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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다니던 시골 흙수저 초딩→'월수입 300 이상' 사업체 대표 "취미로 돈까지 벌어요"

조회수 2018. 11. 5. 14:3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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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초등학생의 유일한 낙 종이비행기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로만 1억 "꿈을 향해 달렸던 시간"
종이비행기 세계대회 계기로 창업, 월수입 300 이상

경북 상주의 시골마을에 살던 소년에게 유일한 낙은 종이비행기 날리기. 어릴 적 이혼하고 집을 떠난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도 안났다. 아버지는 봄, 여름, 가을엔 남의 논밭을 경작하는 소작농으로 일했다. 농사일이 없는 겨울엔 목재를 날랐다. 그래도 할머니와 누나까지 4인 가족을 먹여살리기는 어려웠다. 소년은 초등학교 때부터 공장일 등을 하며 가정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그가 살던 허름한 시골집은 매매가 75만원짜리, 세 채로 이뤄진 집이었다. 두 채는 창고 등으로 썼고 거주용으로 쓰는 한 채는 실평수가 약 8평이었다.

출처: 본인 제공
이정욱씨의 프로필 사진. 명함에도 이 사진을 썼다. 오른쪽은 '종이비행기로 타겟 맞히기' 관련 기네스북 기록 인증서

이색스포츠·문화이벤트 기획사 ‘위플레이’ 이정욱(30) 대표 이야기다. 위플레이는 종이비행기를 만들고 날리는 행사를 기획한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학관련 캠프를 진행하는 교육사업도 주수입원이다. 지난해 창업, 월매출이 평균 1000만원이다. 그는 “업종 특성상 매출의 80% 가량이 순수입”이라며 “순수입을 다른 2명의 공동대표와 1/3씩 똑같이 나눈다”고 했다. 직원은 대표 3명이 전부다.


이씨는 "매달 10번쯤 개인적으로 다니는 강연료 등 부수입까지 합치면 연수입이 대기업 과장급은 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종이비행기협회, 세계종이비행기협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이 대표는 ‘종이비행기로 타겟맞히기’ 기네스 기록 보유자다.

출처: 본인 제공
세계 종이비행기계서도 이씨는 유명인사다. 왼쪽은 세계종이비행기협회 부회장 임명장. 오른쪽은 세계종이접기창작개발원 위원 임명장

알파벳도 헷갈렸던 고등학생…‘맨 땅에 헤딩’ 끝에 인서울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방학 땐 친척이 경기도에서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액세서리를 깎는 공장이었어요. 5년쯤 일 했어요." 기초생활수급자로 어렵게 살았던 그는 "학기 중엔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란 아르바이트는 다 했다”고 한다. “품삯을 받고 농사도 지어봤고,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맥주병을 모아 팔기도 했죠. 고깃집 알바도 했어요.”

출처: 본인 제공
이씨는 고2때까지 알파벳도 제대로 몰랐다. 당시 실제로 쓰던 노트. J를 반대로 썼다

돈 주고 장난감을 산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다. 남들이 학원에서 공부할 때 물수제비를 할 수 있는 냇가, 종이비행기를 날릴 수 있는 공터에서 살았다. 성적은 바닥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맨몸 스포츠의 달인’이 됐다.


“TV에서 우연히 켄 블랙번이란 사람을 봤어요. 종이비행기 오래날리기 세계기록을 갖고 있는 분이죠. 따라해봤는데 안 되더군요. 종이비행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날리는 연습도 했죠."

출처: 다음뷰
이씨가 어릴적 20년가량 살았던 시골 마을. 빨간원으로 표시된 곳이 실제로 살았던 집이다

그런 그가 대학에 진학했다. "방학 때 일했던 공장을 운영하는 친척분이 공부하라며 '고등학교 기숙사비를 대주겠다, 대학 진학에 성공하면 등록금도 첫 학기는 내주겠다'고 하셨어요.”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2004년 12월 학교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다.


“맨땅에 헤딩이었죠. 그동안 학업은 뒷전이다보니 알파벳도 헷갈릴 정도였어요. 하지만 남들 3년 공부할 것, 1년만에 한다는 생각으로 하루에 3시간만 자고 집중해 공부했습니다.” 그는 2006년 홍익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만 1억

상주를 벗어나 상경(上京)한 이씨에게 서울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창업하기 전 10여년간 알바로 번 돈이 1억원”이라며 “생활비가 그만큼 들었다”고 했다.


