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사업가가 다들 말린 '프랑스 마을' 만든 이유

조회수 2018. 12. 25.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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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테마파크가 성공한 비결
큰 자본력을 가진 대기업과 비교하면 초라하다고 느끼실지 몰라요. 하지만 저의 젊은 시절 꿈이 담겨 있는 공간이에요. 어린왕자의 소행성과도 같죠.

작고 아담한 프랑스 마을. 쁘띠프랑스(Petite France)는 경기 가평군 청평면에 유럽의 작은 마을을 본딴 문화공간이다. “한국에도 아름다운 프랑스 마을을 만들겠다”는 한홍섭 회장(72)의 오랜 꿈이 실현된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중학교 중퇴 이후 장사를 하다가 페인트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경영인이다. 삶의 전반기엔 그랬다. 그는 40대에 돌연 한국에 프랑스 마을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후론 정말 연 매출 100억 원 페인트 회사 사업을 접었다. 주변에선 우려했다. 비슷한 시도도 없었고, 성공도 장담할 수 없는 분야였으니까. 

출처: 동아일보DB
(한홍섭 쁘띠프랑스 회장)

40대 사업가가 갑작스레 프랑스 마을 만들겠다고 한 이유

한 회장은 한때 화가를 꿈꾸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2학년 때 자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가세가 기울었어요. 집안 형편상 공부는 큰 형님만 할 수 있었어요."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일찌감치 장사길로 접어들었다. 고향인 경기 용인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에서 니스업을 하던 외사촌의 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공장이라고는 했으나, 가내수공업을 하는 작은 공방 수준이었다고. 드럼통 몇개에서 조악하게 니스를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만든 니스를 자전거를 타고 배달하며 시장을 돌아다녔다. 순박하던 소년은 그렇게 영업감각을 익혔다고. 그렇게 3년을 보낸 뒤, 그는 니스를 직접 만들기로 하고 서울 동대문 청계천 상가에 가게를 차렸다. 1968년 설립한 ‘대동화학공업사’라는 이름의 회사였다. 사업 영역도 페인트로 확장했다. 시장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은 청년은 이 페인트 회사를 연 매출 100억 원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쁘띠프랑스)

해외 제품을 들여오기 위해 출장을 나갈 일은 점차 많아졌다. 그는남부럽지 않은 사업이었다고 회고했다. 성공한 기업인으로 그렇게 인생이 흘러갈 것이라고만 생각했다.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꿈은 순식간에 그를 사로잡을 줄을 그땐 미처 생각도 못했다.


그는 1979년에 한국일보를 보다가 피카소의 딸이 소장했던 피카소 유작의 최초 전시회가 파리에서 열린다는 기사를 인상깊게 읽었다고 한다. 마침 그 무렵 프랑스 출장을 가게 됐는데, 거리에 긴 줄이 늘어선 모습을 확인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주위에 물어보니 바로 그 피카소 유작 전시회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는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꿈을 떠올리며 바로 그날 오후 일정을 취소하고 미술관을 방문했다 .

(쁘띠프랑스 한홍섭 회장)

그가 접한 건 피카소의 자화상과 미완성 스케치들이었다. 한 회장은 아름다운 미술품에 푹 빠져들어갔다고.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경험이었다. 1980년대 초중반 프랑스 업체들과 사업미팅을 하며 한창 바쁘게 지냈을 때에도 꼭 시간을 내 미술 관련 가이드를 구하고 미술관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속엔 다시 꿈이 움텄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예술과 문화를 옮겨오고 싶다" 


처음엔 미술관을 꿈꿨지만, 당시만 해도 미술에 대한 인식이나 이를 즐기는 문화는 부족했다. 더 많은 이들에게 외국의 아름다운 문화를 보여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방향을 '테마파크'로 틀었다. 이미 마흔 줄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어서 그는 틈만 나면 프랑스에 방문하면서 머릿속에서 꿈을 구체화해나갔다. 프랑스 관련 책과 자료에 파묻혀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머릿속에선 피카소의 아름다운 그림이 아른거렸다. 프랑스마을을 계획한 이후 유럽을 오간 게 80번에 이를 정도였다.  


"제가 한 번 결심하면 돌이키지 않고 실행하는 성격입니다" 그는 한국에선 수원과 용인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에 프랑스 마을을 세울 만한 장소를 물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1995년. 마침내 청평호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자리를 찾자마자 "여기다" 싶었다고. 그는 그동안 모았던 재산으로 가평에서 3만7000평 부지를 매입했다.  

무모한 계획이었지만 기회왔을 때 잡았다..."진정성 담은 콘텐츠 덕분"

모든 일을 접고 그야말로 '올인'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주위에선 모두 말렸다고.


"사실 주변에서 잘 될 거라고 말해준 사람이 없어요. 지나고보니 제가 참 고집이 세고 무모했구나 싶어요. 결국 잘 됐으니 다행이지만..." 


실제로 처음엔 시행착오 투성이였다. 1997년 말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건설에 속도를 내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페인트 회사 거래처들이 무너지면서 자금 마련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페인트 회사를 처분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벌지 못했다고도 회고했다. 가평군에서 허가를 받은 게 1998년이었는데, 프랑스마을이 완공된 것은 2008년이었다. 10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꿈에 미쳐있지 않았더라면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쁘띠프랑스)

개관 첫해 관객은 12만 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테마파크로 구실하기엔 많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14년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글로벌 흥행을 기록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관광객이 밀려들면서 그해 100만 명 관객을 훌쩍 넘겼다.


"한류 열풍의 덕을 봤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콘텐츠를 개발하지 않았더라면, 관광객을 모을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인기는 금방 꺼졌을 거예요." 


그는 건축 자재를 분해해 원형 그대로 가져온 목조건물 등 진정성을 담은 콘텐츠를 개발했고, 프랑스 생텍쥐페리재단과 정식 제휴를 맺고 소설 어린왕자 친필 원고와 작가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흉내내기에 그칠 수 있었으나, 직접 발로 뛰며 재단을 설득하고 콘텐츠를 확보하면서 지역 테마파크에서 성공사례를 써내려가고 있다. 현재 매출은 한해 80억 원 수준, 관광객은 꾸준히 100만 명 선을 기록하고 있다.  


페인트 사업으로 안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쁘띠프랑스를 개관하면서 불안에 떨며 후회하진 않았을까. "페인트 사업은 아는 게 없어서 시작한 일이라면, 쁘띠프랑스는 제 소신으로 시작한 일입니다. 가평의 문화마을로서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남는 명소가 될 것이란 희망을 한 번도 버린적이 없어요. 전 지금도 저의 소행성을 가꾸면서 행복합니다." 


더 멋진 공간을 만들기 위해 그는 프랑스를 80여 회나 다녀왔다고 했다. 진정성을 알아주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젊은 시절 꿈을 만나며 이를 돌보는 이의 활기가 느껴졌다.  

인터비즈 임현석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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