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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람 몰아치는 '영의정 수난시대', 숙종의 사람들

조회수 2019. 1. 26. 22:4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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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자들의 본분은?

영조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재위 기간을 가졌던 숙종의 시대는 '영의정 수난시대'였다. 왕의 환국 정치 속에서 당파 갈등은 극에 달했고 대부분의 영의정이 죽거나 유배를 갔다. 그러나 당시의 혼란이 1인자인 왕의 책임만은 아니다. 2인자 재상들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예측 불가능한 1인자와 살얼음판 같은 정국에서 2인자가 걸어간 자취를 살펴보자.

출처: SBS 드라마(좌), MBC 드라마(우)
(숙종을 연기한 배우 최민수(좌), 지진희(우). 각각 드라마 <대박>(2016 방영)과 <동이>(2010 방영)에 출연했다.)

조선의 19대 임금 숙종은 1674년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46년간 조선을 통치했다. 민생 안정과 상업의 발전이 빛이라면, 극단적인 권력투쟁과 정국의 혼란은 그림자였다. 특히 숙종이 주도한 환국은 상대 당의 공존을 허용했던 붕당정치를 무너뜨리고, 일당 독재체제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돌발적으로, 그것도 오로지 국왕의 주관적인 독단으로 단행된 환국은 정치를 왜곡하고 국가에너지를 크게 소모시킨다.


이 시기, 국정의 2인자이자 각 붕당의 대표였던 재상들은 원했든, 원치 않았든 당쟁의 중심에 서 그 책임을 고스란히 짊어졌다. 영의정만 해도 허적과 김수항이 사사됐고, 김수흥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권대운과 남구만은 영의정이었을 때도 각기 절도와 북변으로 위리안치[1]됐다. 여성제와 유상운, 최석정 역시 유배를 경험한다. 숙종 대의 마지막 영의정 김창집도 숙종이 죽고 2년 만에 유배지에서 사사됐다. 평탄하게 재임하고 물러난 영의정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였다. 


[1] 위리안치는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이다. 죄인을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다.

자식 농사 실패한 허적

1680년(숙종 6년) 3월 28일, 숙종은 전격적으로 군부의 주요 수장을 교체했다. 남인의 대표적인 무신 유혁연을 퇴진시키고 숙종의 장인이자 서인의 핵심인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훈련대장에, 같은 서인인 신여철을 총융사에 임명한다. 숙종은 이어 조정을 서인 일색으로 전면 개편하는 환국을 단행한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경신환국)이 그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허적(1610-1680))

경신대출척의 발단은 소위 ‘유막사건’ 때문이었다.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은 조부 허잠에게 시호가 내린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 이날 비가 내리자 임금은 특별히 왕실용 장막과 차일(볕가리개)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미 허적의 집에서 그 물건들을 가져간 뒤였다. 임금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물건을 가져다 쓴 것에 숙종은 격노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허적의 서자 허견이 잔치를 기회로 김석주, 김만기 등 서인 대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됐고, 이에 숙종은 남인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남인이 가진 병권을 거둬들였다. 그런데 이 일화는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실록에서는‘허견(許堅)의 옥사’가 남인의 몰락을 가져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허적의 서자 허견은 많은 스캔들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그는 청풍부원군의 첩과 다투다 폭력을 행사해 이빨을 부러뜨렸고 다른 사람의 아내를 납치해 겁탈하기도 했다. 두 사건은 모두 도성의 치안과 사법을 책임지는 한성부 좌윤 남구만의 고발로 공론화됐다. 숙종이 의금부에 명해 철저한 진상조사를 지시했지만 남인 정권은 이를 덮어버렸다. 특히 앞의 사건의 경우 가해자 허견의 진술만 가지고 오히려 피해자 측에 죄가 있다고 규정하고, 고문 등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해 사건을 왜곡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고발자인 남구만을 공격해 유배를 보냈다. 허견이 처벌을 받게 되면 아버지인 허적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고, 이는 서인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게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허적의 은폐 지시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권대운과 오시수 등 남인의 주요 대신들이 모두 나선 것으로 볼 때 어떤 형태로든 개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허적과 남인 정권이 보인 무리한 행태는 같은 남인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남인의 원로이자 판중추부사 허목은 아들의 죄를 무마시킨 허적을 강력히 비판하고, 허적이 사사로운 욕심으로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공격했다. 이때 비록 숙종이 허목을 질책하고 허적을 두둔하긴 했지만 남인 내에서도 자식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허적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여론이 형성된다. 하지만 허적은 아들 허견의 만행을 계속 묵인했고, 이는 결국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허견이 복선군과 결탁해 역모를 꾀한 것이다. 


