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봄이 카레이서 '직업11개 전전..이젠 목뼈 부러져도 행복'

조회수 2018. 11. 5. 14: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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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대표 카레이서 권봄이
고졸 이후 가졌던 직업만 10개, 마침내 만난 카레이싱
대출에 투잡까지…오로지 꿈을 향해 달린 20대 청춘
목뼈 부상·손등골절 딛고 정상급 선수 반열에

꿈을 찾아 20대 청춘(靑春)을 오롯이 바쳤다. 거친 직업만 10개. 현재의 정착지이자 11번째 직업은 카레이서. 세 차례 큰 부상을 딛고 현재 정상급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권봄이(30·서한퍼플모터스포트)의 이력이다.


여자 카레이서는 극소수다. KARA(대한자동차경주협회) 관계자는 “2016년 기준으로 대회 출전이 가능한 라이선스를 보유한 선수는 남녀를 통틀어 780명가량”이라며 “그 중 실제로 대회에 출전하는 여자 선수는 10명 안팎”이라고 했다. 모터스포츠는 남녀가 함께 출전해 순위 경쟁을 하는 종목이다. 이런 이유로 협회는 성별로 선수 숫자를 집계하지는 않는다.


입문 8년차. 그녀는 ‘금녀(禁女)’의 영역이나 다름없던 모터스포츠계에서 돋보이는 존재다. 2013~2015년 KARA가 선정한 ‘올해의 여성 드라이버상’을 3년 연속 수상했다. 2016년엔 이 상을 폐지했다. 만약 상이 존재했다면 4년 연속 수상도 따놓은 당상이었다. 2016년 CJ슈퍼레이스 GT2 클래스에 출전해 종합 3위를 기록했다.


GT2 클래스는 양산차를 개조한 차로 참가하는 대회 중 두번째로 높은 등급이다. 제네시스 쿠페급 차량이 참가한다. 총 17명의 선수가 이 클래스에 참가했다. 이 중 여자는 권봄이를 포함해 2명뿐이었다. 그녀는 ‘무한도전’(MBC) ‘더 벙커’ ‘탑 기어’(이상 XTM) 등 방송에 출연해 카레이서를 알리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극단적인 ‘남초의 세계’에서 살아남고 있는 권봄이를 만났다. 

출처: CJ슈퍼레이스 제공
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권봄이

◇꿈이 없었던 소녀, 4년간 10개 직업 전전하며 방황 

어릴적 꿈이 카레이서였나요 

그런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어릴 때 남달랐던 점은 있었어요. 보통 여자들은 화장놀이 인형놀이 하잖아요. 그런데 미니카가 그렇게 좋았어요. 다섯살 차이 친오빠나 동네 오빠들이랑 미니카를 같이 갖고 놀았어요. 또 자동차 브랜드를 외우고 축구화를 즐겨신는 등 남자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어요.”

남성적 취미가 카레이서라는 꿈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권봄이는 “뭘 하고 싶은지 몰랐다”고 했다. “한가지 특이점을 꼽으라면 평범한 건 싫었다는 거예요. 중학교 입학 이후로는 일부러 용돈을 안 받았어요. 알바를 했죠. 주유소에서 일하거나 전단지도 돌린 적도 있고요. 그렇게 학창시절 보내다 고교 졸업 후 바로 사회에 뛰어들었죠.

무슨 일을 했나요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초콜릿이 여러 개 있는데 어떤게 맛있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래? 네가 먹어본게 하나면 그게 맛있다고 하겠지. 다른건 먹어본 적이 없잖아. 직업도 마찬가지야.’ 그 말을 듣고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권봄이는 19살부터 10개의 직업을 체험했다. 피부관리사, 청원경찰, 바리스타, 보험회사 텔레마케터, 모던바 직원, 아이돌 연습생, 상인, 골프연습장 직원, 자동차 회사 리셉션, 경리.

