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현대, LG가 만든 '이것'..한국인의 삶을 바꾸다

조회수 2019. 8. 22. 09: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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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LG전자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다양한 시각의 관점이 충돌하지만, 이들 제조업체들이 20세기 한국인의 삶과 오랫동안 함께 하면서 생활상에 막대한 영향을 준 기업이라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정부는 생활사적 가치가 높고 시대상을 반영한 제품을 등록문화재로 인정해 관리하는데 이들 기업이 만들어낸 물건들이 여기에 다수 포함돼 있다. 이들 회사가 만든 제품을 보면 한국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살아왔는지, 한국 경제는 어떻게 발전했는지 드러난다. 그 자체로 기념비가 된 물건들, 기업이 만들어 문화재 반열에 오른 제품엔 무엇이 있을까?

삼성전자

반도체가 문화재? 한국 산업의 빅점프 가능케한 64K D램

삼성전자는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반도체 사업은 자본금을 잠식하는 천덕꾸러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포기냐 투자냐 갈림길에서 1983년 2월 삼성은 결단을 내린다. 삼성이 그룹 차원의 전폭적인 투자를 통해 글로벌 업체들과 경쟁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세상의 반응은? 냉담 그 자체였다. 인텔은 이병철 당시 회장을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꼬았다. 반도체 1개 라인에 1조 원이 필요했던 사업이었다. TV도 간신히 만들던 회사가 첨단산업으로 방향을 돌렸다는 게 글로벌 시장에선 우습게만 여겨졌다.

출처: 삼성전자
1983년 국내서 개발에 성공한 64K D램

1983년 12월 삼성반도체(현 삼성전자)는 한국 최초로 64K D램(전원이 꺼지면 저장한 정보가 사라지는 메모리) 개발에 성공했다.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거둔 성과였다. 일본서도 6년이 걸려 이룬 성과였으나 삼성은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제품 개발에 앞서 삼성 엔지니어들이 했던 노고는 지금도 회자된다. 일본 샤프전자에서 어렵사리 연수 기회를 얻었으나 제공되는 정보와 현장은 제한적이었다. 엔지니어들은 낮에 연수 현장에서 최대한 머리로 기억한 뒤 이를 저녁에 모여 외웠던 내용을 노트에 정리했다. 중요 설비의 길이는 발걸음수로 헤아린 뒤 메모로 정리했다.


삼성전자가 1983년 64K D램을 처음 개발했을 당시 세계 최고 반도체 업체와는 4년 반의 기술격차가 있었으나 1984년에 이 격차가 3년으로 크게 줄이더니 1989년에는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이른다. 1992년에는 64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 시장의 선두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현재삼성전자의 연간 영업이익 중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55%에 달한다.

출처: 1983년 12월 6일자 동아일보
세계 3번째 64K D램 개발 성공

한국 경제사에서 64K D램 자체 개발이 가지는 의미가 각별하다. 값싼 제품에 의한 대량 수출 모델이 한계에 부딪힐 때쯤 하이테크 산업으로 방향타를 돌렸고, 당시 판단과 엔지니어들의 노력이 오늘날의 한국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국내 산업사에서 이 반도체가 차지하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2013년 등록문화재 제563호로 지정했다.

LG전자(금성사)

"LG전자를 만든 제품"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문화재

한국전쟁 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1959년, 한국 전자사업의 효시와 같은 제품이 탄생한다. 바로 최초의 국산 라디오인 A-501(등록문화재 제599-1, 2호)이다. 당시 2만 환에 팔렸는데 대졸 사원 3개월치 월급에 해당했다. 출시 초기 비싼 가격 때문에 누가 살 수 있겠느냐는 조롱을 받았다. 게다가 품질은 미군 PX에서 나오는 것보다 못한 수준이고, 락희화학이 플라스틱 사업에서 성공을 거뒀는데 왜 전자사업을 벌이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출처: LG전자
A-501 라디오

재고창고 안에는 라디오가 무려 2000대가 방치돼 있었을 정도로 신사업은 죽을 쒔다. 내부서도 "전자사업에 투자할 돈을 넣었다면 이자라도 받았을 텐데"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1961년 한 금성사 직원이 밀수품이 너무 많아 국산 제품이 안팔린다고 정부에 하소연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정부가 밀수품 단속 정책을 시행하고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시작하면서 금성사가 기사회생한 것. 금성사가 최초로 수출한 품목도 바로 라디오였다. LG전자를 오늘날로 이끈 제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 마니아 금성사는 일단 저지르고 봅니다...최초의 국산 세탁기

