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소득세 랭킹 1위 외식업계 풍운아, "실패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조회수 2019. 4. 29. 15: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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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도전한 역사죠.

성신제 지지스코리아 대표(70)는 한해 개인 종합소득세만 110억 원을 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였다. 한때 연매출은 수백억 원에 달했다. 그가 한국인 입맛에 맞춰 개발한 불고기 피자 등 신메뉴 덕분에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낯설기만 하던 피자가 한국의 대표 외식이 됐다. 업계 판도를 수차례 뒤흔들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사업은 실패였다. 무려 9번이나. 그 잘나가던 피자 프랜차이즈부터 치킨 사업이 실패했고 최근엔 컵케이크 프랜차이즈 사업도 좌초됐다.

출처: 인터비즈
(서울 강남구의 주택가에 위치한 자신의 컵케이크 작업실에서 휴식중인 성신제 대표.)

그럼에도 그는 실패가 불명예가 아니라고 말한다. 실패한 뒤에도 다시 일어나 도전을 반복했던 역사는 오히려 그에겐 훈장이다. 지금도 밀가루를 다루는 일이라면 자신있다며, 서울 강남구의 한 주택가 작은 부엌에서 컵케이크를 굽는다. 그는 결코 포기는 없다고 말한다. 무너질지언정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면 된다고 했다. 숱한 실패가 가르쳐준 교훈이라고. 그의 인생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국에 피자헛 들여온 외식업계 대부...매출은 수백억 원

사회생활 초반엔 승승장구했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수준급 영어 회화 실력은 그의 무기였다. 학창시절 몰몬교 선교사에게 배운 영어였다. 젊은 시절 계속 공부하는 게 목표였지만, 유학비를 마련할 수가 없어서 입사를 결심했다. 그의 첫 직장은 대기업 호남정유(현 GS칼텍스), 그중 사장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조직 내 핵심인력이었다. 대졸 신입사원 직원으로선 최고 대우에 비교적 업무도 수월한 편이었다고.

출처: SBS방송화면 캡처
(청년 사업가 시절의 성신제 대표.)

그러나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해외를 누비고 싶었던 그에겐 비서실 근무는 좀 지루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가 매력을 느끼는 일은 무역이었다. "수출에 종사하는 일이 애국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의 회상이다. 1976년 종합무역상사였던 삼화로 자리를 옮긴 이유다. 그러나 삼화는 1979년 대규모 부실채권이 발생하면서 무너졌다.


졸지에 회사를 나오게 된 성 대표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우여곡절 끝에 마련한 회사는 주방용품 수출 회사였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주방용품을 대량으로 살 것 같은 회사들을 수소문하고 찾아다녔다. "30대 중반 젊은 나이여서 그저 막무가내였죠. 대뜸 찾아가서 우리 물건 좀 보라는 식이었어요"

출처: SBS방송화면 캡처
(청년 시절 성신제 대표)

미국 피자헛 본사를 찾아간 것도 이 무렵이다. 본사 로비에서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던 성 대표는 백인 손님들은 사무실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동양인을 차별하느냐고 항의하자, 로비 직원은 "저 손님들은 프랜차이즈 가게 오너"라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본사와 함께 사업하는 동업자인 만큼 사무실도 쉽게 드나들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 말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옳거니, 프랜차이즈 오너가 되면
피자헛 납품이 쉬워지는구나'

그가 피자헛을 운영하던 미국 펩시코인터내셔널에 한국 지사를 설립하겠다고 신청서를 내민 이유다. 당시 국내 대기업들도 피자헛 외식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때였다. 성 대표는 미국서 사업권 계약을 위한 면접 당시 "한국법인을 맡게 되면 오너인 내가 직접 주방 청결을 확인하고, 일일이 관리하겠다"고 공언했다. 다른 대기업들이 하지 못할 약속이었다.

