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짜, 다이하드의 '이것', "미국의 아이콘"되다

조회수 2019. 10. 17.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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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터를 쓸 일이 없는 사람도 지포(Zippo)는 안다. 영화 속 주요 소품으로 자주 등장해서 친숙하다. 천장지구, 비트, 타짜, 다이하드 주인공이 수시로 꺼내드는 담배와 지포라이터는 마초 캐릭터의 클리셰였다.

지포는 언제부터 라이터의 대명사가 됐을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의 군수품으로 쓰인 덕분이다. 여기에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총알을 막아주는 행운의 상징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현대 마케팅 측면에선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일깨운 브랜드다. 기업이 어떻게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고 가꿔가는지 보여주는 좋은 케이스다.

영화 다이하드에 등장하는 지포라이터. 주인공 맥클라렌 형사는 이를 가지고 비행기까지 날려버리는데...

지포의 시작, "기존엔 상하분리형 라이터...어떻게 해야 사용하기 편할까?"

미국 출신 사업가 조지 그랜트 블레이스델(George G. Blaisdell)은 1932년 친구가 오스트리아제 라이터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당시 판매되던 오스트리아제 라이터는 크기가 커서 두손으로 사용해야했고 상하 분리형이었기에 뚜껑을 분실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얇은 메탈소재였기에 쉽게 찌그러졌다.

출처: pinterest
창업주 조지 그랜트 블레이스델의 모습

사용하는 이유가 궁금해 친구에게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냥, 불이 붙으니까 쓰는데?" 뜻밖의 단순한 대답에 놀란 블레이스델은 라이터가 좋은 사업 아이템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블레이스델은 오스트리아제 라이터의 디자인을 조금 더 '사용자 친화적'인 방향으로 개선했다.

바람이 불어도 불이 꺼지지않도록 막아주는 굴뚝 형태의 디자인은 남겨두고 외관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변형했다. 뚜껑엔 경첩을 달아 상부와 하부가 연결되어 뚜껑 분실 가능성을 줄였다. 이렇게 제작된 블레이스델의 프로토타입은 지포 라이터 디자인의 원형이 됐다.

출처: pinterest
블레이스델이 제작한 지포 라이터 프로토타입의 모습

결국 블레이스델은 1933년 미국 펜실베니아 브래드포드에서 지포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라이터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지포라는 브랜드명은 지퍼(zipper)에서 유래했다. 블레이스델은 지퍼라는 단어를 유독 마음에 들어했다. 당시 최고의 발명품으로 여겨지던 지퍼와 필적할만한 발명품이라는 뜻을 담아 발음이 유사한 지포를 사명으로 정했다.

성공적인 스토리텔링 마케팅...수백만 미군과 함께한 라이터, '기적의 아이콘'으로

1933년 첫걸음을 뗀 지포가 처음부터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었다. 사업 초기엔 하루 평균 2~3개 정도밖에 팔리지 않았다. 첫 달 판매량은 82개, 액수로는 고작 60달러 남짓이었다. 함께 일하던 직원들 월급도 챙겨주지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런 지포가 사업에 날개를 달기 시작한 건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다.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포하자 지포는 민간 판매를 중단하고 모든 물량을 군수품으로 납품하기 시작한다. 당시 군수품으로 채택된 모델은 지금까지 판매되고 있는 '블랙 크랙클(black crackle)'이다. 블레이스델은 미군에 약 3백만 개의 라이터를 공급했고 지포는 단숨에 '전쟁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수백만 명의 미군은 지포 라이터와 함께 전장을 누볐다. 이즈음부터 지포에 '남성의 상징', '미국의 아이콘'이라는 이미지가 녹아들기 시작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지포는 다시 대중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미 수백만 명의 미군이라는 탄탄한 고객층을 확보한 상태였던 지포가 국민 라이터로 등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포가 수백만 미군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제품의 '실용성'이었다. 지포 라이터는 물에 빠지고 난 후에도 불이 붙고, 비바람이 불어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담배를 피울 때 뿐만 아니라 전쟁중 식량을 데워먹기에도 유용했다. 이런 실용적인 측면과 더불어 지포와 관련한 전쟁 에피소드들도 인기몰이에 힘을 보탰다. 불이 쉽게 꺼지지 않는 지포 라이터를 폭발물에 던져 적장을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고장난 전투기 계기판을 지포라이터로 비추며 안전히 착륙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 수많은 무용담이 꽃을 피웠다.

이렇게 많은 에피소드들 중 지포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돋움시켜준 건 '1965년 베트남 전쟁' 에피소드다. 당시 미국의 육군 안드레즈 중사는 적군이 쏜 총알을 맞았지만 다행히도 상의 주머니에 넣어둔 지포 라이터에 박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미국 시사 잡지 '라이프(Life)'에 이 스토리가 실리면서 엄청난 파급력을 보였다. 실제로 지포 광고에 이 일화가 인용되기도 했다.

