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인조 시대 과거시험에 등장한 절박한 호소

조회수 2021. 3. 4. 17:3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지휘관이 전쟁의 성패 가린다"

1629년(인조 7년)에 치러진 별시문과의 책문(策問)에서 인조는 조선이 뛰어난 병기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이유를 물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난지 2년째 되던 해였다. 문신 정두경은 승리하는 데 중요한 요소는 '병기'가 전부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리더의 역할'을 해답으로 제시한다. 정두경을 장원급제하게 만든 답이었다. 장수가 누군지에 따라 수하 병사들의 생사가 엇갈린다는, 어쩌면 절박한 호소에 가까운 이 글귀는 조선의 당시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나타나게 된 것일까.


대표적인 병법서 『손자병법』에 ‘피실격허(避實擊虛)’ 라는 말이 나온다. 적의 강한 곳을 피해서 약한 곳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적의 단점을 최대한 키우되 나의 단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나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되 적의 장점을 무력화하는 것은 그야말로 전쟁의 기본이다. 나의 장점(장기)으로 적의 단점(단기)과 대결해서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다.

문제는 적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대응하리라는 점이다. 장기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를 기약할 수는 없다. 조선은 장기를 가졌음에도 오랑캐를 제압하기는커녕 큰 위기를 겪은 바 있다.

임금이 강화도로 몽진했던 정묘호란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시점. 인조는 국방에 관한 과거 문제를 냈다. 과연 장기 외에 승리하는 데 필요한 요소가 또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사자가 지휘하는 양 떼가 양이 지휘하는 사자 무리를 이긴다

"싸워서 이기는 방법은 만 가지로 같지 않지만

결국은 우리의 장기로 상대의 단기를 공격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 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정두경(鄭斗卿,1597∼1673)의 답이다. 그는 전쟁에서 장기가 매우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고 봤다. 그때그때의 ‘형세’에 부합해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느냐, 아니냐가 장기가 될지 여부를 결정한다. 정두경이 ‘장기가 이기고 단기가 진다’라고 말하지 않고 “유리한 것이 이기고 불리한 것이 진다”라고 표현한 이유다.

출처: 위키피디아
회본태합기의 일본군이 27일 밤에 당도했다는 급보를 듣고 신립이 급히 마을로 가는 장면 삽화

예컨대, 임진왜란 초기 신립은 정예 중장기병을 이끌고 왜군 저지에 나섰다. 그는 높은 지대에서 활과 화살로 왜적의 조총에 맞서야 한다는 의견을 묵살하고 평지에서는 기병이 유리하다는 고전 전략에 따라 평야에서 기병 돌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신립이 전투를 벌인 탄금대는 습지에다가 탁 트여 있는 만큼 적의 조총에 피격되기도 쉬웠다. 습지와 조총이라는 형세에서는 ‘평지-기병전’이 더 이상 장기일 수 없었다.

그런데 형세가 유리한데도 불리한 자에게 지는 경우가 있고, 불리한데도 유리한 자에게 이기는 경우도 있다. 이에 정두경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요체는 장수에게 달려 있다”며 “장수가 근본이고 병기(兵技)는 말단”이라고 단언했다.

“화살을 쏘고, 적을 베고, 적진으로 돌격하고, 상대를 찌르고 몸을 보호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병기가 있더라도 사람이 이를 버리고 달아난다면 모두 헛된 것일 뿐입니다. (중략) 싸움에서 이기려면 병사들이 사력을 다해야 하고, 장수가 그런 마음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뛰어난 장수 가운데 병사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서도 승리를 거둔 자는 없었습니다.”

정두경은 뛰어난 장수가 없는 것을 걱정하기 보다는 어떤 병기에 뛰어난지, 어떤 장기를 키워야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지와 같이 지엽적인 사안에만 관심을 두는 세태를 지적했다.

지휘관이 지휘관다울 수 있도록 지지가 필요해

뒤이어 정두경은 임금이 책임지고 좋은 장수를 등용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금은 장수들의 장수다. 장수가 병사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듯이 임금은 장수의 잠재력을 이끌어낸다. 장수가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 이 역시 임금의 중요한 책무라는 것이다.

같은 책문에 대해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역시 정두경과 비슷한 요지의 주장을 펼쳤는데 글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촉한 후주(後主) 때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비의와 동윤이 안에서 임금을 보좌한 덕분에 제갈공명은 걱정 없이 밖에서 작전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송나라 때 진화와 장준이 안에서 권력을 전횡하였기 때문에 악비와 한세충이 밖에서 적을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임금이 좋은 장수를 발탁해 임무를 맡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장수가 오로지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후방에서 조정을 지키는 신하들이 든든하게 서포트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장수를 이래저래 흔든다면 아무리 뛰어난 명장이라도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지휘관이 자신의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오로지 전투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출처: JTBC 궁중잔혹사 / 인터비즈 디자인
결국 인조는 1638년 병자호란을 치루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다

이러한 정두경의 대책을 인조가 받아들였을까? 장원으로 삼은 답안이니 읽고 느낀 바가 있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아니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간신 김자점을 총사령관인 도원수에 임명했고, 김자점은 청군을 저지하기는커녕 방관하다시피 했다. 다른 장수들이 보여준 무능함도 수두룩하다. “장수가 근본이고 병기는 말단”이라는 정두경의 말을 다시금 새겨볼 필요가 있다.

원문: DBR 314호
필자: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정리: 인터비즈 조지윤 김재형
inter-biz@naver.com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