그가 1984년 한국 피자헛을 들여오기까지 스토리다. 이태원에 1호점을 내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피자라는 메뉴는 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낯선 이국 음식에 불과했다.


"당시 한국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외식을 할 수 있는 음식점이라곤 갈비집 정도였어요. 게다가 서구식이래봤자 햄버거 하나 뿐이었죠. 가족들이 즐길 수 있는 가격대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즐길 수 있는 식당을 만들면 성공하리라 봤어요."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한국피자헛 매출은 1990년대 500억 원대를 돌파했고, 매장수는 52개까지 늘어났다. 외식업계 대부로 알려진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직접 매장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운영상황을 파악했고, 저돌적으로 사업을 확장시키는 경영인이었다. 서울 양재동에 100평 대 빌라를 소유하고 있었고,역삼동에도 88평대 빌라가 또 있었다. 성공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1993년 미국 펩시코인터내셔널에서 한국서 직접 사업을 펼치기로 결정하면서 그의 성공가도에도 제동이 걸렸다. 미국 본사 측에서 상표권 분쟁까지 벌이겠다는 뜻을 밝히자 피땀으로 일군 피자헛의 전국 판매망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빼앗기다시피 결국 한국 피자헛의 지분을 모두 양도했다고. 별다른 실수나 잘못은 없었지만, 그의 입장에선 씁쓸한 퇴각이었다.

개인 종합소득세 랭킹 1위...이내 찾아온 실패의 덫

당시 매각 대금은 320억 원 수준에 달했다. 다른 일을 하지 않고도 편히 살 수 있었던 액수였다. 피자헛 지분 매각 당시 개인 종합소득세는 110억 원에 달했다. 해당 분야 랭킹 1위였다.

출처: 동아일보DB
(2000년대 초중반 그는 성공한 외식사업가로 방송에도 자주 출연했다. 가장 오른쪽 인물이 성신제 대표)

안주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1996년 치킨 사업에 나섰다. ‘케니로저스’라는 브랜드였다. 그는 브랜드명과 같은 이름을 한 미국 컨츄리 음악 가수와 의기투합했다. 그는 자신의 경영능력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미국에서 이미 잘 나가던 브랜드를 들여와서 쉽게 돈을 벌었다는 평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케니로저스를 글로벌 브랜드로 키운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자금난 때문에 도산했다. 투자를 약속한 미국 가수 케니 로저스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투자 요청엔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에게 큰 좌절과 상처를 남긴 실패였다.

결국 제가 잘 하는 일로 돌아왔죠.
저를 내쳤던 피자헛과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에겐 한국인 입맛을 더 잘 분석한다는 자부심이 남아 있었다. 해외의 유명 피자집에 가서 주방을 훔쳐보고, 돌아와 하루 수 십장씩 피자를 구우며 절치부심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브랜드가 ‘성신제 피자’였다. 자연 숙성된 반죽과 가급적 기름을 쓰지 않는 조리 방식을 통해 '담백한 피자'라는 이미지를 앞세웠다. 웰빙 트렌드에 발맞춘 변화였다. 2000년대 초반 매장이 22개까지 늘어났다. 캐치프라이즈는 '피자 독립선언'이었다. 피자헛을 의식한 문구였다.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의 변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케니 로저스 프랜차이즈 사업을 정리할 당시 한 회사에 20억 원 채무를 지고 있었어요. 이를 전액 상환했는데, 성신제피자 사업이 잘 나갈 무렵인 2000년대 중반 다시 상환 요청이 왔어요. 이미 다 갚았다고 생각했으니 의외였죠." 성 대표에 따르면, 해당 업체로부터 불어난 이자에 대해서만 상환했을 뿐이고 원금을 갚지 못했으니 이를 다 갚으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그 상환 요구액 규모가 76억 원이었다고 한다. 해당 회사는 론스타 계열사라고.