일단 직업을 가지면 치열하게 몰두하고 그게 안 맞다싶으면 그만뒀어요. 한 번은 작곡에 뜻이 생겨서 그쪽 공부를 하다 가이드 녹음 작업을 했고, 그 와중에 생긴 인연으로 한 기획사에서 섭외가 들어와 아이돌 연습생을 했죠. 가이드 녹음이란 작곡가가 구매자, 즉 가수에게 곡을 소개하기 전에 전문 보컬트레이너 등을 통해 녹음하는 것을 뜻해요. 아이돌 연습생 시절에는 몸치라 춤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 3개월만에 그만뒀어요.

한 가지도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기왕하는거 무조건 최고로 잘하자 생각했어요. ‘하는 일에 끝장을 보자’는 생각으로 했죠. 보험회사 광고전화 받으신 적 있으시죠? 텔레마케터를 할 때 단 1분만 통화가 되면 대부분 계약을 따냈어요. 그 1분을 잡기 위해서 화술 연구를 많이 했죠. 마치 지인처럼 친근하게 다가가는 식이예요. 운전 중이면 ‘조금 이따 전화 드릴게요. 좋은 정보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상황마다 맞는 멘트를 다 외우는 거죠. 그러다 회사 내부에서 강연을 하라는 제의도 받았어요. 바에서 일 할때는 사람 심리에 대해서 많이 배웠어요. 아파트 야시장에서 닭꼬치를 팔 때는 현금을 계속 만지니까 재밌더라고요. 메모를 열심히 했어요 뭘 하든지. 바리스타를 할 때는 원산지가 어디인지 어느 온도에서 커피를 내리는게 좋은지 같은 거요.

그런데도 결국 맞는 일을 못 찾았나요

 

미친듯이 일하고 그러다 흥미를 잃고 또 다른 일을 하고. 이게 반복이 되면서 결국은 쓸모없는 인간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우울증이 심하게 왔어요. 쌍둥이 여동생과 비교 당하면서 더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유치원 선생님을 했거든요. 어머니가 ‘한배 속에서 나왔는데 너는 왜 이러냐’고 수없이 잔소리를 했어요. 한 번은 공황장애가 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쓰러진 적도 있었어요.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와중에 동생이 다이어리에 만원짜리를 꽂아넣고 뭐라도 사먹으라고 하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출처: CJ슈퍼레이스 제공
왼쪽은 출발 전 대기하고 있는 권봄이의 모습. 오른쪽은 제네시스 쿠페 차량에 탄채 레이싱을 하고 있는 권봄이

◇모든걸 바꿔놓은 레이싱과의 만남

카레이싱과의 만남은 10번째 직업인 한 중소기업의 경리로 일할 당시 찾아왔다. 오전 8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의 일상을 반복하며 월급 150만원을 받던 때다. 2009년 어느 날 그녀의 친구들이 ‘카트라는게 있는데 한 번 타러 가보자’고 꼬드겼다. 처음엔 우연이었지만 알고보니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카트를 처음 탔을 때 어땠나요

신세계였어요. 운전면허도 독학으로 딸 정도로 운전을 좋아했거든요. 카트를 타보니 빠르고 재밌더라고요. 예전에 미니카 갖고 놀던 생각도 났고요. 그 이후 평일에는 일을 하고 주말마다 무조건 카트장에 갔어요. 3~4개월 정도 그랬어요. 그러다 소문이 나면서 장윤식 당시 팀챔피언스 단장님을 만났어요. 헬멧과 슈트를 주면서 ‘한 번 같이 해보자. 너에게 투자하겠다’고 하더군요.

일생의 기회를 잡은 권봄이는 직장을 그만두고 팀챔피언스 소속으로 전업 카레이서로 전향했다. 당장 수입이 끊겼기 때문에 사금융에서 대출을 받아 생활비를 해결했다. 이자가 30%에 가까웠다. 집안이 잘 사는 편은 아닌데다 중학생 이후로 사실상 독립 상태였기 때문에 부모님의 도움은 받지 않았다. 권봄이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당장 내일 카트를 탄다고 생각하면 그 전날 저녁에 미리 준비를 모두 마치게 되더라고요. 남들은 여유부리며 커피한잔 마실 때 최소 한시간은 먼저 카트장에 나가서 준비 운동을 했어요. 남들보다 시작이 늦은 편이니까 아픈 것도 참아가면서 연습 했어요.