정원로의 고변으로 발각된 역모는 허견과 복선군 모두 순순히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봐서 사실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로 인해 허적도 결국 사사된다. 허견의 역모가 남인 정권을 몰락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조선 시대 화폐 '상평통보'의 앞면)

허적은 원래 경제 관료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호조판서로서 김육의 대동법 추진을 뒷받침했고 현종 때는 좌의정으로서 경신대기근 에 따른 국가재정 확보, 경제재건 작업을 지휘했다. 영의정이던 숙종 4년에는 상평통보의 시행을 주도한다. 허적은 처신에도 탁월했는데, 그는 남인이면서도 서인 재상인 정태화, 송시열과 원만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오랜 기간 조정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런 허적이 아들로 인해 무너진 것이다.


물론 경신대출척과 남인의 몰락을 전적으로 허적이 아들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 남인의 과오, 정국의 변화와 임금의 판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적이 허견의 잘못된 행동을 엄하게 제어하고 훈육했다면 적어도 역모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허적 본인을 비롯해 남인의 주요 인사들이 몰살당하는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편견에 빠진 김수항

출처: 위키피디아
(김수항(1629~1689)(좌), 송시열(1607-1689)(우))

남인이 축출되고 그 빈자리는 서인으로 채워졌다. 김수항은 새로운 영의정으로 임명됐다. 당시 김수항은 세 가지 큰 절의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첫째, 남인의 역모를 미리 꺾어 세상의 올바른 도리를 지켜냈고, 둘째, 소론이 제멋대로 남인에게 아첨할 때 홀로 정도를 지켜 화를 당했지만 후회하지 않았으며, 셋째, 스승 송시열을 배신한 윤증을 통렬하게 배척해 선비의 길을 밝히고 유학 발전에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수항은 영의정이 된 이후 자신이 속한 당파에 편향된 모습을 보여줬다. 실제로 김수항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임금이 송시열을 각별히 예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라에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심지어 왕의 건강이 좋지 못할 때도 그 해결책으로 “송시열을 다시 불러올 것을 청했다.” 송시열이 임금의 비판을 받거나 상대 당의 공격을 받을 때면, 그가 전면에 나서서 방어했다. 


오시수와 전익대 사건도 이러한 스탠스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것이다. 오시수는 남인으로 우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접대를 담당했던 오시수는 사신이 ‘조선은 왕이 약하고 신하가 강성하다’고 말했다며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훗날 정권을 잡은 서인이 허위보고를 한 죄로 오시수를 체포했다. 겉으로는 왕을 능멸했다는 죄목이었지만 실상 신하가 강성하다는 말이 송시열을 지목한 것으로 보고, 송시열을 위협할 수 있는 싹을 제거하고자 옥사를 일으킨 것이다. 서인은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채 오시수를 죽였는데, 이는 같은 당파 안에서도 비판이 나왔을 만큼 무리한 조처였다. 이 과정을 총괄하며 주도한 것이 다름 아닌 김수항이다.


전익대는 서인의 중진 김익훈의 사주를 받고 남인들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며 허위로 고발했다. 이는 추잡한 모략으로 드러났고 김익훈은 탄핵을 받았다. 그런데 송시열이 스승 김장생의 아들인 김익훈을 옹호하고 나섰다. 김수항도 송시열의 입장을 따랐다. 이 사건이 바로 노론과 소론이 갈라지는 도화선이 된다. 이후 김수항은 기사환국이 일어나면서 유배됐고, 얼마 후 유배지인 전라남도 영암에서 사사됐다.


무릇 2인자는 공동체 안의 다양한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고 협력을 이끌어내야 하는 자리다. 실무적인 일을 담당하지 않는 대신 객관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구성원들을 조화시키고 역량을 결집하는 데 힘써야 한다. 만일 2인자가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특정 집단에 편중된다면 조정자의 역할을 담당할 사람은 사라지고 구성원들 간의 갈등은 더욱 격화될 것이다.

