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벌, 감옥 다녀오면 "꼭 한다"는 이것
지난해 10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경영일선에 복귀한지 보름만인 23일 소위 '통큰 결정'이 나왔다. 롯데가 향후 5년간 국내외 전 사업분야에 걸쳐 50조 원을 신규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신규 고용은 7만 명 수준이다. 올해에만 12조 원을 투자키로 했는데 이는 롯데그룹 역사상 최대 규모 투자액이다.
데자뷰가 스친다. 앞서 롯데는 2016년 10월 경영비리 관련 검찰수사가 끝나고 신 회장이 기소된 시점에 5년간 40조 원 투자 및 7만명 고용을 약속한 바 있다. 이번에도 대법원 최종심을 앞둔 비슷한 시점에, 비슷한 규모의 투자 계획을 재차 밝힌 셈이다.
재벌이 사회적으로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시각도 존재하는 반면, 총수의 대법원 최종심을 앞두고 내놓은 보여주기식 '재탕' 계획에 그친다는 해석도 있다. 한편으로는 총수 부재 기간 동안 의사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한번에 중요한 결정이 물밀 듯 터져나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투자 계획 내용을 살펴보면 재벌이 정치권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뚜렷해 보인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의식하는 것이든,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든.
통큰 결정은 오너 구하기?...정부의 구걸 논란도
외신 로이터의 반응을 보자. 로이터는 롯데의 대규모 투자계획이 '일종의 제스처'라는 전문가 발언을 담았다. 무슨 제스처? 한국 기업들이 정부 정책에 호응한다는 뜻을 밝히는 메시지라는 것. 감옥에 다녀온 총수가 대규모 투자계획을 밝히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패턴이나 다름없다는 해석이다. 이는 대규모 투자계획이 오너를 구하기 위한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담겨져 있다.
이번 롯데의 대규모 투자계획을 두고 삼성과 현대차그룹 등이 밝혔던 투자계획과 닮은꼴이라고 봤다. 최근 정부가 일자리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화두로 내걸었는데, 이 취지에 맞춰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는 설명과 함께.
투자 계획은 기업의 미래 보다는 정부 눈치 보기와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다. 특히 재벌 총수가 부정적 이슈에 연루될 때 투자 계획을 밝히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삼성은 올해 8월 향후 3년간 180조원을 신규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이는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 2월 항소심 집행유예 석방 이후 이뤄진 결정이었다. 대법원 최종심을 앞둔 시점이어서 역시 여러 해석을 낳았다.
당시 삼성의 대규모 투자계획 발표는 정부가 내용을 전달받아 기획재정부에서 공식발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방향을 틀어 삼성이 직접 발표하는 것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정부가 삼성에 SOS를 보내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어 부담감을 느꼈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재용 부회장의 대법원 최종심이 진행중이어서 정부가 발표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정부가 기업에 '구걸'한다는 논란도 일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당시 "기사에서 인용된 일부 표현(구걸)은 적절치 않다"라며 불쾌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개별 기업의 투자계획과 정부는 무관하다는 설명이었지만, 대규모 투자계획안을 보면 삼성이 정부의 정책방향을 강하게 의식했음이 드러난다. 삼성은 해당 계획안에서 문재인 정부가 주창해온 상생협력과 동반성장 키워드에 맞춰 중소기업 판로 개척 및 지원 등의 방안을 담았다.
투자액 중 상당 부분은 시설 투자이나, 계획안 제목 등에는 일자리 창출이라는 키워드가 더 부각됐다. 삼성은 당시 4만 명을 직접 채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향후 5년간 청년 1만 명을 대상으로 소프트웨어 교육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삼성은 실제로 이를 시행하기 위해 '삼성 청년 소프트웨어 아카데미'를 최근 설립했다.)
수감되면 투자 계획 중단...총수 유불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눈총도
수감 이력이 있는 역대 주요 재벌 총수들 또한 석방 이후 발빠르게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최태원 SK 회장은 2015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출소한 지 사흘만에 SK그룹 확대경영회의에서 반도체 등에 46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이재현 CJ그룹 회장 역시 횡령으로 대법 파기환송심에서 최종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수감생활을 하던 중 2016년 8월 지병 악화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고, 지난해 복귀를 공식화하면서 2020년까지 36조 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외신은 롯데 신 회장 또한 석방 이후 발빠르게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고, 정부의 일자리 확대 기조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점에서 앞선 투자 계획들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본 것이다. 롯데 측은 "투자계획은 이전에 세운 것이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계기"라고 설명했다.
재벌 총수와 주요 그룹이 대규모 투자 계획과 맞물려 사회적 기여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환영할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의심의 눈총을 던지는 이들이 적지 않다.
롯데의 경우, 3년전 40조 원 투자 계획을 내놓고도 총수 수감 국면에선 투자, 채용 계획을 제대로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신 회장은 재판 과정에서 "국가 경제를 위해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석방 이후 투자 확대 결정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수순들을 보면 결국 대규모 투자 계획과 집행을 총수 신변과 연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총수 유불리에 따라 투자를 진행하고 중단하면서 흥정의 대상처럼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비교적 투자계획을 예정대로 착실하게 진행하는 기업은 전화위복의 계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 비판은 배가 되어서 돌아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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