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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했던 그는 왜 갑자기 회사를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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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했던 우리는 왜 회사에서
무기력한 투덜이가 됐을까?

누군가는 오늘날을 '부캐 전성시대'라고 부른다. 산업·노동계에서 직장 안팎에서 전혀 다른 정체성을 내보이는 젊은 세대의 새로운 특성으로 해석하곤 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새롭지만은 않은, 인간 사회의 본질이 숨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미 1950년대 말 20세기 대표적인 사회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어빙 고프먼은 '자아 연출의 사회학'이라는 저작을 통해 이를 풀어쓴 바 있다.

인간은 서로 다른 대면 상황에서 외형이나 태도를 바꿈으로써 자신에 대한 타인의 인식을 조정하려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사람은 한결같아야 한다"라는 윤리 강녕보단 인간관계나 사회적 지위가 복잡해지고 다변화하는 현대 사회에 좀 더 설득력을 얻는 명제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부캐 신드롬은 장소나 사람, 환경에 따라 원래부터 정체성을 달리해왔던 인간의 본성이 최근 사람들의 주의를 끈 몇몇 소재(예를 들면 '마미 소녀' ' 린다 G' 등등)를 통해 그저 색다른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 달리 생각해보자면, 직장에서 배우처럼 연극을 하고 지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상사나 부하를 집에서 마치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자매 대하듯 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고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사무실에선 거기에 맞는 직장 내 규율, 역할에 맞게 언행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 당연한 얘기를 구구절절 하는 것은 확인해보고 싶었던 한 가지 의문, "우리는 왜 번아웃(Burnout)이 됐나"를 설명하는 열쇳말이 될 수 있어서다.

우리 모두는 역할극을 하는 배우?

최근 5년간 경영 인사와 관련된 학술지, 학회 논문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용어 중에 하나가 직무 소진, 즉 '번아웃'이다. 직무 소진은 보통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상태가 고갈 단계에 이른 것으로 쓰인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탈진한 것. 학계에서는 이 번아웃의 척도로 쓰이는 ①정서적 소진 ②비인격화 ③성취감 결여 등 세 가지 기준을 측정하기 위해 1982년 마셜라크(masalach)와 잭슨(jackson)이 제시한 도구 'MBI(Masalach Burnout Inventory)'를 활용한다.

자연스레 질문 하나가 떠오를 것이다. "어떤 직장인이 저 MBI 조사에서 번아웃에 가까운 응답 결과를 내놓게 될까?" 결과를 예상하기 위해선 앞서 설명한 "인생은 연극"이라는 명제 아래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라는 변수를 살펴야 한다. '심층 연기(Deep Acting)'를 하느냐, '표층 연기(Surface Acting)'를 하느냐에 따라 조사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 두 개념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의 심리학자 알리샤 그랜디(Alicia Grandey)가 서비스 직군의 감정노동 종사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논문을 통해 소개됐다.

심층 연기는 속마음까지 자신의 직무 행위에 적합한 상태로 조정하는 것을 말한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이라고 은행 창구를 찾은 손님에게 말을 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을 하는 행원이 진심으로 "오랫동안 대기를 해주어 고맙다"라고 자기감정을 연출하는 것이다. 반대는 겉은 미소 짓고 있는데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 때를 뜻한다. 이중 어느 쪽이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될까. 아무래도 연기력이 얕아 겉과 속이 따로 놀면 상대방도 눈치채기 십상이고 본인도 심리적 갈등에 에너지 소비가 더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바로 여기가 '정서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이란 변수를 고려해야 할 지점이다. 이는 1990년 미국 예일대 심리학 교수인 피터 샐로비(Peter Salovey)와 뉴 햄프셔대 심리학 교수인 존 메이어(John Mayer)에 의해 처음 개념화한 것으로 보통 정서라는 정보를 이성적으로 처리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뜻한다. △자각(자신 또는 타인이 느끼는 감정의 유형을 정확히 분류) △자기조절 △동기부여 △감정이입 △대인관계 등의 척도로 표현되는데 지능지수(IQ)와 더불어 흔히 사회생활과 커리어를 결정짓는 주요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정서지능과 번아웃의 관계

후속 연구들을 통해 하나 둘 밝혀지는 것 중에 하나가 이 정서지능이 높을수록 심층 연기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열등감인지 질투인지 아니면 상대방의 예의 없는 행동에 대한 정당한 분노인지, 자신이나 타인이 현재 느끼는 감정의 종류를 명확히 구분하고 이후 자신의 감정 상태나 대응을 분별력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에 적합한 감정을 잘 자아낸다는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할 때 필요한 전제, 상사나 부하와의 상호 작용(역할극)에 가장 효과적인 형태로 정체성을 규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현응 서울대 한국인적자원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이 한국인력개발학회에 게재한 '정서지능과 감정노동이 직무 소진 및 이직 의도에 미치는 영향: HRD 담당자를 위한 함의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정서지능이 직장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래 표와 같다. 정서지능과 심층 연기, 심층 연기와 개인적 성취감은 각각 양의 상관관계를 보였고, 정서지능과 정서적 소진은 음의 관계를 나타내 보였다. 정서적 소진은 번아웃의 척도. 정서지능에서 출발해 종국에는 이직 의도를 결정짓는 여러 요인들 간의 영향 관계도를 그리고자 했던 이번 연구의 결론은 아래 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표_출처: 정서지능과 감정노동이 직무 소진 및 이직의도에 미치는 영향: HRD 담당자를 위한 함의를 중심으로. 점선(회색, + 또는 -가 표시되지 않은)은 이번 연구에서 유의미한 관계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함

그렇다면 이 정서지능도 계발이 가능할까. 1990년대 후반 국내에서도 EQ (정서지능을 지수화한 것) 함양을 위한 다양한 학습 상품이 나오고 최근에는 각종 명상이나 심리치료 프로그램이 각광받는 것도 이러한 고민에서 나온 현상들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주로 어떤 나이대에서 발달이 이뤄지는지, 또한 미술 및 상담치료와 같은 사후적 대처방안 등에 연구의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정서라는 상호작용에 기반한 무형의 개념을 연구의 주제로 삼는 것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긴 하다.

