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盡人事"..조선 세종이 600년 전 대재난을 이겨낸 방법

조회수 2020. 3. 26.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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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동아비즈니스리뷰] 519년의 역사를 담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천변재이(재난)는 25,201건*에 달한다. 지진, 가뭄, 수해, 전염병… 흔히 천재지변, 자연이 만들어내는 재앙이라고 한다. 서글프게도 예나 지금이나 재난·재해는 반복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오늘날 우리도 국가적 재난 상황을 마주했다. 재난·재해들은 대부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대비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재난의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조선시대에도 매년 크고 작은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조선시대에 재난·재해는 왕의 부덕(不德)에서 비롯됐다고 여겼고, 많은 왕들은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왕이 있다. 세종대왕이다. 세종은 어떻게 재난을 예방하고 대비할 것인지, 재난이 발생한 후엔 어떻게 맞설 것인지에 관해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한 오늘날, 세종이었다면 과연 어떻게 대처했을까. DBR 272호에 소개된 기사를 통해 세종의 위기대응 프로세스를 살펴보자.


*이태진. (1996). 소빙기(1500 - 1750) 천변재이 연구와《조선왕조실록 - global history 의 한 장 -. 「역사학보」 149권0호, pp.203-236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盡人事, 진인사)

"천재(天災)와 지이(地異)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는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조치를 잘하고 못하고는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세종실록」 19년 1월 12일


세종이 재난 대비에 있어 가장 강조한 건 '예방'이었다. 예기치 못하게 다가오는 재난·재해들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에게 달렸다. 세종은 항상 솔선수범하여 재난에 경각심을 갖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자연스레 관리들도 재난 피해를 줄이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동아일보

세종은 사람이 하늘의 일을 알 수는 없더라도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남김없이 다 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소 작은 재난의 기미에도 즉각 대응해 국가 차원에서 필요한 행정 조치를 취했다. 큰비가 내리면 곧바로 침수 상황을 확인하고 수재 발생이 우려되는 곳을 점검하게 했으며 여러 날에 걸쳐 비가 내릴 때는 ‘반드시 수재(水災)가 있을 것이니 수문(水門)을 열어 물이 통하게 하고 관원들이 밤새 순시하도록’ 했다. 겨울 중 갑자기 날씨가 따뜻해지자 “강의 얼음이 얇아져 사람이 빠질까 염려된다. 각 나루터에서는 얼음을 깨고 사람을 건너게 하라"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사고 예방에 있어서 세종의 철저함은 빛이 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종은 흉년에 대비해 구휼 행정을 개선했다. 백성을 구하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도록 구휼미 사용에 재량권을 부여했으며 백성이 먹을거리를 찾아 식량이 풍족한 도(道)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했다. 세종은 풍년이 든 지역에도 진제소를 설치했는데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유랑민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출처: 동아일보
조선시대 관아에서 재판과 처벌을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국가 관리들의 역할도 중요시했다. 재난 발생 시 굶주리거나 병든 백성들의 현황을 관(官)에서 선제적으로 조사하도록 했으며 반드시 해당 고을 수령이 직접 다니며 확인하고 구제에 나서게 했다. 이런 책임을 다하지 못해 백성 구제에 실패할 경우 그 수령에게는 곤장 90∼100대의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세종실록에 "지곡산군수 유순도를 곤장 90대에 처하였으니, 능히 기민(飢民)을 구제하지 못한 까닭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관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대응을 펼치게 함으로써 재난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자 노력한 것이다.

최고 전문가를 최고 지휘관으로

"저쪽 도와 우리 도를 따지지 말고 주린 백성을 모아서 살리고, 오로지 감사에게 위임하여 진제의 잘하고 못함을 검찰하소서."

「세종실록」 19년 1월 2일


재난에 대비하고 신속히 대응한다고 해도 재난의 강도가 너무 세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개별 도나 군현의 역량만으로는 재난을 해결할 수 없어 국가 차원에서 개입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경우 무엇보다 컨트롤타워가 중요하다.


