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굶어죽지 않기 위해 억대의 현상금을 걸었던 나폴레옹

조회수 2018. 10. 7.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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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의 탄생 배경

1942년 버마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15군은 정글 지대를 통과해 인도 북부 마니푸르 주의 수도 임팔을 점령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것이 유명한 임팔 작전이다. 이 작전은 인도를 통해 중국으로 지원되는 연합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군으로서는 중국 전선의 승패가 걸린 중요한 작전이었지만 문제는 보급이었다. 험악한 도로와 정글을 뚫고 나가야 하는 일본군 병사들에게 식량을 지원할 방법이 없었다. 고심하던 일본군 사령관 무다구치 중장은 역사 책을 뒤져서 방법을 찾았다. 오래전 이 루트를 정복했던 칭기즈칸의 군대는 양 떼를 끌고 행군하는 방법으로 식량을 조달했다. 무다구치도 이 방법을 본받아 수천 마리의 소와 양을 끌고 갔다. 


이 낭만적인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축을 끌고 다니기란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더 힘들다. 유사시에 식량으로 쓴다고 하지만 소와 양은 사람보다 더 많이 먹는다. 풀을 먹이면 될 것 같지만 실제로 야전에서 그 많은 가축을 먹일 목초를 구하기란 쉽지 않다. 

출처: wikimedia
(세계 2차 대전 당시 미군 전투 식량)

일본군이 이처럼 악전고투하는 동안 영국군과 미군은 통조림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이들도 보급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통조림 의존도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대 중 제일 높았다고 한다. 주로 보급된 것이 아르헨티나산 소고기 통조림이었다고 하는데, 이 통조림만 내내 먹어 병사들이 음식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맛은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굶거나 식량과 땔감을 찾아 방황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통조림 발명의 공로자, 나폴레옹

통조림 발명의 최대 공로자는 나폴레옹이다. 1790년 나폴레옹은 음식물을 장기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사람에게 1만 2000프랑을 지급하겠다는 현상 공모를 내걸었다. 1만 2000프랑이면 지금 화폐로 1억 원이 넘는 돈이었다.

출처: wikimedia, Jpbarbier at wikimedia
(니콜라 아페르와 그가 만든 병조림)

10년 후 1800년에 파리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니콜라 아페르라는 사람이 나폴레옹을 찾아왔다. 그가 가지고 온 병 속에는 고기와 야채를 섞어 조리한 음식이 신선한 상태로 들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아페르에게 병 속에 있는 야채가 얼마나 오래된 것이냐고 물었다. 아페르는 3주 전이라고 대답했다. 음식물의 신선도를 확인한 나폴레옹은 크게 감동을 받았고, 즉석에서 상금을 지급했다.


아페르의 발명품은 통조림이 아닌 병조림이었다. 고기와 야채, 달걀 등을 섞어 적당히 칼로리와 영양소를 맞춘 음식을 병에 넣고 밀봉한 뒤끓는 물에 넣어 삶아낸 것이었다. 병 마개로는 코르크를 사용했다. 지금 생각하면 간단한 방법 같지만 아직 세균의 존재도 모르고, 음식이 부패하는 원리도 알지 못하던 시절이라 그야말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방법이었다. 아페르가 이 방법을 찾아내는 데 무려 15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세상을 바꾼 발명과 혁신, 게티이미지 뱅크
(병조림은 통조림에 비해 무겁고 잘 깨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병조림은 나폴레옹 군대에서는 별로 실용화되지 못했다. 무겁고, 잘 깨지고, 음식물의 보존 상태도 생각처럼 좋지 않았다. 아페르는 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병조림 공장을 짓고 계속해서 요리법을 연구해 제품을 생산하려 했지만, 1814년 프랑스군이 러시아 원정에서 패하면서 파리로 진군한 군대에 의해 공장이 불타버렸다. 선구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아페르와 병조림은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 불편한 병조림을 실용적인 통조림으로 개량한 나라는 나폴레옹의 숙적이던 영국이었다. 누군가가 깨지기 쉬운 병 대신에 얇은 철판으로 만든 통을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의 아이디어는 즉시 채택됐다. 1813년에 영국에 통조림 공장이 세워졌고, 이때부터 통조림이 세상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통조림의 탄생 배경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나폴레옹이 억대의 현상금을 걸고 음식물 보관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모한 이유는 병사들에게 신선한 음식을 보급하거나, 유통기한이 짧은 신선한 식료품을 조달하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전쟁의 현장을 들여다보면 식량 조달은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기동력과 냄비

(프랑스군은 텐트까지 포기하면서 기동력을 높였다)