어디가 아팠나요 

갈비뼈가 부러진 적이 있는데 아프다고 하면 연습을 안 시켜줄까봐 숨겼어요. 하루에 진통제를 몇통씩 먹으며 견뎠죠. 나중에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갈비뼈 2개가 엇나가서 붙었다더군요. 다른 1개는 실금이 갔고요. ‘부정교합’이죠. 뼛조각이 살을 파고 들어가서 큰일날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당시엔 그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여기가 인생의 종착지다, 여기서 끝을 본다고 생각했으니깐요.
출처: 권봄이 제공
왼쪽은 목 수술을 받은 뒤 촬영한 사진. 빨간원에 표시된 부분이 엉덩이에서 떼낸 뼈를 목에 고정시킨 나사 6개다. 수술 이후엔 깁스를 했다(가운데). 맨 오른쪽은 장애등급 6급 판정을 받은뒤 발급받은 복지카드

◇하반신 마비 부를뻔한 대형사고,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2010년 4월 권봄이는 코리아카트챔피언십을 통해 카레이서로서 데뷔전을 치렀다. 첫 대회부터 4위에 오르며 파란을 일으킨 그녀는 승승장구하며 이듬해부터 국내 최고의 모터스포츠대회인 CJ슈퍼레이스에서 활동했다. 제네시스 쿠페로 출전하는 ‘젠쿱전’이 그의 무대였다. 

카트와 달랐을텐데요

첫 대회에선 수동미션을 몰랐어요. 쉽게 생각하다 큰코를 다쳤죠. 차를 제대로 못 몰다보니 다른 선수들 진로 방해를 엄청 했어요.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고 다녔어요. 나중에 유경욱 선수한테 들은건데 ‘죽여버리고 싶었다’더군요. 의욕은 넘치는데 실력은 안 되니까 결국 부상을 당했죠. 비가 내리던 날 방호벽에 충돌하면서 왼쪽 손등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당했어요. 그 후유증으로 아직도 왼손은 잘 못 펴요. 반년쯤 레이스도 못했죠.

오뚝이처럼 일어선 권봄이는 2014년 국내 명문팀인 서한퍼플모터스포트팀에 입단하면서 승승장구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또 다시 사고를 마주했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국내 레이싱에서 보기 드문 대형 사고였다. 추월을 하다 실수로 방호벽에 부딪혀 허공에서 두바퀴를 돌고 떨어졌다. 

어쩌다 사고가 났나요

우리팀은 계약을 연간 단위로 하거든요. 시즌 마지막 대회였어요. 뭔가 보여줘야한다는 생각에 무리를 한 것 같아요. '그만둬야하나’라는 생각에 병원가서 펑펑 울었죠. 그런데 의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는거예요. 자꾸 주먹을 쥐어보라 하더군요. 알고보니 목뼈가 부러져서 사지마비가 올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척추와 연결되는 신경을 다치긴 했는데 끊어지진 않았어요. 천운이라고 하더라구요.

수술을 했겠네요

의료진이 제시한 최적의 방법은 철심을 박아 목뼈를 고정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러나 그 경우엔 큰 충격을 받으면 철심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레이싱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무조건 레이싱을 할 수 있는 다른 수술로 해달라고 했어요. 엉덩이뼈를 떼어낸뒤 나사 6개를 박아 목뼈에 붙이는 수술을 했어요. 그때 팀스폰서인 김용석 서한그룹 부회장님이 정말 고마웠어요. 최고의 병원 최고의 병실 최고의 의료진을 불러 수술을 도와 주셨거든요. 재활도 도와주시고 자기 차도 쓰라면서 주셨어요. '네 뒤엔 항상 내가 있을테니 꼭 이겨내라'고 응원해주셨어요.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법 쉬어야 했겠는데요 

