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항공사는 왜 '투톱' 체제가 됐을까?

조회수 2019. 5. 2. 20: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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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한국에서 가장 이슈가 많은 업계를 꼽으라면 역시 항공운수업계다. 대한항공을 이끌어온 조양호 회장이 16일 타계했고, 대한항공과 오랜 세월 항공운송 투톱을 이룬 금호아시아나(이하 아시아나)도 경영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매각 절차를 밟게 됐다. 이를 저물어가는 양대 항공사 구조를 상징하는 장면처럼 여기는 시각도 적지 않은 듯하다. 항공정책이 빠르게 변하고, 저비용항공사(LCC)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시장 상황이 크게 요동치고 있어 양대 항공사 체제를 위협하는 분위기다.

출처: 동아닷컴
(투톱 체제였던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혹시 언제부터 국적 항공사 체제가 투톱이었는지 기억하시는지? 대한항공은 이름부터 국적항공사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는데, 그럼 아시아나는 어떻게 국적항공사가 된 것일까. 아시아나항공 역사를 보면,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변화상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서울 올림픽과 함께 시작된 아시아나의 역사

대한민국 항공산업은 아시아나의 등장 이전까진 대한항공 독점 체제였다. 한진그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1969년 당시 국영항공사(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면서 항공운송사업에 뛰어들면서 독점 체제가 형성됐다. 한진그룹의 사업 수완이 빛을 발했던 점도 있었거니와, 운수 독점권이 성장의 핵심 동력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1국 1항공사 체제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글로벌 운송의 핵심 자산으로서 항공산업의 가치가 컸던 만큼 자국 산업을 전략적으로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이와 같은 정책적 수혜를 한국에선 대한항공이 받았던 것이다. 당시엔 자국기 보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산업적 이익이 더 크다고 봤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선 글로벌 차원에서 1국 1항공사 체제에 균열이 생긴다. 항공산업의 규제가 풀리고, 냉전 화해 무드 등으로 전 세계적으로 글로벌 관광 수요도 더불어 확대된 것이 계기였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복수 항공 허용으로 정책노선을 선회하면서 한국도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대한항공이 빠르게 성장하는 가운데, 항공료 인상 등 민감 이슈와 관련해 독점을 견제할 만한 요소도 없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었다. 1980년대 들어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고, 한국으로 관광 오는 수요는 늘어났는데 대한항공 독점 체제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여론 등이 형성됐다.

출처: 아시아나항공 공식 홈페이지
(과거 아시아나 항공기의 모습. 현재는 디자인이 바뀌었다.)

제2민항사 도입을 발표한 것은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8년 2월 12일이다. 금호그룹이 제2민항사로 선정됐는데, 전두환(1980.8.27~1988.2.24) 당시 대통령이 12일 뒤 인가를 내줬다. 자신의 퇴임을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 금호그룹은 당시 재계 20위권 업체였다. 당시 교통부가 밝힌 제2민항사 선정 원칙으로 대재벌은 제외하고, 운송 사업 경험이 풍부한 업체를 뽑았다는 설명을 달았다.

금호고속을 발판 삼아 성장해온 이 회사가 명실상부 그룹사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1946년 고 박인천 사업주가 나주에서 택시 2대로 시작한 회사였다. 1960년에는 금호타이어를, 1971년에는 금호석유화학(前 한국 합성고무공업)를 설립하며 발판을 넓혀오던 회사였다. 교통부가 밝힌 원칙에는 부합하는 회사였지만, 제2민항사 선정 당시엔 여러모로 뒷말들이 적지 않았다.

출처: 동아일보
(1988년 2월 12일 동아일보 3면 기사, 민항 다원화 시대가 열린다는 내용으로 금호그룹의 항공운수 사업 참여를 소개하고 있다.)

우선 전 전 대통령이 퇴임 직전 인가를 결정했을 정도로 급박하게 결정이 이뤄진 점, 교통부가 제2민항사 선정 등을 경제 부처에 사전에 통보하지 않고 공식 발표를 통해서만 알린 점 등이 의구심을 자아냈다. 이를 두고 '전 대통령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의식하고 퇴임 후 호남 민심을 달래기 위해 호남을 근거지로 둔 금호그룹에 특혜를 준 것이 아니냐', '내놓을 만한 호남기업이 없다는 현실을 감안한 것이 아니냐'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실제 사업을 시작하자 논란이 무색하게 비교적 빠르게 사업을 안정화시키며, 항공운수 분야의 강자로 빠르게 발돋움했다. 박인천 창업주의 장남으로 당시 그룹을 이끌던 박성용 당시 회장의 경영능력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출처: 아시아나항공 공식 유튜브 채널 캡처
(국내 첫 취항 기념식의 모습)

1988년 2월 17일 금호그룹은 서울 항공을 출범했고, 같은 해 사명을 아시아나항공으로 바꾸고 12월 첫 국내선을 취항했다. 취항 후에는 한동안 보잉 737 한 대로 국내선 전 노선을 커버했으나 이듬해 제주 노선 취항과 함께 기체를 추가 도입하기 시작한다. 1989년 정부의 해외여행 자유화 시행 및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차별화 경쟁으로 90년대 국내 항공업계는 황금기를 맞았다.

당초 정부는 아시아나항공에 제2민항 면허를 줄 당시 국적항공사간의 과당경쟁으로 인해 국제경쟁력이 약화되는 폐단을 막기 위해 국제선 취항가능 노선은 한일노선 및 한미노선으로 제한키로 했다. 그러나 아시아나는 경쟁을 통해 민항사 서비스질을 높여야 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노선 제한을 축소하는 데 성공했다. 초반부터 본격적인 양강 체제를 만든 것이다.

