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쫓아내고 스마트폰 만들었지만 실패한 '이 사람'

조회수 2019. 9. 20.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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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컬리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것보단 관리와 마케팅에 더 큰 강점이 있었다. 애플에서 스티브 잡스를 쫓아낸 후 매킨토시1의 변종 모델과 IBM PC처럼 규격화된 제품인 매킨토시2의 출시를 지휘했다. 또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있던 개발부서를 일반적인 회사처럼 간결하게 통합해 업무 효율을 향상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적자에 시달리던 애플은 1986년 흑자전환에 성공한다.

스컬리는 애플과 결별했던 소프트웨어(SW) 회사를 설득해 매킨토시용 SW 개발을 추진하고, IBM 호환 PC가 장악하지 못한 틈새시장 공략에 집중했다. 이러한 전력이 성공을 거둬 애플은 IBM에 이어 컴퓨터 시장의 이인자 자리를 굳혔다. 미국 언론은 이를 두고 1989년부터 1991년을 매킨토시의 '첫 번째 황금시대'라고 평가했다.

21세기를 예언하다

하지만 스컬리에게 아이디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세상을 바꿀 혁신적인 아이템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는 포터블(Portable), 나아가 모바일이 바로 컴퓨터의 발전 방향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1989년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애플 최초의 노트북 '매킨토시 포터블'을 출시한다. 하지만 매킨토시 포터블은 너무 두껍고(두께 10cm) 무거웠으며(7.2kg), 형태조차 우리가 알고 있는 노트북보단 서류용 가방에 더 가까웠다.


1990년 스컬리는 더 가볍고 세련된 노트북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현대 노트북의 원형을 정립한 ‘파워북’이다.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도시바의 '노트북(노트북은 원래 도시바의 상표다)'의 무게는 3.6kg이었다. 파워북은 이를 2.3kg까지 낮추는데 성공했다. 또 화면, 키보드, 트랙패드(트랙볼 포함) 등을 인체공학적으로 배치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트북의 원형이 됐다.

출처: 위키피디아
애플의 파워북 150

파워북은 포터블 제품이라고 부를 순 있어도 모바일 제품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했다. 그는 더 작은 제품을 원했다. 컴퓨터와 대등한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우리 손에 쏙 들어오는 그 어떤 제품을.

출처: 존 스컬리 트위터
파워북을 들고 있는 젊은 날의 존

지식 안내자 > PDA > 스마트폰


잠깐 예전 얘기로 돌아가자. 스컬리는 1987년 자서전 '오디세이'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기기를 제안했다.


1) 하이퍼텍스트로 구성된 데이터베이스가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네트워크에 통신망을 통해 접속할 수 있어, 사용자가 자신이 원하는 정보에 언제 어디서나 접근할 수 있는 기기여야 한다.

2) 사용자가 정보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기기에 다양한 SW를 설치할 수 있어야 한다.

3) 언제나 휴대할 수 있도록 작고 가벼워야 하며, 배터리만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스컬리는 당시로선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이 기기에 '지식 안내자(Knowledge Navigator)'라는 이름 붙였다.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안내자가 되라는 의미에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스컬리는 고객들이 휴대하면서도 손쉽게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기기를 개발하고자 했다. 이 같은 아이디어를 지식 안내자라는 이름을 붙여 구체화하고자 했다

이듬해 애플은 사람들이 지식 안내자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홍보 동영상을 제작했다. 이 동영상에서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 개념뿐만 아니라 몇 가지 특성이 추가로 소개됐다.


4) 지식 안내자는 화면에 펜을 접촉함으로써 좀 더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이 펜을 이용해 글을 적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5) 사용자가 적은 글씨를 인식해 그것을 하이퍼텍스트로 바꿔주는 기능과 하이퍼텍스트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능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6) 펜으로 화면 속 아이콘을 선택하면 SW가 실행되는 등 직관적인 사용자 환경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식 안내자의 여섯 가지 개념을 요즘 용어에 맞춰 바꿔보자. 1) 인터넷에 접속해 다양한 정보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2) 앱을 설치할 수 있어야 한다. 3) 터치스크린을 통해 누구나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4) 음성 인식 등 다양한 부가 기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5)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고 가벼워야 한다. 6) 한번 충전하면 하루 종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스컬리는 지식 안내자가 현실화되길 원했다. 애플 내에 팀을 꾸리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기기 개발에 착수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지식 안내자 프로젝트는 애플 내에서 팀으로 꾸려졌고 1992년 CES에서 공개하게 된다

그 기기의 개발이 거의 완료된 1992년, 스컬리는 세계 최대의 가전박람회 CES의 기조 연설자로 나와 지식 안내자를 대신할 새로운 용어를 소개한다. 바로 '개인 정보 단말기(Personal Data Assistant)', 줄여서 PDA라는 용어다.


스컬리는 자신이 PDA의 창조자라고 주장하진 않았다. 이러한 개념에 부합하는 기기는 따로 있다. 영국 사이언사의 '사이언 오거나이저'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스컬리는 사이언 오거나이저는 지식 탐색보다는 SW 실행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애플이 출시할 PDA는 다를 것이라고 전했다. PDA의 목적은 정보 탐색이며 SW 설치 및 실행은 그 목적을 더 쉽게 이루게 해주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스컬리와 애플은 현대 PDA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제품인 '뉴턴 메시지 패드'를 출시한다. 뉴턴 메시지 패드는 PDA가 어떤 기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지 제시했다. PDA에 통신 기능을 강화한 것을 스마트폰과 태블릿PC라고 부르는 점을 감안하면, 뉴턴 메시지 패드가 두 제품의 원형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겠다. 뉴턴 메시지 패드를 고안해낸 스컬리가 스마트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다.

