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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위스키, 그 속에 얽힌 운명같은 러브스토리

조회수 2018. 11. 9.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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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없던 새로운 제품이나 비즈니스는 어떻게, 그리고 왜 탄생하게 되는 걸까?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성공궤도에 오르게 되는 걸까? 이 질문에는 수많은 답변이 뒤따를 수 있겠지만 아래 소개할 사례들은 하나의 키워드로 정의가 가능하다. The Love, 바로 사랑이다. 오늘은 ‘사랑꾼’ 덕에 빛을 본 제품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일본 최고 위스키에 얽힌 드라마 같은 러브 스토리

일본 제일의 위스키 브랜드로 손꼽히는 니카위스키는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로 불리는 타케츠루 마사타카의 손에서 태어났다. 양조장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술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마사타카는 양주 회사에 입사한 후 스코틀랜드로의 ‘위스키 유학’을 떠난다. 그때 마사타카는 머나먼 이국 스코틀랜드에서 만난 운명의 여인이 자신의 운명과 일본 위스키 역사에 거대한 영향을 미칠 줄 짐작이나 했을까? (관련 콘텐츠▶ 잇단 품절에 판매중지까지… 日 위스키, 세계 휩쓴 비결)

출처: 니카위스키 홈페이지
(타케츠루 마사타카(왼쪽)와 타케츠루 리타)

본고장에서 위스키의 모든 것을 배우겠다는 일념 하에 홀로 스코틀랜드까지 건너온 마사타카는 1918년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했다. 위스키 공부에 몰두하던 어느 날, 그는 같은 대학 의대에 재학 중인 이사벨라 릴리언 엘라 카원의 부탁을 받았다. 그를 집으로 초대할 테니, 자신의 동생에게 유도를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부탁의 끝에는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라의 집에서 마사타카는 그의 언니 제시 로베르타 카원(애칭은 리타)을 만났다. 제1차 대전에 참전한 약혼자의 사망, 아버지의 죽음, 경제적 어려움으로 어두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리타에게 마사타카는 새로운 열망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고, 1년 뒤인 1920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국제결혼, 양가의 반대가 심했지만 사랑은 그보다 강했다. 그 해 11월 두 사람은 스코틀랜드를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출처: 니카위스키 홈페이지, 위키미디어커먼스
(홋카이도에 위치한 요이치 증류소(왼쪽)와 마사타카가 다녔던 글래스고 대학)

당시 리타는 “당신을 위해 스코틀랜드에 남아도 상관없다”고 선언한 마사타카에게 “당신의 꿈은 일본에서 위스키를 만드는 것이니까. 우리는 일본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독려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본 위스키 매거진은 이 같은 리타의 결단이 없었다면 일본의 위스키 시장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을 것이라 평가했다. 거기에 일본에 돌아온 마사타카가 홋카이도에 위스키 증류소를 세운 사실을 놓고도 ‘아내인 리타를 위해 스코틀랜드와 가장 환경이 비슷한 지역을 찾은 것’이라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정통 스코틀랜드 식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기후조건이 비슷한 곳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정설이다.)

출처: NHK
(2014년 9월~2015년 3월 방영했던 드라마 '맛상'은 일본 내 위스키 붐을 불러왔다. '맛상'은 리타가 마사타카를 부르던 애칭이다)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니카위스키에 끼친 영향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1983년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던 일본 위스키 시장을 되살린 것 역시 이들이었다. 2014년 9월 일본 NHK에서는 ‘맛상マッサン’이라는 제목의 아침 드라마를 방영했는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사타카와 리타였다.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와 일본 위스키 역사를 담은 드라마는 대인기를 끌었고 일본 내 위스키 소비량까지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일본 주류업계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드라마 방영 한 달 동안에만 일본산 위스키 소비량은 전년 동기 대비 17%나 늘었다. 또 마사타카의 이름을 딴 ‘타케츠루’라는 이름의 위스키는 320%의 매출 증가세를 보였을 정도였다고 하니, 두 사람의 사랑이 일본 위스키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꽤나 깊은 것으로 보인다.

극진한 아내 사랑이 만든 일회용 반창고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우리에게 대일밴드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일회용 반창고는 1900년대 초, 미국의 한 직장인에 의해 발명됐다. 미국 존슨앤존슨에서 근무하던 얼 딕슨은 아내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더불어 아내에 대한 걱정 또한 지극한 사람이었다. 집안일에 익숙치 않던 아내 조세핀 딕슨은 칼질을 할 때는 손을 베이고, 음식을 끓일 땐 손을 데이기 일쑤였다. 얼은 그런 아내의 곁에서 언제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고, 거즈와 외과용 테이프를 잘라 처치를 해주곤 했다. 하지만 직장인인 그가 언제나 아내 옆을 지키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얼은 이윽고 자신이 집에 없어도 아내가 쉽게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상처가 날 때마다 거즈와 의료용 테이프를 일일이 잘라 붙이는 것의 불편함에 집중하고 미리 잘라둔 테이프에 거즈를 부착한 오늘날의 일회용 반창고를 구상했다. 문제는 의료용 테이프를 미리 잘라 두면 접착력이 떨어지고, 거즈에도 먼지가 붙어 상처가 오염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문제를 놓고 함께 고민하던 얼과 조세핀은 드레스 속치마에 쓰이는 크리놀린이라는 직물에서 답을 찾았다. 매끄러운 크리놀린의 표면은 테이프에 붙여 두어도 쉽게 떨어지고, 먼지가 붙는 것도 막아주는 효과를 냈다.

출처: band-aid.com

얼은 자신의 발명품이 상처 치료를 번거로워 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자신이 다니던 회사인 존슨앤존슨의 제임스 존슨 회장에게 공유했다. 제품의 경쟁력에 주목한 존슨 회장이 이를 밴드 에이드라는 이름으로 생산하여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아내 사랑의 증거’는 전 세계인들의 필수품이 될 수 있었다. 훗날 존슨앤존슨의 부회장 자리에까지 오른 얼은 일회용 반창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지독한 사랑꾼의 면모를 보였다.

나는 성공하기 위하여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인터비즈 황지혜
inter-biz@naver.com

*참고문헌

위스키매거진 リタの数奇な生涯

니폰닷컴 竹鶴リタ物語

위키피디아竹鶴リタ, Band-Aid

Band-Aid BRAND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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