이를 발판 삼아 금호아시아나의 사세도 빠르게 확장했다. 금호그룹은 박인천 창업주에서 장남인 박성용, 둘째 박정구 회장으로 이어지는 그룹 경영을 거치면서 재계 10위권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 대한항공과 차별화되는 서비스를 선제적으로 선보이면서 항공운수산업의 서비스 질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매출은 연결기준 7조1800억 수준에 이른다. 13조 원이 넘는 대한항공과 차이는 있지만, 취항 노선 등을 다변화하면서 격차를 좁혀왔다 .


외환위기 넘기고 경쟁 거치며 대형 항공사로 성장, 모범사례로도 꼽혔지만...

아시아나는 1990년대 호황기를 맞이했으나, 항공운수산업의 특성상 위기도 적지 않았다. 1993년 전남 목포 아시아나 항공 733편 추락 사고와 97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 위기가 대표적인 예다. 항공기 숫자를 50대에서 42대로 줄이고 항공노선을 감축하는 등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내놓았지만 인력 문제에 있어서는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아시아나가 선택한 방안은 '안식휴가제'였다. 입사 1년이 채 되지 않은 직원 640여 명을 정리해고하는 대신 1년 동안 장기 무급 안식휴가를 가도록 조치한 것. 이런 아시아나의 안식휴가제는 노동부로 부터 IMF위기극복 모범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출처: 아시아나항공 공식 유튜브 채널 캡처

외환위기를 넘긴 항공업계에 분 바람은 바로 '동맹체 형성'이다. 1997년 에어캐나다, 루프트한자, 타이항공, 유나이티드항공, 스칸디나비아항공의 5개 항공사가 모여 설립한 '스타얼라이언스'를 시작으로 '원월드(창립 항공사: 아메리칸항공, 영국항공, 케세이퍼시피항공,콴타스항공), '스카이팀(창립 항공사: 대한항공, 아에로멕시코, 델타항공, 에어프랑스)가 연이어 설립됐다. 이들은 항공사 간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코드쉐어(공동운항), 공동 마일리지 프로그램, 라운지·체크인카운터 공유와 같은 혜택으로 고객 충성도를 확립했다. 아시아나는 2003년 '스타얼라이언스'에 13번째로 이름을 올리며 글로벌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1996년부터 회사 경영을 맡았던 박정구 회장이 2002년 병사하면서 그룹사 경영권은 셋째인 박삼구 전 회장으로 넘어오게 된다. 박 전 회장은 1991년부터 아시아나항공 대표로서 경영 능력을 발휘해온 인물이었던 만큼 업계에선 기대감이 크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승자의 저주에 빠진 모기업...결국 아시아나가 직격탄 맞아 31년 만에 금호 품 떠나

출처: 동아닷컴
(박삼구 전 회장)

박 전 회장은 전형적으로 공격수 스타일의 경영인으로 손꼽힌다. 그룹사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과감한 인수합병을 통해 기업의 사세를 키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2006년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던 금호아시아나 그룹은 박 전 회장의 뜻에 따라 항공과 타이어를 글로벌기업으로 육성하며, 석유화학과 금융을 기반으로 건설을 주력 업종으로 키우고자 했다. 당시 시공 능력 2위로 평가받던 대우건설이 시장에 매물로 나오자 박 전 회장은 인수에 성공했다. 2008년엔 대한통운까지 인수하면서 한때 재계 서열 7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에 유동성 문제를 겪으면서 결국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비롯해 주력 계열사를 잇따라 매각해야만 했다. 최근엔 그룹의 성장 발판이나 다름없던 금호타이어도 떨어져 나갔다. 결국 현재 재계 순위도 25위까지 떨어졌다.

그럼에도 경영 악화 일로를 겪던 금호아시아나는 그룹 자산의 60%를 차지하는 핵심 계열사인 금호아시아나도 매각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금호산업이 15일 이사회를 통해 채권단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아시아나항공 지분 33.47%을 매각하는 내용을 담은 수정 자구안을 의결한 것. 금호그룹이 아시아나 매각 결정을 내린 이래, 15일부터 이틀간 아시아나항공과 금호산업, 에어부산, 아시아나IDT 등이 일제히 상한가를 기록했다. 박 전 회장의 신용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시아나 매각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풀이된다. 올해 갚아야 할 돈만 1조 3000억 원에 이르지만, 이를 자체적으로 마련할 방편을 찾기 어려웠다. 매각이 이뤄질 경우 금호그룹의 재계 순위는 60위 권으로 밀려난다.

이번 매각 결정은 앞선 자구안이 거부된 데 따른 것이기도 하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지난 10일 채권단에 박 전 회장 일가의 지분(140억 원 수준)을 추가 담보로 제공하는 조건을 내걸었으나, 싸늘한 반응만 돌아왔다. 박 전 회장이 자신의 지분을 걸고 기회를 달라고 했을 때 나온 채권단의 반응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뭘 했느냐"였다. 30년 가까이 아시아나를 이끌어온 박 전 회장의 실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한 마디다.

한편 박 전 회장은 16일 오전 사내 게시판을 통해 임직원들에게 아시아나항공 매각에 대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키로 했다"라며 "면목없고 민망한 마음"이라고 사과했다.

인터비즈 신유진, 임현석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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