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반의 "첩"이 맡았다던 이 일..

조회수 2019. 7. 20. 17:3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DBR/동아비즈니스리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유래를 알고 있는가? 기원전 33년 중국 한나라 원제 때 일이다. 당시 궁에는 수많은 여인이 있었고 왕은 초상화를 보고 여인을 골랐다. 당연히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이 권력을 가졌고 간택을 원하는 여인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바쳤다. 그런데 중국 천하의 미인 왕소군(王昭君)은 뇌물을 바치지 않아 못생기게 그려졌고 당연히 간택이 되지 않았다.

(똑같은 왕소군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인 듯 그려졌다. 왕소군은 서시, 양귀비, 우희와 함께 고대 중국 4대 미녀들 중 1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사진은 왕소군 초상화)

그러다 북방 흉노족이 한나라에 쳐들어와 미녀를 바치라는 요구를 했다. 원제는 가장 못생긴 걸로 알고 있던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왕소군은 엄청난 미인이었다. 화가 난 원제는 화공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왕소군은 결국 오랑캐 땅으로 시집을 갔고, 거기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가 바로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이다. ‘오랑캐 땅에는 풀과 꽃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뇌물 접수처가 된 첩

뇌물을 줄 때 두려운 것은 배달 사고와 중간 착복이다.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이 뇌물을 받아야 한다. 제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지만 집에서 불법거래를 하다 걸리면 큰일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 게다가 정실부인은 보는 눈이 많아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첩은 따로 떨어져 살기 때문에 뇌물의 접수창구로 적격이었다.

출처: SBS 푸른 바다의 전설 홈페이지에서 캡처
(SBS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의 한 장면. 조선시대에는 첩이 뇌물을 대신 전달해주기도 했다)

더욱이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지방으로 발령을 받으면 절대 부인을 데리고 갈 수 없었다. 표면적 이유는 정부에서 부인의 체류비까지 지원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뇌물 때문이었다. 청탁자들은 주로 가족을 노리기 때문에 아예 뇌물의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취지가 무색하게 양반들은 첩을 이용해 뇌물 거래를 이어갔다.


특히 지방으로 발령받아 나랏일을 하러 간 양반들은 현지 사람을 첩으로 뒀다. 뇌물도 인맥이 있어야 하는데 현지 첩은 누구보다 그쪽 정보에 밝기 때문이다. 더욱이 첩을 창구로 활용하면 뇌물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비난의 화살이 국가(양반 관리) 대신 첩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뇌물을 없앨 수는 없지만 최소화할 수는 있다

(중세 말기에 로마 교황청은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았다)

뇌물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성행했다. 1517년 독일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도 면죄부 때문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성모 마리아를 겁탈해도 면죄부를 사면 죄를 면할 수 있다"라는 극단적 광고 카피까지 등장했을 정도였다.


프랑스 루이 14세는 뇌물 영역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세금을 거두는 조세 징수권을 개인에게 판매했다. 국가는 조세 징수권자에게 그가 거둬야 할 목표 액수를 정한 후 그가 국민들로부터 얼마를 거두는지는 재량에 맡겼다. 징수인은 세금의 4분의 3을 착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4세의 수입은 네 배로 뛰었다. 국민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명약관화다.

출처: 위키미디어
(홍콩의 반부패 수사기구 염정공서는 업무 합리화를 위한 자문팀을 두었고 부패 방지를 위한 공무원 교육을 맡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뿌리 깊은 뇌물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웃나라 홍콩의 사례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홍콩은 부패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나라였다. 


특히 생활밀착형 경찰의 부패가 가장 심했다. 처음 정부가 한 일은 법의 강화였다. 1971년 제정된 부패방지법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공무원을 부패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공무원 기소나 가택수사도 활발하게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반부패 수사기구 '염정공서(廉政公署)'다.


염정공서는 상당한 법적 권한을 갖고 있어 영장 없이도 체포와 가택수색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일반 시민 교육과 언론홍보에도 힘썼다. 결과는 놀라웠다. 2004년 홍콩은 국가 청렴도 순위에서 146개국 가운데 16위, 2009년에는 12위에 올랐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 다음으로 청렴한 국가였다. 부패 방지를 위한 제도적 설계, 법 집행, 시민교육의 3박자가 모두 잘 어우러진 덕분이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홍콩 정부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서 기소와 처벌만으론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국민교육에 더욱 치중했다. 실제로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이르기까지 부패 문제와 신고의식 교육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또한 부패의 토양을 없애기 위해 행정절차상 불필요한 것은 과감히 잘라냈으며 공무원의 임금도 대폭 인상했다.


뇌물을 완전히 없애기는 힘들다. 그러나 지속적인 노력으로 최소화할 수는 있다. 사람들에게 뇌물이 발각되는 순간 패가망신할 수 있다는 마인드를 심어주고, 홍콩처럼 부패를 근절할 수 있는 기관과 제도를 만드는 노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뇌물을 통해 정당한 기회를 박탈당하고 불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많은 국가는 정치와 경제가 발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 이 글은 '뇌물의 역사(임용한, 김인호, 노혜경 저)'를 일부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89호 
필자 한근태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