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과한 '사무라이 정신'이 자초한 일본의 처참한 패배

조회수 2018. 9. 23.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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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일본군은 자신들의 예상보다 더 쉽고 빠르게 진주만을 초토화하며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점령한다. 필요한 것을 너무도 쉽게 얻어버린 일본은 태평양에서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지 정전협정을 맺고 중국과 인도 전선에 집중할지 확실히 하지 않은 채 호주 침공 작전을 시작한다.

당시 호주는 중동과 유럽에 군사를 파병해 정작 본토엔 군대가 하나도 없던 상황이었다. 호주 침공 거점으로는 뉴기니의 포트모르즈비가 적격이었다. 파병된 군사들이 오기 전에 모르즈비를 점령한 뒤 이곳을 기지로 주변의 피지, 뉴칼레도니아 제도 등을 점령해 호주를 봉쇄하자는 게 일본의 목표였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보급선은 끊길 테고, 호주는 전투능력을 상실할 게 뻔했다.

불확실 속에 시작된 호주 침공 작전

출처: 구글 지도 캡처 후 편집

1942년 다카기 해군 중장이 지휘하는 해군 함대가 뉴기니의 모르즈비를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코랄해(산호해)에서 미군과 충돌하면서 배 2척이 손상을 입자 다카기는 모르즈비 상륙을 포기한다. 최후의 승기를 잡기 위해 군력을 재정비하기로 한 것이다. 약간의 병력을 솔로몬 제도의 여러 섬에 파견해 비행장을 건설하고, 미국 함정과 수송선을 파괴할 전투기의 발진 기지를 만들겠다는 심산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결정적인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시간'이었다.


코랄 해전에서의 철수로 일본군은 몇 개월 이상의 시간을 허비했다. 그 사이에 호주의 전투사단이 유럽에서 귀환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일본군은 우선 모르즈비의 반대편에 위치한 부나에 상륙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곳의 수비대는 호주의 민병대 1000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모르즈비에는 이미 중동에서 귀환한 호주군 7사단 병사와 미군 등 1만50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죽음의 정글 앞에서도 무모한 횡단 감행

출처: 구글 지도 캡처 후 편집

일본 사령부는 부나에 상륙한 호리이 소장에게 휘하의 1만4000명을 이끌고 뉴기니를 횡단해 모르즈비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호주 민병대원들은 정글로 들어오는 일본군 행렬이 단순한 정찰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이 뉴기니 횡단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뉴기니의 정글은 전 세계의 어떤 정글과도 달랐다. 그곳엔 칼날 같은 나뭇잎, 뱀처럼 얽힌 나무줄기, 그리고 허리까지 빠지는 진창이 도사리고 있었다. 환기가 되지 않는 정글은 습기와 썩은 내, 독충과 거머리, 박테리아로 가득했다. 원주민마저도 정글에는 얼씬하지 않았고, 보수를 주고 짐을 날라달라고 하면 몸서리를 치고 도망칠 정도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정글보다 무서운 적이 또 하나 있었다. 뉴기니의 남북을 둘로 나누는 오웬 스탠리 산맥이었다. 고도 4000미터에 깎아지른 경사를 지닌 진흙 덩어리 산, 수시로 미끄러지고 붕괴되는 길. 지금도 뉴기니의 고원지대에 사는 주민들은 육로대신 경비행기를 이용한다.  


이 정글과 산맥을 일본군은 야포(野砲,대포의 일종)까지 끌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30년 전에 제작된 엉성한 지도에는 산맥을 넘는 한줄기 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코코다 고갯길로 불리는 이 길은 사실 길이 아니었다. 원주민도 다니지 않는 그 길은 폭이 1미터도 되지 않았고 끊겨 있기 일쑤였다. 옆으로 미끄러지면 진흙 위로 미끄러지다가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코코다 고갯길에서 사상자를 옮기는 사람들)

이 엄청난 난관에도 불구하고, 한 달 만에 일본군은 정상 부근으로 진출했다. 겨우 중대 규모의 호주군 수비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도 물리쳤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후부터 시작됐다. 식량이 떨어진 것이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부족한 식량을 정글에서 구하거나 원주민 부락을 털어 현지 조달한다는 안이한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뉴기니의 정글에는 먹을 수 있는 게 전혀 없었다. 정글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 또한 있을 리 만무했다. 그들의 유일한 활로는 모르즈비를 점령해서 연합군의 식량을 탈취하는 길뿐이었다.

