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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이'도 고객, 박봉 직장인 10년 취미로 대박났다

조회수 2017. 2. 13. 15:2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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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대학생이 매출 5억원 디자이너 되기까지

아기용 드레스. 육아 예능이 늘면서 연예계 시상식에서 흔히 보게 된 옷. 성인드레스를 길이 50cm 남짓하게 축소한 것 같지만 엄연히 디자인이 다르다. 입에 갖다대도 문제 없도록 소재도 신경썼다. 돌잔치나 음악연주회 등 자녀들에게 드레스를 입히는 일반인도 늘었다.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오히려 '하나 뿐인 자녀에게 좋은 것을 입히자'라는 부모가 늘었기 때문이다. 


아기용 드레스업계 스타 이혜련(39) 디어비 대표. 디어비는 디어 베이비(Dear Baby)의 준말로 '아기에게'라는 의미다. 가격은 16만~60만원 정도로 꽤 비싸다. 좋은 원단과 재료를 쓰고, 일일이 손으로 제작하기 때문이다. 드레스 뿐 아니라 외투, 정장 등 다양한 아기옷을 만든다.


10년 전 취미로 시작한 드레스 제작이 창업으로 이어졌다.  패션디자인 전공도 아니다. 평범한 대학생이 아기드레스를 만들게 된 과정은 저출산 현상 등 한국 현대사와 맞물려 있었다.  

출처: 본인 제
아기용 드레스 제작업체 디어비 이혜련 대표

1. 외환위기  


이혜련 대표는 99학번이다.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 서울 노량진 학원가에서 재수를 했다. 무턱대고 공부만 할 수 없던 형편이라 아르바이트도 했다. 학원 강사들의 수업준비를 돕는 조교가 됐다. 교재 제작에도 참여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경기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에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뭘 해야겠단 생각 없이 일단 들어갔죠."


대학에 들어가고서도 계속 일했다. 생활비와 학비를 댔다. 좋아하는 옷이나 물건을 사기도 했다. 마음대로 옷을 고쳐입을 수 있게 미싱기도 샀다. 좋아하는 일인지, 하고 싶은 일인지 따질 여력이 없었다. 

IMF 여파가 생각보다 컸습니다. 입학 초에도 암울했지만 자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2. 인터넷 강의 폭발적 성장 


졸업하고 한국교육방송공사(EBS)에 들어갔다. 강사와 함께 교재 만드는 일을 했다. 아르바이트가 직업이 됐다. 2004~2005년 메가스터디로 옮겼다. 인터넷 강의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새벽 1~2시까지 일했다. 강사들의 강의 일정을 맞추다보니 밤늦게 마쳤다. 업무가 바빠 취미 생활 조차 하기 어려웠다. 월급은 300만원이 조금 안됐다.

그래도 '일 잘한다' 소리는 들었어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이냐'면 대답하기 어려웠지만 맡은 일은 제대로 해내려 최선을 다했습니다.
출처: 이동국씨 부인 인스타그
디어비 드레스는 연예인 등 유명인 고객이 많다. 디어비 옷을 입은 축구선수 이동국씨 아들 대박이.

3. 내 손으로 만드는 DIY 열풍 


금융위기가 닥친 2008년말. 무작정 회사를 관뒀다. 재수생 시절부터 딱 10년 일한 뒤였다. 웨딩드레스를 만들고 싶었다. 20대 후반이라 주위에 결혼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당장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배워놓으면 뭘 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하긴 했죠. 무엇보다 회사를 다닐 때 못해본 걸 해보고 싶었습니다.

유명한 디자인, 패턴, 재봉 장인들을 수소문했다. 퇴직금과 모아놓은 돈 수천만원으로 레슨비를 충당했다. 제작실에는 항상 남는 천이 있었다. 웨딩드레스는 천을 여러번 둘러 만들다보니 버려지는 부분이 많았다. 원단 가격도 높았다. "기본폭이 8마(약 7m) 정도예요. 남는 천을 가져와서 패턴이나 바느질 연습하기 좋았습니다." 

4. 파워블로거의 시대 


짜투리 천으로 아기 드레스를 만들어봤다. 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일주일을 꼬박 쏟아야 하는 성인용 웨딩드레스와 달리 하루 밖에 안 걸렸다. 빠른 시간 안에 결과물이 나오니 스트레스가 풀렸다.


포트폴리오를 만들 겸 블로그를 열었다. 파워블로거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누가 와서 볼까' 싶었는데 댓글이 하나씩 달리기 시작했어요. 예쁘다는 칭찬을 넘어 '옷을 살 수 없느냐'라는 분들도 생겼어요. 뭔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레스로 먹고 살겠다고 다짐했다. 

출처: 디어비 인스타그램
배우 오지호씨의 딸도 디어비 드레스를 입었다.

5. 열정페이 3개월 


우선 서울 청담동 유명 웨딩드레스 가게로 갔다. 스물아홉살에 제작실 막내 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막내 직원은 대부분 22~23세였다.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뒤로 물러설 곳이 없었거든요. 다시 교재 제작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딱 1년만 버티기로 했습니다." 자존심은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 많은 막내'를 받아야하는 선배들에게 미안했다. 


