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청나라 군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저주받은 깃발

조회수 2018. 7. 16. 09: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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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조선에서는 두 가지 전쟁이 벌어진다. 바로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다. 동학군이 봉기하자 조선은 청나라에 원군을 청했다. 그런데 조선을 침공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일본도 조선에 문제가 생기면 동시 파병을 하기로 한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제멋대로 군대를 투입했다. 조선은 즉각 항의했지만 다른 나라 군대가 유유히 상륙해서 내륙으로 전진해도 저지할 군사력이 없었다.

포격 '안내판' 역할을 했던 청군의 깃발

출처: 위키백과
양무운동 결과 들어서게 된 근대 무기 제조공장에서 대포 · 탄약 등의 무기를 제조하고 있다.

17세기만 해도 청나라의 팔기군은 세계 최고의 군대였다. 아편전쟁으로 충격을 받은 청은 서양의 군수산업을 수입해 중흥 정책을 추진했다. 그것이 양무운동이다. 비록 양무운동이 부패로 얼룩지긴 했지만 청나라의 GDP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일본군과 최소한 동격이거나 더 좋은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출처: KBS 다큐1 '동아시아 뒤집히다, 청일전쟁' 캡처
충청남도 아산과 성환에서 일본군과 청군이 접전을 벌였다.

청군은 산둥반도를 출발해 아산으로 들어온 부대와 만주에서 출발해서 북부지방으로 들어온 2개 부대가 있었다. 청군의 주력은 만주군이었고 우세한 병력으로 서울에 있는 일본군을 축출할 예정이었다. 여단 규모인 아산의 청군은 그때 남북에서 협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좋았으나 일본군이 더 빨랐다. 일본의 오시마 장군은 과감하게 서울의 여단 병력을 빼서 아산의 청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의 병력은 보병 13개 중대, 공병 1개 중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대대로 약 2500명이었다. 반면 청군은 3500명 정도였다.

출처: KBS 다큐1 '동아시아 뒤집히다, 청일전쟁' 캡처
성환 전투의 무대가 되었던 안성천

7월 28일, 천안의 성환(成歡)에서 청군이 일본군을 가로막았다. 만주군이 내려오면 일본군은 꼼짝없이 갇히는 구조였다. 청 지휘관 섭지초는 수비전을 택했고 구릉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구릉 앞을 흐르는 안성천은 이곳에서 Y자로 갈라지기 때문에 일본군은 하천을 2개나 건너야 했다. 게다가 이 주변은 엄폐물이 하나도 없는 농경지였다. 일본군이 돌격해 오면 그들은 사냥하듯이 평지의 일본군을 저격할 수 있었다.

출처: sinojapanesewar.com
미즈노 토시카타가 묘사한 성환 전투 당시 안성천을 건너는 일본군 (일본인이 그렸기 때문에 일본군의 모습이 다소 과장되어 나타나 있다)

평택에서 내려온 일본군은 좌우익으로 나뉘어 공격을 개시했다. 마츠사키 대위가 이끄는 우익은 2개의 안성천을 건너 안궁리, 복모리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복모리 부락에 매복하고 있던 청군에게서 공격을 받았다. 지휘관 마츠사키 대위는 둑에 올라서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불리한 지형이었지만 지휘관의 사기에 고무돼서인지 일본군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공격해서 청군을 소탕했다.


하천을 확보한 일본군은 구릉의 청군 본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청군은 강력한 진지를 구축했지만 일본군의 포화가 집중되자 금세 동요했다. 청군의 대응포격은 포병의 실력이 형편없었던 탓에 거의 빗나갔다. 

출처: ArirangBook
1894년 일본에서 제작된 청일전쟁 석판화. 청군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노란색 깃발이 많이 보인다.

반면 일본군의 포격은 정확했다. 청군이 진지에 빽빽하게 꽂아놓은 깃발이 포격 안내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무선통신이 없던 옛날에는 통신수단이 깃발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지휘관의 권위와 위세를 나타내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포가 정확해진 현대전에서 깃발은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청군은 현대 무기를 들었을 뿐 전술과 마인드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300년도 더 지난 오래된 전술을 사용한 청나라 군대

출처: 다음백과
청일전쟁 중 일본군이 싸우는 모습

다음에 벌어진 평양(平壤) 전투는 더 크고 위험한 전투였다. 평양은 한국의 모든 성 중에서 최고의 요새였다. 그러나 청군은 이런 요새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원인은 무기와 요새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청나라 팔기군은 세습에 세습을 거듭해 온 특권 조직이었다. 사실 엄격한 교육과 내부 경쟁, 책임의식이 수반된다면 세습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팔기군은 그런 게 없었다. 없었을 뿐 아니라 거부했다. 전술과 혁신을 위한 노력도 당연히 없었다. 그들은 16세기에 만든 화기전술을 그대로 답습했다. 16세기의 화포는 부정확해서 80%는 위협용이었다. 그래서 무조건 적의 머리를 넘어 뒤쪽으로 날아가도록 조준해서 발사했다. 현대전에서는 적을 최대한 가까이 끌어들이고 정확하고 집중적으로 타격해야 한다. 그러나 청군은 일본군보다 더 좋은 포를 장비하고도 이런 포격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출처: 위키백과
1880-1890년대 사이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사무라이들의 사진