근현대 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일까? 고된 가사 노동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세탁기, 음식의 신선한 보관을 가능케 한 냉장고, 종합 콘텐츠 사업을 열어젖힌 텔레비전 등... 현대인의 생활상을 바꾼 이 제품들이다. 국내선 LG전자가 전부 처음 생산해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출처: 출처 LG전자
최초 국산 세탁기. WP-181

흔히 백조세탁기(WP-181, 등록문화제 제562호)로 불리는 최초의 국산 세탁기도 금성사가 만들었다. 1969년 선보인 이 세탁기는 세탁과 탈수 기능이 분류돼 있다. 옷을 빤 다음에 탈수통에 옮겨담는 구조다.세탁용량은 1.8kg에 불과했다. 출시 당시 일본에서 세탁기 보급률이 70% 이르는 반면 한국서는 0.1%에 불과했다. 금성사는 시장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여기에 락희화학에서 만드는 세탁세제 하이타이를 판매하려면 세탁기 보급을 늘려야 한다는 판단도 있었다.


첫해 1500대를 예상 수요로 잡았으나 실제 생산대수는 195대에 불과했다. 이 역시 대기업 대졸사원 초봉 보다 두 배 이상 많은 5만 3000원 가격이 부담스러운 데다가 당시만 해도 여성이 손빨래를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여서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컸다. 결국 생산을 중단했다가 1971년 재개했는데, 이땐 고도성장과 도시화 분위기에 맞물려 판매가 급격히 늘어났다.

우물이 있는데 왜 냉장고가 필요해?...그래도 만든 금성사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GR-120 광고 사진

1965년 금성사가 만든 최초 국산 냉장고(GR-120)도 문화재(등록문화재 560호)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에는 음식을 식혀 먹는 용도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 역시 잘 팔리지 않았다. 이건 세탁기 보다 더 비싼 8만 5000원.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레박줄에 음식을 매달아 우물에 보관하거나 아이스박스를 이용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 역시 1970년대 들어서야 진가를 인정받고 판매에 속도가 붙는다. 금성사가 만든 최초의 국산 TV(VD-191)도 등록문화재(등록문화제 제561-1, 2호)다. 금성사가 내놓은 최초제품의 초기 시장 반응들은 대부분 미적지근했지만 TV만큼은 달랐다. 1966년 8월 내놓은 최초 TV는 수요가 워낙 많아 공개추첨을 거쳐 판매해야 할 정도였다.

현대자동차

국내 최초의 고유모델 차량 포니1도 문화재

전자산업 뿐만 아니라 자동차 기술과 관련해서도 전후 한국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좁은 내수시장의 한계 때문에 기왕 자동차 시장에 뛰어들려면 글로벌 시장을 노려야 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엔 이미 기술력을 인정받은 자동차 메이커들이 즐비했다.

출처: 현대자동차
한국 차산업 이끄는 현대자동차 정주영 명예회장이 1974년 독자 개발한 최초의 국산자동차 모델인 포니의 생산라인

현대차는 미국 포드자동차와 조립계약을 하고 1호차인 ‘코티나’를 선보이면서 국내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충분치 않았다. 현대차 경영진은 자체 모델 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현대자동차 설립자인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당시로선 거금인 120만 달러를 들고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차량 디자이너 주지아로를 찾아가 차량 디자인을 맡겼다. 포니1은 글로벌 시장에선 74년 10월 30일 개막된 토리노 국제모터쇼에서 첫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통해 한국은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자동차 독자모델을 개발한 국가가 됐다. 현대차는 포니를 통해 해외 업체들의 견제 속에서도 본격적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설 수 있었다.

출처: 동아일보 DB
포니1

자동차 산업은 고용과 관련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특히 큰 분야다. 포니를 통해 힘겹게 첫 발을 뗀 한국 자동차 산업은 오늘날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경제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기점이 된 포니1는 1990년 1월 단종될 때까지 국내·외에서 48만8847대가 팔렸다.


문화재청은 2013년 이를 등록문화재 제553호로 등록해 한국 자동차 산업의 역사를 기리고 있다.

인터비즈 임현석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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