나를 '기진맥진한 배우'로 만드는 직무환경

번아웃의 한 요인으로 꼽히는 정서지능이 자신이 끝없이 갈고닦아야 할 내공이라면,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환경적 요인도 분명히 존재한다. 직무스트레스 요인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크게 ⓐ 역할갈등 ⓑ 역할 모호성 ⓒ 역할과부하로 구분된다. 서울대 농산업교육과 양대현 박사의 논문(대기업 사무직 근로자의 직무스트레스 요인, 직무소진, 이직의도, 자기효능감 및 사회적 지지의 관계, 2019)에서 재인용한 각각의 정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역할을 부여하는 주체와 역할 수행자가 서로 맞지 않는 기대에 직면할 때 수행자가 느끼는 갈등 / 직무요구가 조직구성원의 개인적 기준과 가치, 직무 요건 등과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Kahn & Byosiere, 1992 / Rizzo et al, 1970
ⓑ 역할을 수행하는 환경이나 조건이 불명확하거나 조직 목표가 불분명함으로써 역할 수행자가 느끼는 심리적 부담감의 정도 / 조직 구성원이 직무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발생한다.

손태원, 2004 / 박수진, 2006; 주대진, 2010
ⓒ 난이도나 시간 부족으로 요구되는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뜻한다. 역할 수행자의 능력과 자원이 요구수준을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Walsh Taber & Beehr, 1980

논문의 연구 결과를 조금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연극을 하는 데 배역을 명확히 정해주지 않고, 무대의 크기나 관객 수, 조명의 위치 등 연극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도 제대로 공유하지 않고 게다가 연극을 하는데 필요한 시간 또한 부족하다면 아무리 명배우라 하더라도 심금을 울리는 연기를 펼치긴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 결국 적절한 리더십이나 인적자원개발(HRD) 프로그램이 개입해 왜곡된 무대를 바로잡아줘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양대현 박사는 위 논문의 결론에 다다라서 직무 소진은 직무스트레스 요인이 이직 의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매개 변인이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역할에 대한 명확한 지침과 책임을 부여하고 세부 기능 간 경계에 해당하는 역할의 모호함을 체계화해야 한다. 역할과부하를 줄이는 제도 설계, 근무환경 및 적절한 개입도 필요하다. 또한 대기업은 이직 의도에 영향을 미치는 직무 소진을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며 성과중심의 경쟁문화를 탈피한 인적자원의 존재가치를 인적 자본의 관점으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시장조사업체 엠브레인이 최근 출간한 ' 2021 트렌드모니터'에는 흥미로운 조사 결과 한 가지가 들어있다. 비대면, 재택근무가 확산하면서 직급이나 직위를 근거로 한 권위 체계도 재정립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사무실에서 누군가의 권위는 주로 그 사람이 발언을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쳐다보느냐'라는 것을 기준으로 평가받곤 하는데 이제는 자의반 타의 반으로 그 제한된 사무 공간을 벗어나게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 권위자는 타인의 시선이 배제된 채 각종 통신 수단을 통해 1대1로 소통하는 대상으로 인식될 뿐이다.

이는 직원들이 선호하는 리더십의 변화로 이어진다. 코로나19 이후 리더십에 대한 태도를 묻는 엠브레인의 조사(각 질문별 동의 여부를 묻는 방식)에서 "코로나 시대 이후 사람들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리더를 더 잘 따르게 될 것 같다"라는 항목에 대한 동의율이 78.7%에 이르렀다. 직장인의 무대가 사무실 밖으로 이전하면서 나타나게 된 변화상이다.

출처엠브레인, 2021 트렌드 모니터

돌이켜보면 이전까지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결정짓는 용어로는 처세술이나 아부, 라인 타기, 복종과 같은 키워드가 자주 언급됐다. 타인의 권력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개인의 지위나 성취(평가) 정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이는 제한된 업무 공간에서 권위와 지위가 높은 상급자를 대할 때 자신의 감정은 그저 내려놓고 그 윗 사람의 마음만 살피면 된다는 인식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경영 환경이 급변하는 4차 산업 혁명기, 게다가 팬데믹이라는 예상치 못 한 외부 효과까지 떠안고 있는 이 불확실의 시대에 직장인은 자기 내면의 안정(정서지능 함양)을 찾는 것으로 대응하려 한다. 한편으로는 명확한 역할과 정확한 경영 정보를 제공할 업무 환경, 조직 체계, 리더십을 바란다. 그것이 무기력한 직장인으로 지내다가 끝내, 이직으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똑똑했던 우리가 끝내 투덜대는 무기력한 직장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런 노력이 엇나갔기 때문일지도...

인터비즈 김재형
mona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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