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릿 패션 손 뻗었다 추락한 '타미힐피거', 어떻게 부활했나?

조회수 2018. 12. 12.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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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는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

[HBR/하버드비즈니스리뷰] 1960년대 말,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뉴욕 주 북부에 살고 있던 평범한 10대 소년은 동네 옷가게에서 구할 수 없는 유행에 민감한 옷을 접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뉴욕에서 수십 벌의 나팔바지와 히피 패션의 옷을 구입해 와서는 자신의 폴크스바겐 차량 뒤 트렁크에 옷을 쌓아 놓고 장사를 했다. 그리고 스무 살이 채 되기 전, 친구들과 150달러(한화 약 17만 원) 씩을 투자해 '피플스 플레이스(People's Place)'라는 옷가게를 차렸다.


방과 후 오후 3시부터 영업을 시작했지만 수입이 상당했다. 이 매장은 점차 체인점 형태로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1985년 그는 마침내 캘리포니아의 캐주얼하고 자유분방한 느낌을 살린 브랜드를 출시했다. 오늘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미국의 유명 패션 브랜드 '타미힐피거(Tommy Hilfiger)'의 이야기다.

브랜드 가치의 퇴색... 기업 위기로 이어지다

출처: 타미힐피거 홈페이지

1990년대 타미힐피거는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핫'한 패션 브랜드 중 하나로 위용을 떨쳤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 인기가 대단했다. 많은 유럽 소비자들이 뉴욕 여행 시 타미힐피거 상품을 구매해 돌아오곤 했다. 이에 회사는 1996년 유럽 사업부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해외 공략에 나섰다.


타미힐피거의 미국 내 사업 역시 승승장구했다. 1997년부터 브랜드 가치가 정점을 찍은 2000년까지 매출은 두 배 이상 상승했고, 주식 시장에서도 순항했다.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들의 충성심도 매우 높았고, 엄청난 물량의 광고 덕분에 성장세 또한 대단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며 회사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트리트웨어' 분야에 손을 뻗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배기진(헐렁한 청바지)과 아주 커다란 로고가 달린 스트리트 패션들은 기존의 타미힐피거 제품들이 쌓아 올린 브랜드 가치를 바래게 했다. 고객들의 수요가 감소하자 가격 할인이 빈번해졌고, 디자이너들은 아예 할인매장에나 어울리는 스타일의 옷을 디자인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할인가로 마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재질, 스타일 및 품질을 상당히 양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출처: 출처 PVH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프레드 게링(왼쪽))

당시 유럽 사업부를 이끌던 프레드 게링(Fred Gehring, 2006-2014 타미힐피거 그룹 글로벌 CEO 역임)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2001년부터 미국 사업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조치들을 단행했다. 자체 디자인센터와 공급망을 만들어 옷의 품질은 높이고 비용은 낮췄다. 그러자 미국 매출은 매년 곤두박치는 반면 유럽 매출은 2006년까지 해마다 약 50%씩 성장했다. 연 매출 약 20억 달러(한화 2조 2402억 원)의 대형 기업에서 연 매출 2억 달러(한화 2240억 원) 규모의 작은 사업부가 이뤄낸 성과였다.


유럽 사업부에서 혁혁한 성과를 낸 게링은 타미힐피거 그룹 전체가 되살아나기 위해선 미국 시장에서 잃어버린 입지를 되찾기 위해 인력을 낭비하기보다는 현재 수익을 내고 있는 사업부에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거의 '재앙' 수준이나 다름없는 미국 내 백화점 유통 채널은 축소시켜야 한다고 봤다. 대신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 유럽은 물론 수익을 내고 있는 캐나다 법인, 혹은 미국에서도 흑자를 내고 있는 아웃렛 사업(북미 125개 매장)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타미힐피거의 경영진의 관심사는 여전히 손실을 회복하고 미국 내 매출(특히 전통적인 유통 채널인 백화점) 증가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뿐이었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경영진이 제시한 것은 인수합병을 통해 회사의 몸집을 키우는 것이었다. 

