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버리고 스타트업에서 존버하는 이유

조회수 2020. 6. 29. 17:2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 인터비즈가 직장인이 공감할 만한 우리네 존버기를 전해드립니다. 4차 산업혁명기 직장에서 분투하는 각양각색의 삶을 소개하며 함께 힘내자는 의미의 글입니다. 그 첫 편으로 소개하는 이영래(드라마앤컴퍼니 빅데이터센터 리서치팀) 씨의 글은 기자가 1시간여 동안 그를 인터뷰한 뒤 마치 이 씨에게 빙의 된 듯(?) 써 내려간 수필 같은 기록입니다. 맨 아래 다음 존버기 주인공 모집 안내 배너에도 주목해주세요.

이제 제대로 된 시작이다. 7년을 존버하며 기반을 닦았다. 이젠 그 위에서 최소 7년은 신명나게 뛰어다녀야 남는 장사 아니겠나. 주식이 폭망해도 존버하면 오르듯, 나는 이날을 위해 존버했다.


-왜 거기서 존버하고 있냐는 질문에 이영래 씨가

"너흰 뭐 먹고살아?"

...는 '살아있는 게 용하다'와 동의어라 봤다. 7년 전 사업 초창기, 나를 본 사람들은 그렇게 물었고 나는 그런 식으로 해석했다. 세상의 시선이 그랬다. 실제로도 스타트업은 늘 생존에 위협을 받는 환경에 놓여있는 게 맞는다.

나는 그 험지에서도 질기게 살아남았다. 물론 그 대가로 정기(精氣)와 머리숱을 잃었다.(가슴이 미어진다.)비법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존버했을 뿐이다. 사실 존버는 나와 같은 보통 인간에게 적용되는 생존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을 쓰고 있을 뿐. 다들 나처럼 어딘가에서 존버를 한다. 다른 이의 존버기에 공감하고 또 위로받으면서 열나게 말이다. 그렇다.존버는 이 시대의 진리다.

오늘 내가 전할 이야기는 그들 중의 한 명이 써 내려간 생존 기록(記錄)일 뿐이다. 살아있는 이 시대 모든 이에게 나의 스타트업 존버기를 2회에 걸쳐 바치겠다. 응원은 거절, 악플도 비추. 그저 이렇게 존버하는 Nom(놈)도 있구나라고 생각해 주시길!


나는 영업(?) 뛰는 데이터 전문가였다

2014년 4월 나는 DBA이란 직책으로 드라마앤컴퍼니(리멤버 운영사)에 입사했다. 데이터베이스 관리자다. 물론 막 닻을 올린 스타트업에서 내 직무에만 맞는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당시만 해도 전체 직원은 10명 안팎. 90여 명이 붐비는 오늘날 사무실과는 딴판인 분위기였다. 그럴 때였다.

그때 내가 '명함 수거'를 자원한 것도 몇 안 되는 동료 중 내가 '차가 있는' 희소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그간 쌓아놓은 명함을 보내면 드라마앤컴퍼니 직원이 직접 사진을 찍어 리멤버에 등록해 주는 이벤트성 행사(2014년 몇 주간 시행)였다. 수거를 위해 출장을 갈 때 나는 '영업을 뛰러 간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리멤버를, 드라마앤컴퍼니를 알리기 위한 영업 말이다.

집안이 금수저라 차를 소유했던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으니 여기서 잠깐 곁가지로 빠지겠다. 지방에서 서울로 오신 분은 알 테다. 지방에선 차 없인 생활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이다. 서울에서 생활할 때 굳이 빚을 내서라도 차를 샀던 건 그때의 본능이 충실히 작동해서였다. 나는 구미 출신이다. 그 본능이 이런 식의 족쇄가 될진, 나는 몰랐지 그땐 몰랐지. 그래도 찬란했던 시절이었다. 나의 농업적 근면성이 빛을 발할 때였다. 아래 사진을 보시라.