반면 일본군 장교단은 오랫동안 억눌렸던 사무라이의 후손이거나 명치유신 이후 성장한 근대 상공업자 출신이었다. 그들에게 군대는 상류 사회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덕분에 일본군 장교층은 누구보다도 출세욕이 넘치는 집단이 됐다.


추후 일본군이 사무라이 정신과 자결 같은 선동적인 무용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그 의미가 퇴색돼 버렸지만, 원래 일본 장교층의 장점은 노력과 책임감이었다. 또한 동양의 특징인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집단의식도 있었다. 

유럽 장교를 놀래킨 일본의 신개념 전술

출처: 위키백과
해양도 해전 당시 쓰였던 청군의 진원함(위)과 일군의 마쓰시다함(아래). 진원함은 1881년 독일 슈테틴(Stettin)에서 기공되었고 마쓰시다함은 1888년 프랑스에서 기공되었다.

일본 장교층의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난 전투가 9월 서해에서 벌어진 해양도(위치 미상, 압록강 하구에서 장산곶 사이로 추정) 해전이다. 양쪽의 군함은 유럽에서 수입한 중고 증기선으로 척수는 10척으로 동일했다. 그러나 장갑과 적재한 포의 위력, 크기는 청군이 우세했다. 고속 어뢰정도 6척이 더 있었다. 지휘관 정여창 제독은 청일전쟁에 참여한 중국 지휘관 중 제일 우수하고 뛰어난 인물이었다.


청군은 맞상대를 각오하고 배를 일렬로 정렬했다. 포함은 포가 측면에 배치되기 때문에 적군을 상대로 배의 측면을 노출시켜야 함포를 집중시킬 수 있다. 양군 포수의 실력이 엇비슷하다고 가정할 때 이렇게 서로 맞대결을 벌이면 장갑과 화력이 우세한 쪽이 유리하다. 

출처: 위키백과
해양도 해전 당시 일본군을 지휘했던 이토 스케유키

그런데 이토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군은 전혀 새로운 기동을 선보였다. 3, 4척이 한 팀이 돼 일렬종대로 청나라 함대의 맨 바깥쪽 전함으로 돌진한 것이다. 이렇게 일자로 돌격하면 포격 전면이 좁아져서 적군이 맞추기가 힘들어진다. 대신 공격 측도 앞쪽 대포만 사용해야 하므로 화력이 뚝 떨어진다.


그런데 일본 함대는 단순한 종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목표에 접근하면 제비가 수면을 치듯 급선회를 하면서 차례로 적함을 향해 측면 함포를 갈기고 치고 빠졌다.


청군을 횡대 대형으로 묶어 놓기 위해 다른 분대는 양동(적을 속이기 위하여 주된 공격 방향과는 다른 쪽에서 공격하는 일)으로 위장 공격을 감행해서 적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치고 빠진 분견대는 다시 선회해서 다른 전함을 공격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선회 전술은 지휘관의 판단과 병사들의 숙련이 필요하다. 파도 위에서 하는 이동, 선회 포격은 보기는 화려하지만 적함을 한 발도 맞추지 못할 수도 있다. 양동을 위해서는 지휘선의 통제와 각 전함들 간의 팀워크가 중요했는데 무전이 없던 시절이라 이 모든 기동을 수십 개가 줄줄이 달린 깃발 신호로 해야 했다. 

출처: 위키백과
일본 오가타 겟케이가 묘사한 해양도 해전

일본 수병들은 포격 중에 몸을 노출시키며 이런 신호와 조작을 완수했다. 견학 차 일본 함대에 탑승했던 유럽의 장교들은 처음 보는 일본군의 전술 수준을 보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 함대는 미미한 손상을 입은 반면 청군의 함대는 4척 이상이 침몰했다.


청일전쟁은 타성과 나태함에 빠진 '공룡기업'과 구성원 전체가 강한 의지로 불타는 '신흥기업'과의 싸움이었다. 아무리 우수한 자본력과 기술을 지니고 있어도 경쟁심과 책임감, 의지가 결여된 조직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13호
필자 임용한


필자 약력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경희대 한국사 전공 박사

- 연세대 사학과 졸업


인터비즈 박성지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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