스컬리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뉴턴 메시지 패드 출시와 함께 뉴턴 메시지 패드의 근간이 되는 ‘뉴턴 운영체제’를 다른 회사들에게 공개했다. 뉴턴 운영체제로 실행되는 다양한 형태의 기기가 등장하길 기대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뉴턴 운영체제의 생태계는 더욱 강화되고, 궁극적으로 뉴턴 플랫폼이 탄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견이 조금 있지만, 최초의 모바일 운영체제 역시 뉴턴 운영체제라는 것이 정설이다.


스컬리의 두 가지 치명적인 실책


스컬리는 2010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애플 최고경영자(CEO)로 재직하면서 자신이 두 가지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음을 인정했다. 그 두 가지는 다름이 아닌 뉴턴 메시지 패드를 개발한 것과 인텔 대신 IBM의 CPU를 채택한 것이다.


먼저 뉴턴 메시지 패드부터 살펴보자. 스컬리의 꿈은 처음부터 엇나갔다. 뉴턴 메시지 패드가 말 그대로 '쫄딱' 망한 것이다. 지식 안내자의 개념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뉴턴 메시지 패드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하고, 필기 능력이 떨어졌으며, 배터리 사용시간이 짧았다. 뉴턴 메시지 패드가 지킨 것은 '휴대하기 편하다'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가격까지 비쌌다. 사용자들은 비싼 돈을 내고 뉴턴 메시지 패드를 구매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여러 제조사에서 다양한 형태의 뉴턴 제품군이 등장했지만 사용자들의 선택을 받는데 실패했다. 모두 사이좋게 망했다.


뉴턴은 왜 실패한 걸까. '너무 앞서 나갔다'로 요약할 수 있겠다. 당시에는 방대한 데이터의 집합(인터넷)도, 편리하게 앱을 설치할 수 있는 장소(앱스토어)도, 멀티 터치스크린도, 한번 충전하면 하루 종일 사용할 수 있는 배터리도 없었다. 기술은 20세기인데 꿈은 21세기이니, 현실과 꿈의 괴리가 큰 제품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몽상가 잡스를 쫓아낸 스컬리 자신이 현재 기술로 실현할 수 없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스컬리의 아이디어는 너무 앞서나갔다. 하지만 스컬리의 뒤를 이어받은 잡스는 이 같은 경험을 토대로 아이폰, iOS를 출시하는 등 애플을 세계 최고의 회사로 만들어낸다

두 번째 실책은 매킨토시용 차세대 CPU로 인텔의 CPU 대신 IBM의 파워PC CPU를 채택한 것이다. 1990년대 초 컴퓨터 시장은 이미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천하였다. 모든 소프트웨어가 인텔의 CPU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에 맞춰 출시되었다.


당시 스컬리와 애플은 매킨토시용 CPU로 인텔의 것 대신 아키텍처가 아예 다른 IBM 파워PC CPU를 채택했다. CPU의 아키텍처가 다르다 보니 소프트웨어 개발이 어려웠고, 이는 결국 매킨토시용 소프트웨어 부족의 원인이 되었다.


'윈텔'의 PC보다 시장점유율이 떨어지면서 개발 호환성도 없는 플랫폼이 탄생한 것이다. 스컬리의 이러한 결정 탓에 매킨토시는 대중화에 실패하고 10년 넘게 출판과 영상 업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만 이용하는 컴퓨터로 전락하게 된다. 애플은 2006년에야 비로소 IBM 파워PC 대신 인텔의 CPU를 맥에 탑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두 가지 실책 이후 스컬리는 애플을 경영하는데 흥미를 잃고 만다. 결국 1993년 애플을 떠나게 된다.


스컬리가 떠난 후 애플은 갖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적자에 시달리던 애플은 결국 예전에 쫓아낸 창업자 잡스를 CEO로 다시 불러들인다. 그다음은 우리도 잘 아는 얘기다. 애플은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성공가도를 걸은 후 세계 최고의 회사로 우뚝 선다. 스컬리가 애플을 떠난 지 20년이 흐른 뒤 애플과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통해 지식 안내자라는 스컬리의 꿈을 이뤄주게 된다.


노령에도 멈추지 않는 CEO의 꿈


거의 대부분의 책과 언론이 스컬리의 얘기를 여기까지만 다룬다. 하지만 뒷얘기가 더 있다. 스컬리는 애플을 떠난 이후 잠깐 정치계에 투신했다가 벤처캐피털을 설립하고 다시 실리콘밸리의 경영자로 복귀했다.

이후 스컬리는 여러 스타트업에 투자를 진행하다가 디지털 마케팅의 천재 데이비드 슈타인버그를 만나 2007년 함께 디지털 마케팅 및 데이터 분석 회사인 '제타인터랙티브'를 설립했다. 자신의 장기인 마케팅과 디지털을 결합한 영역에서 다시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제타인터랙티브는 설립된 지 7년 만에 1억 달러(1121억 원)가 넘는 매출을 기록했고, 10억 달러(1조1211억 원)이상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유니콘 스타트업(기업 가치가 10억 달러가 넘는 스타트업)이 되었다. 제타인터랙티브는 포브스가 선정한 가장 촉망받는 회사(2014)와 100대 분석 전문 스타트업(2015)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출처: 존 스컬리 트위터
오비 월드폰을 들고 있는 스컬리

현재 스컬리는 제타인터랙티브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오비 월드폰'이라는 스마트폰 제조 스타트업의 공동 창업자로 활약하고 있다. 70살이 넘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CEO와 창업가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인터비즈·IT동아
필자 강일용(zer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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