옷을 직접 만드는 제작실에서 일했다. '패션계 막내 생활은 월급은 적고 일은 고되다'라는 말이 있다.

운전을 할 줄 알아서 디자이너 선생님을 많이 모시고 다녔어요. 광장시장에 가서 부자재, 원단을 직접 날랐어요. 박람회 준비하시는 걸 돕기도 했죠. 정말 힘들었는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원단을 떼고, 상인들과 흥정하는 법을 배웠다. 직접 제작하는 일 뿐 아니라 매장에서 손님들을 만나는 일도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6. 소자본 창업 


예정했던 1년보다 짧은 3개월만에 그만뒀다. 그 길로 창업을 했다. 블로그를 운영하고 가게에서 일하며 익힌 감각이 큰 도움이 됐다.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오피스텔을 얻었다. 보증금 3000만원, 월세 150만원. 수입 한 푼 없는 처지에 큰 돈이었다. 


사업자 등록을 했다. 취미로 만들어 한두 벌씩 팔던 블로거 시절과는 달랐다. 낮에는 구청, 법률사무소를 쫓아다니며 행정처리를 했다. 저녁엔 옷을 만들었다. 미싱만 담당할 직원을 채용했다. 


돈 들여 마케팅하는 대신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① 질 좋은 원단과 자재를 사용하겠다.
② 누구나 와서 입어볼 수 있게 하겠다.

 한 벌 가격은 38만원. 첫 달 매출은 700만원. 고가(高價)였지만 꾸준히 블로그를 하며 확보한 고객들이 많았다. "돈을 세는데 마냥 좋았습니다. 만드는 데 들어간 제 노력은 별로 생각도 안날 만큼 기뻤습니다." 

출처: 디어비 인스타그램
디어비 제작실에 근무하는 직원. 사람이 일일이 재단하고 바느질하는 작업 특성상 제작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고, 시간이 걸린다

7. 한 단계 도약 


디자인과 기술 특허를 냈다. 낚시줄을 넣어 치마 끝부분을 물결무늬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가격을 높게 받는 만큼 좋은 원단을 쓰고, 끊임없이 다자인과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오피스텔에서 1년 반 동안 장사하면서 돈이 꽤 모였다. 드레스 판매 뿐 아니라 대여를 하면서 안정적인 수익을 얻었다.


2011년 로드샵을 내기로 했다. "좁은 오피스텔을 벗어나서 제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가게를 옮기면서 대여업은 접었다.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도 다양해졌다. 연예인이나 기업가 등 유명인도 왔다. "큰 의류회사 회장님이 손녀 드레스를 주문하신 적 있어요. 회사에 소속돼 있거나 이름난 디자이너한테 맡겨도 될텐데 저희 제품을 찾아줘 뿌듯했습니다."

8. 결혼과 출산

출산을 전후로 옷을 대하는 생각이 완전 달라졌습니다.

가게를 운영하던 2014년 첫 아이가 태어났다. 28일만에 출근했다. 아기를 안고 온 손님을 보면 원하는 게 뭔지 보였다. 고객들은 디자인이나 패턴말고도 눈여겨 보는 게 있었다.


"저희는 따로 속치마를 안 써요. 아기들은 한겹 더 입을 때마다 허리 고무줄 때문에 불편하거든요. 천 모서리를 맞대 바느질한 부분을 솔기라고 합니다. 제품 만들 때 솔기를 아이 살에 안 닿는 방향으로 해요." 


매장에 빈 공간을 늘렸다. 옷을 입어본 아이들이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다른 아기들에게 예쁜 옷을 입히려 우리 애들을 잘 못 보는 셈이니 서운하고 미안할 때도 있어요. 워킹맘의 숙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출처: 본인 제공
2016년 중국 심양에서 열린 박람회에 참여한 이혜련 대표

9. 중국 진출


이혜련 대표는 지난해 중국에 다녀왔다. 성인용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들과 함께 박람회에 참가했다. 중국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 유명인들이 자녀에게 디어비 드레스를 많이 입히면서 해외에서도 꽤 러브콜이 들어온다. 

중국 정부가 아이를 1명만 낳도록 규제했지만 앞으로 자녀를 2명까지 허용한다니 수요가 늘거예요. 그렇지만 가능성이 있어도 무턱대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가지 장애물이 있어 하나씩 준비해가는 중입니다.

10. "창업 말리고 싶다" 


'비슷한 창업을 하려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달라'고 하자 "말리고 싶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힘드니까요. 사업이 커지다보니 접고 싶다고 접고 더 나가고 싶다고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더라군요." 


하지만 보람도 있다. 창업하고 가장 기쁜 건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야근 없는 문화를 만든 것(하루 9시간 근무), 둘째는 월급을 줄 때다.

유명한 디자이너에게는 인재들이 몰려요. 하지만 저는 유학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유명하지도 않거든요. 우리 직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해봤어요. 생계를 제대로 꾸리게 하고, 존중해주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글 jobsN 감혜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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