나폴레옹의 승전 비결 중 하나는 프랑스군의 기동력이었다. 차가 없던 시절이라 이 기동력의 비결은 병사들의 강행군이었다. 속도를 유지하고, 행군 부담을 줄이기 위해 프랑스군은 텐트도 휴대하지 않았다. 숙박할 민가가 없는 야지에서는 모닥불을 피우고, 나뭇잎을 덮고 자야 했다. 야지에서 이슬과 서리를 맞고 자야 하는 병사들의 고통이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억센 병사들에게 텐트보다 더 중요한 장비가 있었으니 바로 냄비였다. 반즈와 피셔가 공동으로 저술한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책에 한 프랑스 병사의 종군기가 소개돼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냄비야말로 생존 필수품이었다. 병사들에게는 검은 빵과 고기, 야채, 곡류 등이 지급됐는데, 그냥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폴레옹군의 보급 체제와 조직은 상당히 우수해서 병사들에게 식료품이 정량대로 지급됐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규정상의 정량이었다. 

(전쟁 때 질 좋은 고기를 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고기 1파운드라고 하면 무게는 정확히 1파운드였지만 고기의 질은 형편없었고, 뼈와 힘줄·내장까지 포함해 1파운드를 맞췄다. 제대로 먹으려면 냄비에 넣고 삶아 국이나 스튜로 만들어야 했다. 쌀과 야채도 생으로 지급됐기 때문에 마찬가지였다. 거의 유일하게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식품은 빵이었는데, 이 역시 딱딱한 검은 빵이라 고기와 마찬가지로 스튜에 넣어 먹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병사들에게 배급되는 식료품들은 모두 쓸어 놓고 잡탕 스튜로 만들어야 먹을만했다. 그래서 배낭 위 흔들거리며 달려있는 냄비는 병사들의 필수적인 생존 장비가 되었다. 그러나 음식을 매번 조리해 먹는 일은 군대에 큰 비효율성을 안겨줬다.  


일단 잡탕 스튜를 만들려면 냄비와 더불어 땔감이 필요했다. 수천, 수만의 군대가 끼니마다 사용할 나뭇가지와 장작을 구하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군대가 야영지에 도착하면 단 하루를 머물더라도 일단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고, 숙소를 마련해야 한다. 

(땔감 조달에 투입된 병사들은 항상 기습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하루 종일 행군에 지친 병사들이지만 이 작업 때문에 해가 진 뒤에도 쉴 수가 없었다. 절박하고 피곤한 상황 중에도 상당수 병력이 땔감 조달에 투입돼야만 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부대는 진지 주변으로 흩어져 멀리까지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적의 기습 부대나 유격 부대에게 늘 일차적인 먹잇감이 됐다.

기초적 욕구 충족의 중요성

나폴레옹뿐만 아니라 수천 년간 전쟁터의 모든 장수들이 갈망했던 소원은 식료품의 장기 보관이 아니라 조리가 필요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즉석 음식, 즉 효율성이었다. 그렇게 하면 땔감 조달 부대를 운용하는 복잡함과 위험을 덜고 이들을 진지 구축에 투입할 수 있었다. 병사들의 체력을 절약하고 진지를 더욱 견고하고 빠르게 구축하며, 시간 낭비를 줄여 행군 속도를 2배로 높일 수 있었다.

출처: 픽사베이, 게티이미지 뱅크
(통조림은 조직의 효율성을 상당히 높일 수 있었다)

이외에도 또 하나 엄청나게 중요한 장점이 있었다. 완전히 근절할 수는 없었지만 병사들의 약탈 행위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군대는 홍수나 태풍보다도 무섭게 마을을 초토화시켜 버린다는 말이 있었다. 병사들이 귀중품이 아니라 한 끼 내지는 단 며칠의 식사와 그것을 조리할 수 있는 땔감만을 조달해도 마을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당시 전쟁에서 현지 조달은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고 병사들의 전투 의지를 북돋우는 수단도 됐다. 하지만 과도한 약탈과 난폭 행위는 점령국에 대한 적개심과 항전 의지를 불태웠고, 군기를 무너트려 병사들의 질을 크게 저하시켰다. 


경쟁에서 승리하고 최고의 생산성을 올리려면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해결책을 마련해줘야 한다. 현대 기업이라면 의료와 복지 등과 관련해서 조직원들이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더라도 최소한의 안전판을 마련할 수 있는 제도(의료 보장이나 긴급 자금 대출, 융자 등)를 갖출 필요가 있다.  


특히 이런 제도를 갖추는 과정에서는 문화적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통조림을 알면서도 별로 애용하지 않았다. 가혹한 전쟁터였지만 식사만이라도 최대한 일반적 관습에 가깝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지 않을 경우 병사들의 사기가 더 떨어졌기 때문이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49호
필자 임용한


인터비즈 김혜림 정리 /사진 게티이미지 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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