“월세와 식비, 교통비 등을 합치면 한달에 100만원 정도 들잖아요. 100만원을 만들려면 시급 6000원짜리 일을 하루 5시간, 한달을 일해야합니다. 다른 분은 알바를 하면 ‘플러스’가 되지만 전 알바를 해야 비로소 ‘0’이 되는거죠. 매달 알바로 100만원 정도를 벌었습니다.”

학교 강의가 오후 6시에 끝나면 11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말엔 15시간씩 고깃집 서빙 등을 했다. 근로장학생은 기본이었다. 축구를 하다 십자인대파열 부상을 당했을 때도 알바를 멈출 순 없었다. 나중에 군면제를 받았을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다쳤을 때 그가 목발을 짚고 한 일은 텔레마케터였다. “다행히 고등학교 재단에서 나오는 장학금 등으로 등록금은 때울 수 있었습니다.” 오후 11시쯤 알바가 끝나면 학교 도서관으로 이동, 매일 1~2시간씩은 공부를 했다.

출처: 본인 제공
2013년 코리아컵 종이비행기 대회에 출전한 이정욱씨

졸업을 하던 해인 2009년 이색스포츠 관련 일을 하고 싶었던 그는 코리아컵 종이비행기 대회에 출전했다. “그때부터 세계 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꿈을 꾼 것 같아요. 일이 힘들 때,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희망이 됐던 종이비행기 세계 대회를 꼭 나가고 싶었습니다. 종이 비행기를 잘 날리기 위해 틈틈이 유체역학과 항공역학을 공부했습니다.”


관련 논문과 기사도 찾아서 읽었다. 종이비행기 챔피언들이 쓴 책을 외국에서 주문해 받아 공부를 했다. 인터넷으로 관련 동영상도 찾아봤다.

종이비행기 국가대표, 인생의 전환점이 되다

출처: 이정욱씨 제공
2015년 페이퍼 윙스 월드 파이널의 국내대회 선발전. 종이비행기가 손에서 떠나기 전까지 두 발 중 한 발이라도 땅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종이비행기는 날리는 기술과 힘이 중요하다. 비행기 접기는 기본일 뿐이다. 넓은 고무밴드를 벤치에 걸어놓고 아래에서 위로 잡아당기는, 이른바 '와인드 다운' 훈련을 중점적으로 했다. 하루에 100회 이상.


종이비행기 날리기 세계 대회인 ‘페이퍼 윙스 월드 파이널’에는 3종목이 있다. 오래날리기와 멀리날리기, 곡예비행이다. 이씨는 1600여명이 참가한 2015년 국내 선발전 오래날리기 부문에서 우승(14.19초), 세계 대회 오래날리기 부문 출전권을 얻었다. 프로야구 선수 이병규를 만나 트레이닝을 받기도 했다.

오른쪽은 2015년 세계대회 출전을 앞두고 프로야구 선수 LG 이병규(가운데)를 만난 이정욱씨(오른쪽)와 김영준씨(왼쪽). 이씨는 오래날리기, 김씨는 멀리날리기 부문 국가대표였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세계대회. 80개국 197명이 참가했다. 멀리날리기, 곡예비행 부문 한국 대표 2명과 함께 이씨는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레드불 세계대회에 출전했다. 4만 관객 앞에서 그가 거둔 최종 성적은 13위.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교민도 있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 우상도 만났다. 심사위원 가운데 켄 블랙번이 있었다.


“블랙번을 만나다니 꿈만 같았죠. 여러 차례 대회 챔피언을 차지한 존 콜린스도 만났습니다. 그는 현재 미국 지역방송의 PD입니다. 기네스 기록을 세우고 미국 50개주를 돌아다니며 종이비행기 대회도 열고, 유체역학을 알려주는 강의도 합니다. 종이비행기가 단순한 애들 놀이가 아니더라고요. 세계 각국에서 온 200명가량의 국가대표, 그리고 각국의 국기가 대회장에 걸려있습니다. 떨어지면 심지어 울기도 합니다. 진지한 분위기였어요.”