회생을 위한 기업 비공개

출처: 출처 flickr, 위키피디아

게링은 이러한 비전을 이사회에 호소했다. 하지만 당시 CEO를 포함해 대부분의 이사진들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그들은 게링의 계획이 너무 공격적인 구조조정이라고 걱정했다. 상장 폐지를 하고 싶다면 회사 인수 제안서를 들고 다시 찾아오라고 반응하기도 했다. 보다 못한 게링은 직접 투자금을 대줄 사모펀드 회사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에이팩스 파트너스(Apax Partners)라는 사모펀드가 타미 힐피거의 최종 인수자로 결정됐고, 게링은 유럽 사업부에서 그룹 전체를 총괄하는 CEO로 발탁됐다.  


매각 절차를 마친 뒤 게링은 과감한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먼저 직원을 40%까지 감축하는 등 골칫거리였던 미국 사업을 대폭 축소했다. 글로벌 경영팀의 대다수도 글로벌 본사가 있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대신 미국의 대표적인 백화점 브랜드 '메이시스(Macy's)'와 전략적 제휴를 맺어 메이시스를 타미힐피거의 미국 독점 소매 파트너 업체로 만들었다. 소매 유통권을 일원화하자 타미힐피거 도매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메이시스로부터 더 많은 협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출처: 타미힐피거 인스타그램
(타미힐피거의 창립자 타미힐피거(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연예계 아이콘들)

게링의 단기적인 미국 사업 축소 전략은 쇠락한 브랜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전략이 조기에 성과를 보이자 투자사인 에이팩스 역시 브랜드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가령 미국 맨해튼에 2만 평방피트(약 1850㎡) 규모의 플래그십스토어를 오픈해주기도 했다. 브랜드 인지도를 강화하기 위한 마케팅 투자였다. 이 밖에도 컬렉션 디자인, 패션쇼 및 예술, 스포츠, 연예계 아이콘들과의 협업 작업(collaboration)도 활발하게 이어갔다. 그 결과 해외시장에서 타미힐피거가 갖고 있던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를 미국에서도 되찾을 수 있었다.

장기적 관점의 경영전략과 리더의 결단...죽어가던 회사를 살렸다

회사가 에이팩스에 인수되고 구조조정이 끝나자마자 재상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기업을 비공개로 전환한 지 불과 18개월 만의 일이었다. 몇 달 후 리먼브러더스(Lehman Brothers)가 파산하고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논의는 잠시 주춤했지만, 곧 시장 상황이 좋아지고 사업이 성장기로 돌아서면서 매출 성장 속도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타미힐피거는 2010년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아이조드(IZOD) 등을 보유한 PVH(Phillips-Van Heusen·필립스 반 휴슨)사에 매각됐다.

출처: 타미힐피거 인스타그램

PVH에 매각된 이후 타미힐피거의 사업은 세계 도처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다. 플래그십 스토어의 수는 꾸준히 늘고 있고, 타미힐피거 특유의 패션 스타일은 전세계로 퍼졌다. PVH의 자금 지원으로 마케팅과 소매 유통망 개발에 투자를 늘린 덕분이었다. 인도, 브라질, 러시아와 같은 거대 신흥시장에 진출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지난 2017년 타미힐피거의 매출은 전년도 대비 11% 성장한 39억 달러(한화 약 4조 3660억 원) 가량을 기록했다.


타미힐피거는 한때 미국 시장에서 과도한 확장을 시도했다 브랜드 가치를 상실하고 가파르게 쇠퇴했다. 하지만 단기 성과의 압박에 시달리는 대신, 장기적인 관점의 전략 개발과 올바른 사업구조를 만듦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타미힐피거가 글로벌 성장 및 사업 확장의 성장 동력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비결이다. 


* 이 글은 세계적 경영 저널 HBR 2015년 7-8월호 'Tommy Hilfiger's Chairman on Going Private to Spark a Turnaround'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 표지 이미지 출처: 타미힐피거 텀블러

인터비즈 임유진, 이방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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