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방치? 양심 어디.." 결국 망한 일본의 '이 기업'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이 있다. 여러 말이 무리를 이루면 쉽사리 죽지 않는다는 의미다. 본래 바둑에서 쓰이던 말이지만, 경제/사회 용어로도 쓰인다. 재벌과 같은 대규모의 기업집단이 쓰러질 경우, 대량실업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므로 외부 지원 등을 통해 결국 살아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실제로 일부 재벌 계열사들은 덩치만 믿고 방만한 경영을 하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자동차 제조사 중 한 곳이었다가 퇴출 위기에 몰렸던 미쓰비시 자동차(Mitsubishi Motors) 역시 그러한 경우다.
미쓰비시(三菱) 그룹은 스미모토(住友), 미쓰이(三井)와 함께 일본경제를 좌지우지하는 3대 재벌 중 하나다. 1870년에 설립된 쓰쿠모상회(九十九商会)를 모체로 하며, 금융, 중공업, 전기, 유통, 보험, 에너지 등, 기업으로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관계사를 두고있다.
이 중 미쓰비시 중공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장갑차, 전투기, 군함 등 다양한 전쟁물자를 생산, 공급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기업 규모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토요타, 닛산 등의 의뢰를 받아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미쓰비시 중공업은 승용차 생산을 위한 기술을 축적하게 된다. 그리고 1960년에는 처음으로 자사에서 직접 개발한 승용차인 ‘미쓰비시 500’을 출시하게 이른다. 이 차량은 1962년에 ‘콜트 600’이라고 이름을 바꿔 후속 모델로 출시했는데, 이는 이후 미쓰비시의 대표 소형차로 자리잡은 콜트 시리즈의 시초가 된다.
재벌의 뒷심과 모터스포츠 마케팅의 힘으로 승승장구
승용차 시장이 점차 커지면서 미쓰비시 중공업은 해외 시장에도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이에 1970년에는 미국 크라이슬러와 합작 계약을 체결하고 자사의 자동차 사업부를 독립시켜 ‘미쓰비시 자동차공업’을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크라이슬러의 판매 채널을 통해 미쓰비시의 차량을 미국에 본격 출시하게 된다. 이렇게 안정적인 판매망을 확보하면서 미쓰비시는 ‘콜트’, ‘랜서’, ‘갤랑’ 등의 다양한 차량을 순조롭게 개발, 출시할 수 있었고, 국내외 시장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무렵, 미쓰비시 자동차는 모터스포츠에도 꾸준한 투자를 했다. 1974년,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자동차 경주 중 하나로 악명높은 사파리 랠리에서 미쓰비시의 ‘랜서’가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를 통해 미쓰비시는 브랜드 이미지를 단숨에 높일 수 있었다. 이후에도 미쓰비시는 WRC(월드랠리챔피언십)을 비롯한 랠리 경주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도전을 하며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1985년에는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미쓰비시의 ‘파제로’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미쓰비시 RV 차량이 우수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1991년에는 준중형 세단 랜서의 고성능 버전인 ‘랜서 에볼루션’의 첫 번째 모델이 출시된다. 랜서 에볼루션 시리즈는 뛰어난 성능을 과시하며 1990년대 세계 각국의 랠리 대회를 석권하다시피 했다. 랜서 에볼루션은 이후에도 성능을 강화한 신형 모델을 연이어 출시하면서 ‘고성능의 미쓰비시’를 대표하는 상징이 된다.
오만과 나태의 결과, 나락으로 떨어진 미쓰비시
위와 같은 대형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미쓰비시 자동차의 브랜드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소비자들은 미쓰비시 차량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경영이 악화되면서 기술진들도 연이어 회사를 떠났으며, 2010년대에 즈음해서는 제대로 된 신차개발도 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모기업인 미쓰비시 그룹에서도 미쓰비시 자동차의 미래에 회의를 느껴 지원을 거의 끊었기 때문에, 미쓰비시 자동차는 경쟁사인 닛산의 차량을 들여온 후, 배지만 바꿔 달아 미쓰비시의 차량으로 파는 등의 굴욕까지 겪어야 했다. 회사의 상징이었던 랜서 에볼루션도 2015년에 단종된다.
결국 2016년 5월, 닛산이 미쓰비시 자동차의 주식 34%를 인수하고 과징금을 대신 물어주는 방식으로 회사를 인수함에 따라 미쓰비시 자동차는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산하의 자회사로 편입된다. 그나마 브랜드는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수십년 동안 이어오던 독립 자동차 업체 미쓰비시의 명맥은 사실상 끊어진 셈이다.
미쓰비시의 몰락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다. 미쓰비시 자동차는 1970년대 현대자동차에 기술 제휴를 해준 업체다. 한국의 현대자동차는 당시 미쓰비시 자동차와 제휴해 다양한 기술을 들여온 바 있다.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라는 현대 포니 역시 엔진이나 플랫폼(뼈대)는 미쓰비시 자동차의 기술에 기반한 것이다. 그 외에 현대의 ‘쏘나타’, ‘그랜저’ 등도 초기 모델들은 핵심 기술은 미쓰비시의 것을 이용했다.
하지만 미쓰비시 자동차가 주춤하는 동안 현대자동차는 독자 기술 개발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고, 1991년에는 완전히 독자 기술로 개발한 엔진을 선보이는 등의 성과를 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양사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 판매량이나 상품성 등에서 현대자동차가 미쓰비시 자동차를 압도하는 상황이 되었다.
혁신을 잊은 기업의 운명
미쓰비시 자동차는 전쟁 중에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사세를 크게 확장했으며, 이후에도 모그룹의 막강한 기반 및 모터스포츠 관련 마케팅, 그리고 전에 없던 경제 호황을 등에 업고 고속 성장을 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기술 개발 및 새로운 분야 개척에는 극히 소극적이었으며, 사내 문화 역시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도 경영진들의 도덕적 타락이 심각했다.
결국 자신들의 과오로 인한 각종 사건사고가 연이어 터지면서 시장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으며, 굳게 믿던 모그룹에게도 사실상 버림받고 경쟁사에게 인수되기에 이르렀다. 2018년 현재, 미쓰비시 자동차는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 산하에서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된 상태이지만 예전의 전성기와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글로벌 기업간의 무한경쟁이 본격화된 이 시대에서 과거의 영광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구시대의 경영방식은 더욱 필요하지 않다. 어제의 도전자가 오늘의 승자가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때의 영광과 모그룹의 덩치만 믿다가 혁신을 잊은 미쓰비시 자동차의 몰락은 극명한 사례 중 하나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IT동아는 모든 독자에게 유용할 IT트렌드와 비즈니스 지식을 전하는 온라인 IT저널입니다.
인터비즈 임현석 정리
inter-biz@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