출처: 이정욱씨 제공
2015년 세계 대회 당시 평생의 우상이었던 켄 블랙번을 만났다. 오른쪽은 종이비행기 창업 아이디어를 제공한 존 콜린스.

세계대회를 다녀온 이후 이씨는 ‘종이비행기 국가대표’로 명성을 얻었다. 편입시험을 거쳐 학사과정으로 입학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을 앞둔 때였다. 여러 방송에 나갔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종이비행기를 갖고 유체역학을 알려주는 캠프도 시작했다.


“종이비행기 국가대표로 ‘퍼스널 브랜딩’을 한거죠." 퍼스널 브랜딩은 개인을 브랜드화 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엔 청소년 캠프 프로그램으로 의뢰가 들어오더라고요. 참가 인원도 100명에서 200명 300명으로 점차 불어났어요. 세계대회에 갔던 다른 '종이비행기 국가대표' 두 친구와 함께 아예 사업체를 꾸렸습니다.”

출처: 본인 제공
종이비행기 세계대회는 웬만한 국가대항전 열기에 뒤지지 않는다. 맨 왼쪽부터 선수 비표, 각국 선수들과 국기, 그리고 이정욱씨

그렇게 ‘위플레이’가 태어났다. 'WE PLAY', 즉 함께 놀자는 뜻. 캠프 강연뿐만 아니라 이색스포츠 관련 지역 문화축제 기획도 시작했다. 이씨는 “행사가 1억짜리라고 하면 우리에게 기획비용으로 20%, 약 2000만원이 떨어진다”고 했다. “가령 한강종이비행기축제를 예로 들면 기획부터 운영, 모객 홍보까지 다 맡는겁니다. 기존의 대행사랑 다른 점은 우리는 직접 기획한 사업만 한다는 점입니다.” 위플레이는 그동안 농·산·어촌 교육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한 사회공헌 활동을 인정받아 최근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주관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에 최종 선발됐다.


그의 직업관은 보통 사람과 달랐다. “직과 업을 따로 보면 직은 영어로 job, 업은 mission입니다. 우리는 장래희망부터 보통 ‘직’만 생각해요. 그러나 저는 취향과 취미를 일로 삼아 사람들도 즐기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10명 중에 4명만 취미를 갖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업’을 먼저 생각한거죠. 그걸 ‘직’으로 실천한게 현재의 이색스포츠 기획 및 마케팅입니다.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돈만 버는게 아니라 즐겁고 재미있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창업을 할 때도 ‘업’을 공유하는, 뜻맞는 사람끼리 한거죠.” 취미로 돈을 버는 이른바 ‘덕업일치’다.

“꿈은 항상 붙들고 있어야한다”

출처: KBS 명경만리 캡처
이정욱씨는 강연계에서도 유명인사. 매달 10번쯤 강연에 나선다

보통 꿈과 현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경제적 형편을 이유로 꿈을 포기하고 당장의 현실과 타협하지 말라”고 했다. “'다른 일을 하다 다시 꿈을 좇으면 되지 않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러나 꿈은 한 번 멀어지기 시작하면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고시원 살다 원룸, 원룸 살다 오피스텔 살아보세요. 다시 꿈을 위해 고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요? 꿈과 관련된 재능을 쌓는데 엄청난 시간이 또 다시 필요할 겁니다.”

출처: 이정욱씨 제공
'종이비행기로 타겟맞히기' 기네스 기록은 2016년 중국의 CCTV에 출연해 세운 것이다. 1분만에 수박에 12개의 종이비행기를 꽂았다

이씨는 “한국을 이색 스포츠의 성지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전세계인이 이색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미래에 ‘이색 스포츠 올림픽’을 꼭 개최하고 싶습니다. 장래희망에 ‘종이비행기 국가대표’를 적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의 꿈이 됐다고 생각하니 너무 뭉클하더라고요. 힘들었던 과거를 딛고 좋아하는 걸 하면서 밥 먹고 살 수 있는 지금, 또 다른 인생 목표를 향해 달려가겠습니다.”

글 jobsN 오유교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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