출처: 이영래 씨 제공 ​

저기 시커멓게 탄 얼굴에 머리숱이 풍성한(ㅠㅠ), 빨간 동그라미가 처져 있는 게 나다. 잘생기고 못생기고 뭐 이런 걸 떠나 나에겐 청춘의 기록인 사진이다. 27살 꽃다운 나이였다. (외모 악플은 삼가주시길)

또 잠깐 삼천포로 빠지자면, 이 글을 쓰겠다며 최근에 나를 찾아온 기자가(저 사진을 먼저 본) 지금의 나를 보곤 이러더라. "*반갑습니다. 그런데 영래 씨는 어디에 있죠?" 제길!


*여기서 잠깐, 기자가 이 존버기에 뜬금없이 등장해 직접 해명하자면 머리숱과 체중을 떠나 지금의 영래 씨는 피부가 뽀얗게 변했고, 인자하신 풍미가 위 사진과는 전혀 딴판이었다는 사실을 전해드립니다. 또한 기자와 영래 씨는 1시간여가 넘는 인터뷰 시간 동안 서로가 동갑이라는 걸 알게 됐고 비슷한 신체적 격변도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서로 편한 '아저씨 사이(짬밥 먹으신 분들은 아는 걸로)'로 지내기로 했다는 점도 알려드립니다.

저 때다. 리멤버 고객을 일일이 찾아가 명함을 수거하고 사무실서 대신 명함 등록을 해주던 그때 말이다. 나를 포함해 차가 있는 직원 3~4명이 서울과 경기 지역을 큼지막이 나눠 하루 100여 km를 운행했다. 그때야 어떻게든 리멤버를 알려야 했기에 물불 가릴 게 없었다. 덕담을 해주는 고객도 있었고 우리의 생존을 걱정해 주는 분도 있었다. 진심으로 감사한 관심이었다.

근데 희한한 게 꼭 그렇게 영업을 뛸 때 사고가 나더라? 나는 평소 완벽한 드라이빙을 한다고 자신했다. 흔하디흔한 주차 중 스크래치도 한 번 내질 않았는데 꼭 영업을 뛸 때 사고가 났다. 한 번은 언덕길을 올라가려다가 앞 범퍼가 바닥을 처박고선 툭 떨어졌다. 고객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쪽팔리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근처 편의점에서 산 투명 테이프로 범퍼를 누더기 칠한 채 언덕길을 다시 올랐다. 마이클베이 감독이 이 장면을 봤다면 트랜스포머의 새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쏘다니고 다시 사무실에서 일하며 11시 퇴근을 밥 먹듯이 했다. 사고도 나고 몸이 지쳐도 이상하게 괴롭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생각이란 걸 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을지도 모르지. 생각을 하려면 시간도, 머리를 돌릴 에너지도 필요한 법이니깐. 그래도 에너지 소비 없이 저절로 드는 '느낌'은 자주 받았으니. 당시에는 그런 고단한 하루가 뭔가 신성한 행위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 온몸이 푹 늘어져서 집에 돌아갈 때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버텨라. 존버해라. 광명이 올 것이다." 너무 피곤해서 생긴 이명이었거나 아니면….

대기업 마다한 난 Crazy?

출처: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이영래 씨

이곳에 오기 전 사실 난 대기업 입사를 앞두고 있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법한 곳이다. 직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 새 회사로 가기 전 딱 마찰적 실업(摩擦的 失業) 상태였던 기간이었다. 최재호 대표는 그 미묘한 타이밍에 극적으로 등장했다. 아는 지인의 요청을 받아 드라마앤컴퍼니에서 틈틈이 개발 일을 도와줬던 게 연결 다리가 됐다.

"명함으로 연결되는 세상, 모든 비즈니스를 다 도와주는 '한국의 링크드인'을 함께 만들고 싶습니다. 비즈니스 포털을 꾸릴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필요합니다.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저 말이 왜 그렇게도 섹시하게 느껴졌을까. 최 대표의 진중함과 자신감? 물론 그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안에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서 거대한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어떤, 욕망같은 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일종의 호연지기라고 할까?