세종이 임금으로 즉위하고 18여 년이 지났을 때, 몇 년째 전국적으로 흉작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가장 심각한 지역은 충청도였다. 하지만 세종실록 「세종실록」 19년 1월 7일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충청도 창고에는 곡식이 남아 있었고, 필요하면 다른 도에서 곡식을 옮겨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사하는 백성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출처: 동아일보

세종은 아무리 천재지변이라지만 관청에 여력이 있는데도 굶어 죽는 백성이 많다는 것은 관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세종은 곧바로 안순을 충청도로 파견했다. 안순은 호조판서로 10년 넘게 재임하고, 판중추원사(조선 전기 중추원의 정2품 관직)로 재직 중이었다. 충청도 관찰사까지 지냈던 안순은 충청도 각 고을의 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고 충청도를 비롯해 전국 팔도의 각 고을, 중앙 각 기관의 재정 상태, 곡식 보유 상황을 훤히 꿰고 있었다. 즉, 신속하고 정확하게 구휼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최적임자였다.


세종은 안순을 파견하면서 다섯 가지 지침을 함께 내려보냈는데 그중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일을 편의대로 처리한 후 보고하라"고 명한 것이다. '선조치 후보고'의 재량권을 부여함으로써 지휘 체계를 확립하고 현장 중심의 능동적인 대응이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구휼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사람의 죄를 엄히 묻고 공을 세운 사람은 직급을 올려줄 수 있는 권한인 '상벌권'도 함께 부여하여 빠른 일처리가 가능하도록 했다.


사실상의 재상급 대신을 최고 구휼 책임자에 임명한 점도 짚어봐야 한다. 효과적인 구휼을 위해서는 충청도 전체를 지휘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도, 중앙정부기관의 협조도 이끌어내야 한다. 따라서 중앙의 삼정승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직급의 대신을 파견함으로써 권위를 확보한 것이다.


세종은 재위 기간 내내 지역 전문가를 중심으로 위기에 대응했다. 전염병, 기근 등이 심각해 해당 고을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는 그 지역 출신의 수령이나 관찰사를 임명했다. 혹은 해당 분야 업무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는 대신을 책임자로 임명해 재빨리 내려보냈다. 덕분에 피해를 조기에 수습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소를 잃었으면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보통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속담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일이 잘못된 뒤에 손을 써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재난 대응에 있어서는 소를 잃었으면 반드시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소를 잃어버리는 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동아비즈니스리뷰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8년 2월 15일 한성부에서 큰불이 났다. 경시서를 비롯해 행랑 116칸이 불타고 민가 2170호가 전소됐을 정도로 유례없는 대화재였다. 세종은 화재로 인해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부상자를 치료해주며 사망자에게는 장례비를 지원하도록 조처했다. 화재 방비책도 시행했다. 방화장(防火場)을 쌓고 도로를 넓게 확장해 불이 잘 번지지 못하도록 했다. 종묘와 궁궐, 종루 등 주요 지점에는 불을 끄는 기계를 만들어 비치했고, 화재 발생 시 각 기관별 대응 매뉴얼도 정비했다.


하지만 세종은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세종은 다른 재난과 달리 화재는 사람이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사람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피해를 예방하고, 또 줄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화재는 계속되고, 하늘에서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화재를 만일 하늘이 하는 짓이라 한다면, 어찌 숯을 피워서 불을 지를 리가 있겠는가. 지금 숯으로 불을 질렀다 하니, 이것은 사람이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이런 짓을 하게 하는 것도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어찌 무심히 있을 수 있겠는가. 도둑을 방지하는 방법을 연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세종실록」 8년 2월 28일


세종은 갑작스런 대화재가 발생하니 각 관청들이 우왕좌왕하며 방재 역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것을 파악했다. 따라서 흩어져 있는 업무를 한데 모아 평소에는 예방 업무를 담당하고,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즉각 진압에 나설 수 있는 전담 관청을 만들어야겠다고 판단한다.


이에 세종은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방화(防火)와 관련된 모든 부처를 집결시켜 유사시 일사불란한 대응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세종은 금화도감이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그 후 일어난 크고 작은 화재들은 별다른 피해를 남기지 않았다.


한 번 소를 잃었지만 외양간을 견고하게 고친 덕분에 더 이상 소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다. 철저한 예방과 준비, 매뉴얼과 전담기관에 의한 평시의 재난 관리, 재난 발생 시 컨트롤타워를 통한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 확립, 국가의 총력 대응… 세종의 재난 대응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272호

필자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인터비즈 조지윤 윤현종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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