설계사가 되는 것도 생각해보고 있어요. 벌써 이름도 지었어요 '해치보상연구소'. 해치가 불을 잡는 동물이잖아요."  


-진심인가요?

 "사실 개그 욕심이 좀 있어요. 근데 농담 아니에요. 제가 좋아하고, 잘 하는 거 하면서 살아갈 겁니다. 연극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보험은 화상사고를 겪은 내가 잘 아는 거죠. 나로 인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글 jobsN 이다은 인턴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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