최 대표의 제안은 그것을 건드린 트리거였다. 전에 없던 새 영역을 개척하고 싶다는 내 안의 꿈틀거림이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대개는 속에 뭔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있는 분들이 스타트업에 가는 것 같다. 좀 미화해서 내 의견을 말하자면 그렇다는 소리다. (다큐로 받진 마시길.) 어쨌든 최 대표는 그렇게 나를 낚아챘다.

당시 대기업 대신 스타트업에 들어가겠단 전향적인 내 결정을 접한 부모님, 친구 등 주변의 모든 이가 말렸다. 리멤버나 드라마앤컴퍼니란 회사를 아는 사람이 이상한 때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밥 벌어먹고살겠냐"라고 핀잔도 받았다. 역시 이번에도 그놈의 밥타령이다(오해하지 마시길 밥은 중요하다). "참고하겠다고"만 했다. 왠지 밥벌이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덤덤하게 받아쳤다.

"내 갈 길은 내가 개척해"라던 'X세대', 형님 누님 세대의 저항 정신을 강조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냥 당시의 결정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어떤 절연한 각오와 다짐, 꼼꼼한 계획에 따른 결론이었다기 보단 물 흐르듯 그렇게 경로가 결정나 버린 느낌이랄까. 때론 그렇게도 살아갈 방향이 결정되나 보다 싶었다.


나는 문과 출신으로 존버했다

처음에는 이걸 말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다시 고민해보니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조금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대학 전공은 경영학이다. 요새 자조 섞인 표현으로 쓰이는 소위 '문과충'이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뼈부터가 문과인 사내였다.

그럼 코딩 공부는 어디서했냐가 궁금할 것이다. 군대에서 했다. 놀라신 분은 아마 군대에 개발병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나는 그 개발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3전 4기해서 공군에 들어갔다. 그러고보니 그때도 존버했다. 거기서 제대로 개발을 배우기 시작했다. 첫 취업도 당시 함께 근무한 선임병의 소개로 이뤄졌다. 군 생활을 흔히 '버리는 시간'이라 말하는데 적어도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꼭 나같은 경로를 택할 필요도 없다. 문과라고 해서 개발자, 데이터 전문가가 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존버할 의지만 있다면 어떻게든 방법은 생긴다. 반대로 이과 출신이라 해서 문과의 감성과 언어적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 존버는 위대하다.

기자에게 자신의 존버기를 설명해주고 있는 영래 씨

그 문과 출신 개발자가 지금 하는 일은 뭘까? '커리어(경력직 인재 검색서비스)'를 고도화하는 작업을 한다. 리크루터(recruiter)와 구직자를 적절하게 매칭하는 추천 알고리즘을 짜는 일이다. 따지고보면 이 일이야 말로 내가 개발병이 되고 대기업 대신 이곳에 들어와 지금껏 존버한 이유이다. 한국의 링크드인을 만들자고 했던 최 대표의 목표와 가장 근접한 서비스라 생각해서다. 군 입대와 드라마앤컴퍼니 입사라는 두 번의 변혁기를 거친 나는 지금 제대로 뛰어놀 무대에 올랐다.

그래서 요즘 내 스타트업 존버기는 2기로 넘어간 느낌이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생각은 에너지가 들어가니 느낌이라 쓴다) 7년 동안 수많은 동료가 이곳에 들어왔고 또 떠났다. 남은이와 떠난이, 그들과 지금껏 내가 해온 것은 진짜 하고 싶은 이번 일을 하기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을지도. 그래서 정기도 빠지고, 머리숱도 잃었지만 가슴은 더 쿵쾅거린다. 찬란한 두번째 봄날이 기다려진다.

▶ [2화]에서는 리멤버 서비스 확장을 앞두고 이영래 씨가 대대적인 리팩토링 작업을 했던 일명 '대미 프로젝트'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겨울철 강원 평창의 대미산 일대에 마련된 별장에 동료 개발자와 합숙을 하며 리팩토링에 매달렸던 이야기 입니다. 개발자,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서 스타트업에 일한다는게 커리어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영래 씨의 개인적인 의견도 소개합니다. 다음주 수요일에 네이버 비즈니스에 걸린 예정입니다.

인터비즈 김재형 기자 정리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