모르즈비까지 약 50km... 갑자기 떨어진 철군명령

출처: DBR
(1943년 뉴기니의 숲속에서 일본군에게 반격을 하기 위해 길을 닦고 있는 호주군)

일본군은 고전 끝에 모르즈비까지 단 50km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호리이 소장이 최후의 공격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중에 사령부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뒤늦게 뉴기니 전선의 무용함을 깨닫고 병력을 온전히 빼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돌격명령보다 더 잔혹한 명령이었다.


식량마저 떨어진 상태에서 일본군은 이 흉포한 길을 다시 넘어 돌아갔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철수하는 일본군의 머리 위로 뉴기니의 마지막 복병인 우기가 찾아왔다. 원주민들의 기준에 따르면 우기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기간"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끔찍한 빗속에서 중장비를 버리고, 중상자는 사살하고, 경상자는 둘러 맨 채 고난의 행군을 계속했다. 밤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전우를 사살하는 총성이 울렸다.   


마침내 11월. 두 달 만에 출발점으로 되돌아 왔다. 병사들은 식량이 가득 쌓여 있는 기지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미 연합군이 상륙해서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호리이 소장은 급류에 휘말려 사망했고 병과 굶주림, 체력고갈로 일본군은 거의 전멸상태였다. 뉴기니에서 살아 돌아간 병사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과한 사무라이 정신, 화를 자초하다

일본군의 패인은 그들의 한 가지 장점을 잊어버리고, 다른 한 가지 장점을 오용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1단계에서 일본군은 치밀한 준비, 대담하고 정밀한 작전계획, 신속하고 과감한 기습으로 단숨에 태평양을 석권했다. 세계 전쟁사에서 이토록 짧은 기간에 이렇게 넓은 지역을 점령한 사례는 없었다. 그러나 1단계의 승리로 교만해진 그들은 순식간에 이 모든 장점을 잊어버렸다. 치밀한 준비 없이 광범위하고 복잡한 작전을 수행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솔로몬 제도의 핸더슨 비행장. 일본군이 호주 공략을 위해 건설한 것)

일본군이 초심을 잊지 않고 과감하게 호주로 상륙했다면 연합군은 일본군을 막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호주는 사람이 사는 지역이 전 국토의 3%도 되지 않아 일본군이 무인지대로 얼마든지 우회해 공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호주군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도시 방어전 밖에 없고, 전투경험이 풍부한 일본군은 시가전에서 호주군을 쉽게 압도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일본군은 주변 섬들에 비행장을 건설해 공군의 지원을 받는 안전한 작전을 구상하다 시간을 허비했다. 사무라이 정신의 위력을 과시한 채 치밀한 준비 없이 밀어붙인 결과, 참담한 패배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술과 경영에서 장점과 단점은 결코 절대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가치중립적 요소에 가깝다. 장점이 된 이유는 그 자체로 좋고 우월해서가 아니다. 다른 여러 요인 및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특정한 요소가 장점으로 부상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듯 장점을 받아들이고, 왜 장점이 됐는지 그 이유를 성찰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  


1942년의 뉴기니 횡단을 감행한 일본군이 꼭 그랬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절대 복종,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대변되는 사무라이 정신이 뉴기니 전투에서도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믿었던 무사도 정신은 장점으로서 가치를 발휘하기는커녕, 일본군에 참담한 패배를 안겨 준 패인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57호
필자 임용한
인터비즈 박근하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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