"14억 원을 주고 송사를 마무리했죠. 지금까지 제가 가장 후회하는 것이 사업을 하면서 회계 등 재무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거예요. 너무 앞만 보고 달린 겁니다." 그가 지금도 사업을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조언이다. 성신제피자는 자금난을 버티지 못하고 2007년 치즈공급업체인 그라노스에 인수됐다. 그러나 이후 피자시장 자체가 위축되면서 브랜드가 사라졌다.


성신제피자 경영에서 물러난 뒤 그는 직장암, 간암, 폐암 선고를 연이어 받았다. 두 번의 대수술을 거쳤다. 22차례의 항암치료를 견뎌내는 사이 재발한 당뇨와도 싸워야 했다. 급성심근경색까지 찾아왔다. 좌절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을 멈출 수 없었다.

도전, 당신의 삶을 사랑하는 방식...실패학 전문가의 메시지

출처: 성신제 대표

한국에 들여왔다. 그러나 미국 본사서 글로벌 사업 철수를 지시하면서 졸지에 매장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원래 지지스 본사 쪽에서 자금 지원을 해주기로 했는데, 더 이상 못해주겠다고 통보하더군요. 저도 무일푼인데 버틸 수 없죠."


한때 강남역 등에 큰 매장을 열었으나 이 역시 지금은 철수했다. 미국 지지스 본사에서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이겠다고 밝히고 배워왔던 컵케이크 만드는 기술은 그의 손에 남아 있다. 그는 서울 강남구 한 주택가에서 계속 컵케이크를 굽고 있다.

주저 앉을 수 없으니까,
결국 일어서야죠

그의 컵케이크 매장에서 그는 동네 꽃집에 납품하는 컵케이크를 굽고 있었다. 배달사원은 아내다. 동네 가게 등에 소규모로 납품하는 정도다. "지금은 자그마한 공방을 운영하는 수준"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날은 그가 머리 수술을 받은 뒤로 첫 출근일이었다. 몇달 전 접질러서 넘어졌고, 이때 머리를 다쳐 뇌에 피가 고였던 것. 며칠을 쉬어야 한다는 권고를 받고도 다시 컵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가게에 나왔다.


"산부인과 빼고 병원이란 병원은 다 가보네요" 그는 마치 유머를 던지듯 했다. 실패하고 불운이 겹친다고 낙담하고 있을 게 아니라, 오히려 이를 냉정하게 바라봐야 여유를 생긴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래야 재기의 발판도 마련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성신제 지지스코리아 대표)

어째서 계속 사업을 하느냐는 질문엔 "그게 나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좌절을 겪었다는 이유만으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사실 생각해보면, 한국피자헛 지분을 매각할 당시, 경영권만 넘기면 좋은 자리 하나 마련해 준다고도 하더군요. 그게 뒷방으로 물러나라는 소리거든. 근데 나같은 천성이 사업가인 사람한텐 안 될 말예요. 그냥 피자헛 지분을 털고나온 이유가 그거였어요. 전 일을 해야하는 사람이예요. 이렇게 또 나와서 내 일을 해야지."


그의 매장엔 가끔 젊은이들이 조언을 구하러 오기도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에 답답해하는 청년들을 보면서 그는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한국에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유독 큽니다. 낙오한 인간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니까요. 그러니 청년들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겁니다. 실패해도 괜찮아요. 1등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가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한때 그도 좌절을 겪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누군가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기 위해서 도전한 날들은 찬란했다고. 그 도전이 가치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도 젊은이들이 도전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도덕적인 해이로 인한 실패는 문제죠. 사실 그렇게 도덕적으로 흠결이 많은 실패가 우리나라에 너무 많았어요. 그러니 실패에 대해서도 나쁘다는 인식이 강해졌다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 사회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청년들의 실패에도 관대한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어요"


그가 남들은 숨기기 바쁜 실패담을 공유하는 것도 실패를 용납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창의적인 생각들이 나오고, 새로운 비지니스도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하다.

넘어지면 일어나면 됩니다.
인터비즈 임현석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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