부상이 컸던 탓인지 수술 뒤엔 지체장애 6급 판정을 받았어요. 그래서 주차장 요금도 80% 할인을 받아요. 고속도로 통행료도 절반이고요.
일주일마다 병원을 찾아가 '대회에 나가도 괜찮다'는 진단서를 끊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야 경기를 나갈 수 있거든요. 의사들은 당연히 말렸죠. 최소 1년은 쉬어야 된다면서. ‘오늘은 정말 괜찮은 것 같아요’라고 하면 ‘실밥도 안 풀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는 식이었어요. 그렇게 끈질기게 진단서를 요청하는 동시에 재활하면서 7개월만에 복귀했어요. 아팠을 때를 되돌아보면 무한도전 촬영으로 인연을 맺었던 유재석씨도 기억에 남아요. 촬영한지 수개월이 지났는데도 괜찮냐고 전화를 해주시더라구요. 이래서 유느님 유느님 하나봐요. 그 후로도 문자메시지를 통해 안부를 주고받았어요.

권봄이는 2015년 6월 경기를 치르며 레이싱 무대에 복귀했다. 2016년에도 쟁쟁한 남자 선수들 사이에서 정상급 선수로 활약했다. 그녀는 “여자 카레이서로 살아남기 위해 절대 운동도 쉬지 않고 레이스 공부도 쉬지 않았다”고 했다.

냉정하게 따져서 여자가 담력은 남자보다 약해요.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보완해 나가는게 중요해요. 2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할 때도 있어요.
출처: 권봄이 제공·XTM 캡처
왼쪽 사진은 권봄이가 유재석(오른쪽)이 왜 '유느님'인지 깨달은 순간이다. 2014년 무한도전 '스피드레이서 특집' 기념 촬영을 할 당시 권봄이에게 유재석이 "자신의 오른발을 밟으라"고 했다. 키 차이가 나는 권봄이가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오른쪽 사진은 '더 벙커'에 출연한 모습이다

◇‘투잡 인생’이지만 행복도는 최고  

한국은 선진국에 비해 모터스포츠 기반이 취약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대부분 카레이서가 ‘투잡’을 뛴다. 카레이서로 활동하는 동시에 다른 부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권봄이도 예외는 아니다. 

카레이서 외에 어떤 일을 하나요 

저 같은 경우엔 드라이빙스쿨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고 있어요. 여성 운전자 대상으로 차에 대한 정보 제공과 교육을 진행하는 식이죠. 차의 기본적 성능도 의외로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가령 미끄럼방지기능, 전자제어시스템 같은거요. 자동차 브랜드의 시승 행사 같은 것도 자주 나가는 편이에요.

연수입은 어느 정도 되나요 

저도 그렇고 선수마다 천차만별이에요. 해마다 다르고요. 사실 2014년 전까지는 '마이너스'였어요. 그 이후로 조금씩 저축할 수 있는 사정이 됐고요. 요즘엔 중소기업 회사원 정도 버는 것 같아요. 물론 방송 출연이나 바이럴 영상 촬영, 인스트럭터 등 부수입 때문에 그 정도까지 올라간 거고요. 순수하게 레이스로 벌어들이는 걸로만 치면 1년에 1000만~3000만원 가량이에요. 그러나 레이싱을 준비하면서 수입이 없던 기간, 그리고 입문 초기에 부상으로 쉬었던 기간 때문에 빚이 2500만원까지 불어난 적도 있었어요. 매달 25일만 되면 불안했던 시절이에요. 다달이 뭔가를 내는게 너무 싫어서 지금은 휴대전화도 무조건 할부가 아닌 현금 완납으로 사고, 신용카드도 절대 안 써요. 지금은 빚을 다 갚았어요.