이를 접한 군인들은 지포 라이터를 '기적의 아이콘'으로 여기며 목숨을 지켜주는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 더불어 가지고 있는 라이터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름이나 그림, 출신 지방 등을 새기는 것이 병사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퍼졌다. 자신의 꿈이나 그리움에 관한 메시지를 새기기도 했다.

이처럼 하나의 강력한 스토리로 인해 지포 라이터는 그저 불을 붙이는 도구가 아닌 '수호신'의 이미지를 갖게 됐다. 이 때문에 여전히 지포 라이터는 성공적인 스토리텔링 마케팅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PPL, '딸깍', 디자인...지포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세 단어

지포의 영리한 브랜딩 전략 역시 성공 포인트로 꼽힌다. 공격적인 PPL(Prouduct Placement)을 통해 전쟁을 거치면서 얻은 남성적 이미지를 굳혔다. 자사 라이터를 남성의 상징으로 포지셔닝하기 위해 다양한 전쟁 드라마와 영화, 액션 장르물에 등장시켰다. 약 90여 년 동안 지포 라이터가 등장한 작품만해도 2000편이 넘는다.

지포 라이터는 인디아나 존스, 미녀 삼총사, 007 시리즈와 콘스탄틴, 캡틴 아메리카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모습을 보였다. 특히, 몇몇 영화에선 주요 캐릭터의 성격을 설명해주는 흐름상 없어서는 안 될 소품으로 사용됐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 등장하기도 했다.

'지포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딸깍'소리도 브랜딩에 활용됐다. 라이터를 열 때 나는 이 소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 뮤직 비디오, 공연 등에 음향효과로 쓰인다. 지포는 아예 지난해 미국에서 딸깍 소리에 대한 상표권을 얻었다. 딸깍 소리를 만들어내는 세밀한 제조 과정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출처: 버즈피드 유튜브 채널

지난해부터 지포는 딸깍 소리를 활용한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 콘텐츠 제작에 나섰다. 미국의 뉴스 및 엔터테인먼트 웹사이트 버즈피드와 파트너십을 체결한 지포는 버즈피드 유튜브 채널에 단독으로 자사 라이터를 활용한 ASMR 콘텐츠를 공개했다.

지포의 글로벌 마케팅 수석 브랜드 매니저 루카스 존슨은 "점점 성장하는 ASMR 커뮤니티는 유기적으로 지포 라이터를 그들의 세계에 포함시켰다. 그래서 지포 라이터의 소리 상표 등록 소식을 전 세계적으로 공유하기에 ASMR 커뮤니티가 가장 적합한 플랫폼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지포가 ASMR 세계에 발을 들인 후 국내서도 지포 라이터를 이용한 ASMR 영상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라이터를 '셀프 커스터마이징(self customizing)'할 수 있다는 점과 다양한 디자인으로 인한 폭넓은 선택권 또한 소비자들이 열광하는 요인이다. 베트남 전쟁 때부터 시작된 셀프 커스터마이징 열풍은 여전히 유효하다. 소비자들은 지포 라이터를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에 지포 홈페이지에서도 자체적으로 커스텀 서비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커스텀 전문업체까지 생겨났다.

또 지포는 꾸준히 영화, 애니메이션과 콜라보레이션을 하기도 하고 성년의 날 컬렉션, 할로윈 컬렉션 등의 갖가지 디자인을 선보이며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올 초엔 황금돼지의 해를 기념하는 한정판 라이터를 한국에서 단독 출시해 소비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기도 했다. 이렇듯 소장욕구를 자극하는 각양각색의 디자인 덕에 지포 라이터는 어느새 '수집품'으로 등극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만 400만명의 지포 수집가가, 전 세계적으로는 11개의 공식 수집 동호회가 활동 중이다. 국내서도 수천 명의 수집가가 활동 중인것으로 알려졌다.

승승장구 지포...금연 열풍에 위기감? 사업다각화로 돌파구 찾는다

지포는 업계 부동의 1위 브랜드다. 2012년엔 누적 판매량이 5억 개를 돌파했다. 지포는 이대로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을까? 시장을 둘러싼 상황이 심상찮게 변하고 있어 누구도 장담은 할 수 없다.

무엇보다 2000년대부터 거세게 분 금연 열풍에 특히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세계 흡연율은 2000년 27%에서 2016년 20%로 하락했다. 담배 퇴출 분위기와 맞물려 2005년부턴 라이터가 기내 반입 금지 품목에 포함됐고 최근 들어선 각국 정부의 담뱃세 인상까지 이뤄졌다.

2000년대 시작된 금연 열풍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에 지포라이터는 2012년부터 야외용 그릴, 히터, 손전등과 같은 아웃도어 제품으로 주력 사업을 변경하며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지포가 휴대용 칼 제조회사 WR Case & Sons와 이탈리아의 가죽제품 제조사를 인수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레고리 W. 부스 지포 전임 CEO는 "대중들은 지포하면 바로 라이터를 떠올릴 정도로 너무 인식이 뿌리박혀 있다"고 인정하면서 "다양한 발화용제품을 통해 이 같은 통념을 바꾸고 있다. 사람들이 꼭 담배를 피울 때에만 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인터비즈 임현석 신혜원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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