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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정말 날씬하시네요"..옷 사이즈의 거짓말

조회수 2018. 8. 3. 17:4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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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브랜드는 치수가 좀 크게 나온다고요?

쇼핑을 하러 다니다 보면 평소에 입는 옷의 사이즈보다 한 치수 작은 옷을 사게 될 때가 있다. 평소 33인치 바지를 입는다면 매장에 따라 30인치 바지를 입어도 몸에 딱 맞는 경우가 생긴다. 다이어트의 효과가 있었던 걸까? 내심 기뻐하는 것도 잠시. 옆 매장에서 바지를 고르다보니 다시 원래 입던 사이즈의 바지를 골라야만 한다. 그렇다면 앞서 들렀던 매장이 실수로 치수를 잘못 표기한 걸까?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저희 매장은 옷이 좀 크게 나와서요..."

가게 점원으로부터 '본래 치수보다 옷이 크게 나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옷은 일반적으로 XS, S, M, L, XL 등으로 사이즈를 표기하지만 똑같은 표기를 했음에도 실제로 입어보지 않으면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특히 여성복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손님 정말 날씬하시네요. 44 사이즈인데 딱 맞아요!" 라고 말하는 점원의 멘트에 기분이 좋아져 계획에 없던 소비를 한 적은 없는가? 실제로 살이 빠져서 작은 치수의 옷을 입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마케팅에 속은 것이나 다름없다.

- 마케팅에 속았다고? ... 배너티 사이징 마케팅

사실 꽤 오래전부터 의류업계에서는 옷의 치수를 실제보다 작게 표기하고 있었다. '배너티 사이징Vanity Sizing'이라 불리는 이 마케팅 방식은 날씬해지고 싶은 소비자의 심리를 겨냥한 전략이다. 단지 치수만 작게 표기한 것 뿐이지만 옷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기분은 좋아진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언제부터 소비자들은 사이즈 표기에 속아왔던 걸까? 배너티 사이징 마케팅의 시초는 90년대 말,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패션쇼에는 체형이 마른 모델들이 주로 등장했다. 자연스럽게 일반인들은 모델들의 몸매를 선망하게 됐다. 모델들만 입을 수 있다는 작은 크기의 옷을 따라 입고 싶다는 욕구 또한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평소 자신이 입던 사이즈보다 하나 더 작은 옷이 맞으면 지갑은 쉽게 열렸다. 이를 파악한 브랜드 의류회사들은 옷의 사이즈를 낮춰서 표기하기 시작했다. 사이즈 8로 표기되던 옷은 순식간에 6이 됐다. 최근에는 아주 작은 사이즈의 옷을 원하는 손님이 늘어나면서 '0'도 모자라 그보다 더 작은 '00'사이즈까지 나오게 되었다. 

실측 크기와 오차 범위, 늘어나는 정도 등에 따라 옷 사이즈는 천차만별로 표기될 수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에서 판매하는 바지 1000여 벌을 조사한 결과, 똑같이 표기된 수치임에도 최대 5인치(약 13센티)까지 크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도 비슷했다. 컨슈머리서치가 2015년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주요 의류 브랜드에서 같은 55 사이즈의 옷이라도 회사 별로 최대 20센티미터까지 차이가 났다.

50년대 연예계를 주름잡았던 마릴린먼로가 입었던 옷의 사이즈를 알아보면 배너티 사이징 마케팅이 더 극명하게 와닿는다. 실제 그녀가 입었던 드레스 사이즈는 8~10사이즌데, 우리에게 익숙한 사이즈로 변환하면 66~77 정도가 된다. 허리 22인치에 군살도 전혀 없었던 그녀는 왜 '66 반' 사이즈의 옷을 입었을까? 이는 당시 표기된 사이즈에 비해 오늘날 옷의 크기가 늘어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표기 숫자는 작게 하되, 실측 사이즈는 크게 하고자 하는 마케팅 전략이 과거와는 달라진 옷 크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마릴린먼로가 66.5 사이즈를 입었다고?

- 배너티 사이징 마케팅이 고객 충성도로 이어진다?

작게 표시된 치수는 단순히 소비자의 기분만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장기적으로는 고객 충성도까지 높이는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A 브랜드에서 치수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몸에 꼭 맞는 옷을 샀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B 브랜드에서 동일한 사이즈를 입더라도 기준 치수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평소 33인치 바지를 입던 사람이 A 매장에서 30인치 바지를 사게 되면 B 매장의 33인치 바지가 싫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점점 늘어나는 허리둘레 사이즈

몇 번의 쇼핑이 반복되면 '역시 나는 A 브랜드와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실제 체형은 변한 게 하나도 없지만 작은 사이즈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감까지 높아진다. A 브랜드는 옷의 치수만 작게 표기했을 뿐인데도 충성도 높은 고객을 얻게 된다. 

- 배너티 사이징 마케팅의 문제?

기업 입장에서는 매출에 도움이 되는 배너티 사이징 마케팅을 ‘효자 전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모든 전략이 그렇듯 명(明) 뒤에는 암(暗)이 있다.

배너티 사이징 마케팅이 만연해지면서 소비자들은 제각기 다른 브랜드의 실측 사이즈를 일일이 알고 있어야 하는 불편함이 생겼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입어본 뒤 구매하는 것이지만, 온라인 쇼핑몰처럼 수치 정보로만 옷을 구매하려는 경우에는 실패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어쩌면 사이즈 선택에 실패한 소비자들의 반품 요청이 쏟아질 수도 있다.


출처: Pinterest

물론 표준 치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국가 기술 표준원에서 고시하고 있는 KS 의류 치수 규격이 있다. 가슴둘레를 기준으로 85, 90, 95 등으로 표기하거나 S, M, L 등 범위를 기준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권장사항일뿐이라 매장들이 꼭 지켜야할 필요성은 없다는 것이 맹점이다. 일례로 여성복의 경우는 44, 55, 66 등으로 사이즈 표기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는 1999년 폐지된 제도다. 해당 사이즈 표기법은 1979년 측정된 표준 체형을 기준으로 한 탓에 현대인의 체형과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익숙함 때문인지 여전히 많은 매장에서 해당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고, 때문에 44~77 사이즈의 기준은 회사의 마케팅 전략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게 됐다. 신발처럼 수치 정보만으로도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명확한 표준이 세워지면 모호함을 덜 수 있을 테지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이탈리아 등 세계적으로도 입는 옷의 표준 사이즈를 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일각에서는 배너티 사이징 마케팅이 외모 코르셋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더 작은 사이즈의 옷을 권유하고 마른 몸매를 요구하는 사회적 시선으로 인해 소비자들(특히 여성들)이 큰 사이즈의 옷을 입는 것을 자신의 결함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어느정도 일리는 있다. 배너티 사이징 마케팅의 명암 가운데서 패션업계의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인터비즈 박근하, 그래픽 이정아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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