배고픈 시절을 이겨낸거네요 

배고픈 것보다도 불안한 시절이죠. 짠순이 같은 성격이 몸에 배었어요. 커피 한 잔 사먹는 것도 너무 부담이 됐어요. 김밥집에서 김밥 한줄 안에서 먹으면 1500원인데 테이크아웃 하면 1000원이었거든요. 그걸 사서 지하철에서 먹고 그랬어요. 한 번은 지하철 탈 돈이 없어서 몰래 탄 적도 있어요. 동료들한테 빌붙기도 하고. 돈 없는 것 알고 지인들이 용돈 10만원씩 주면 눈물이 났어요. 슈트 헬멧 남이 입던 것 빌려쓰고 물려쓰고. 생일날 케이크하나 살 돈이 없어서 서러운 적도 있었어요. 겨울옷도 내돈 주고 사기 시작한 지가 얼마 안됐어요. 비싸니까 얇은 옷을 껴입는 식으로 때웠거든요. 그래서 겨울이 그렇게 싫었어요. 2014년 무한도전 촬영한 다음에 추가 촬영 요청이 들어온 적이 있는데 행사랑 겹쳐서 거절했어요. 사람들이 미쳤냐고 그랬는데 당장 눈앞의 돈이 더 중요했거든요.

그렇게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뭔가요 

직업을 사랑한다는말 들어보셨어요? 저는 카레이서가 퇴근하기 싫은 직업이에요. 반대로 너무 출근하고 싶고요. 너무 레이스장에 가고 싶고 가슴이 뛰고 하루 하루가 행복해요. 부상을 당했던 목과 손등은 여전히 종종 아파요. 장마철만 되면 목을 뜯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에요. 아파서 눈물이 날 때도 있어요. 이래서 시집은 가겠냐는 소리도 들어요. 그런데 그게 어떤가요. 지금 누구보다도 행복한걸요.
출처: 권봄이 제공
2014년 '올해의 여성 드라이버상'을 수상한 권봄이(왼쪽). 오른쪽은 지인의 아이가 권봄이를 응원하며 그린 그림이다

◇카레이서를 꿈꾸는 이에게 바치는 조언 

여자 카레이서를 꿈꾸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나요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영어 공부를 해도 교재값이 들잖아요. 결혼이랑 차는 ‘질러놓고 봐야된다’고 하잖아요. 꿈도 똑같아요. 돈이 없으면 알바를 하든 대리운전을 하든 최소한의 비용을 마련하고 그걸 기반으로 꿈을 향해 달려가야해요. 요즘엔 드라이빙스쿨이 많이 생겼으니 거기서 기초를 배우는 것도 좋고요. 다만 저처럼 무모할 것까진 없어요. 진입 장벽이 낮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여자 카레이서로서의 메리트가 분명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어느 세계나 희소한 자원이 대접을 받잖아요. 일단 자리를 잡으면 대가는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꿈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많은데요

 

어린 친구들 만나면 얘기해요. 이것저것 다 해보라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나 대학 진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다닌다고 다 해결되나요. 그 직업이 꿈이 아니었거나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아무 생각없이 밤에 퇴근해서 3~4시간 자고 매일 출근. 너무 슬프지 않아요? 저도 그랬어요. '돈 버는 기계로 살다 죽는거 아냐?' 그런 생각에 이런 저런 일을 하다 꿈을 찾은 거고요. 인생은 한 번인데 좋아하는 일을 해야죠. 저도 부유하진 않지만 내가 번 돈으로 먹고 살고 행복하잖아요. 그러면 된거 아닌가요.

인생의 궁극적 목표를 묻자 권봄이는 “죽기 전까지 올해의 드라이버상을 꼭 받고 싶다”고 했다. “

여자만 해당되는 여성 드라이버상 말고 한해 남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선수에게 주는 상이에요. 쉽지 않겠지만 도전하고 싶어요. 어떤 아이가 제 그림을 그려준 적이 있어요. 시상대 오른 모습이요. 누군가의 우상이 된다는게 이렇게 뿌듯한 일인줄 그전엔 몰랐어요. 그런 분들을 생각하며 더욱 힘을 내서 2017년은 저의 해로 만들고 싶어요.

글 jobsN 오유교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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