임금의 총애를 받은 최석정, 아홉 번에 걸쳐 영의정에 임명되다

출처: 문화재청
(보물 제1936호로 지정된 최석정(1646-1715)의 초상화 및 함)

1701년 영의정이 된 최석정은 남구만의 뒤를 이어 소론의 영수가 됐다. 최석정은 항상 탄핵과 비난에 시달렸다. 심지어 나라를 팔아먹은 최명길의 손자라는 인신공격까지 가해졌다. 그는 유배와 중도부처, 파직, 삭탈관직 등을 거듭 겪었지만, 조정 밖으로 완전히 내쳐지지는 않았다. 상대 당에서 그를 “원수처럼 미워하여 여러 번 거꾸러뜨림을 당하였지만, 임금의 총애는 끝내 쇠하지 아니하여 자리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번번이 다시 불러서 등용하였으니, 전후로 모두 아홉 번에 걸쳐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할 정도였다. 대체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숙종에게 최석정은 꼭 필요한 경세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조판서 때 시폐 10조목을 올렸는데, 당면한 과제들을 정확히 진단하고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좌의정 시절에는 관직제도, 인재 선발 방식, 농지세 제도, 군사제도의 개선방안을 입안했고 당시 많은 폐단을 낳고 있던 과거, 균전, 양역, 군역 제도의 개혁안을 도출했다.


1698년(숙종 24) 청나라로부터 구호 곡식을 도입하는 것도 그가 나서서 진행한 일이다. 1695년(숙종 21)에서 1699년(숙종 25) 사이, 조선은 5년에 걸친 대기근을 겪었다. 이 기간에 최소 10만 명, 최대 5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되는데 숙종은 그 참담한 상황을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묘사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청나라로부터 곡식을 사들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제기됐는데 “원한을 잊은 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구제를 구걸하여 우리의 약함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신하들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최석정이 전면에 나서고 숙종이 결단을 내리면서 조선은 청나라에 구제 곡식을 공식 요청했다. 청나라에서는 이부시랑을 파견해 무상 구휼미 1만 석과 교역할 쌀 2만 석을 전달해왔는데, 이 곡식이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한다. 그런데 최석정은 이 일로 상을 받기는커녕 파직되고 문외출송[2]에 처해졌다. 오랑캐와 교섭을 한 책임이 지워진 것이다.


이처럼 최석정은 정치적 고난을 겪으면서도 국가와 백성을 위한 정책에 집중하며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며, 실현 가능한 정책대안을 수립했기 때문에 숙종은 계속 그를 곁에 두며 중용한 것이다. 이후 최석정은 영의정으로 재임하다 숙종이 노론 위주로 정국을 재편하면서 물러난다. 퇴직의 사유는 다소 황당한데 1710년(숙종 36) 정월, 숙종은 “어제 수라를 든 것이 그저께 든 것만 못하였는데, 근래 임금의 의약을 담당하는 신하들은 이를 전혀 걱정하지도 않는다”며 최석정 등 약방제조 세 사람을 삭탈관직해 도성 밖으로 추방했다. 이 조치는 금방 철회됐지만 이를 계기로 최석정은 조정의 일선에서 퇴진했다. 


최석정의 사례는 설령 극단적인 외부 환경과 마주하더라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보여준다. 1인자와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될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한다면 그것이 곧 스스로를 지켜주는 든든한 보호막이 될 것이다. 


[2] 조선 시대 죄인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한양 밖으로 추방하던 형벌. 비교적 가벼운 벌이었음.

숙종의 영의정들이 주는 교훈은 결국 2인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2인자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격한 자기 관리의 바탕 위에서 코디네이터로서 객관성과 균형을 잃지 않고, 사심 없이 갈등과 대립을 조정해야 한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해 1인자를 보좌하고, 공동체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한다. 물론 그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나 어렵고 혼탁할 수 있다. 잘못된 1인자를 만나고, 과격한 시대를 만나 좌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분을 잃지 않는 2인자는 적어도 헛되이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스스로를 권력싸움에 희생시키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방향을 정하고, 발걸음에 무게를 싣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다.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서로 다른 자취를 보여준 숙종의 영의정들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필자 김준태 (akademie@skku.edu)
성균관대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 연구원

인터비즈 문채영, 강병기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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