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독일군을 참패로 이끈 결정적 실수

조회수 2018. 7. 2. 13:3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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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1941년 6월22일, 독일은 18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소련 침공 작전을 개시했다.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 침공 후 2개월 내에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개전 이후 몇 개월간 소련군은 독일군 앞에 연전연패를 당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11월부터 대반격에 나섰고, 이듬해 1월에는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독일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1943년에는 프리츠 만슈타인 원수가 이끄는 독일의 남부 집단군이 하르코프에서 소련군의 52개 사단을 궤멸시켰다. 이렇게 양국의 군대는 공격과 반격을 주고받으며 다음 해에도 치열한 싸움을 이어갔다.

독일과 소련의 대결, 쿠르스크 전투

그런데 곧 독일과 소련의 치열한 싸움의 분기점이 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때는 1943년 7월, 소련 영토 깊숙이 자리 잡은 쿠르스크라는 철도 교차지역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은 모든 전투력을 다 걸고 절체절명의 승부를 벌였다. 이것이 바로 쿠르스크 전투라고도 불리는 '치타델 작전'이었다.


만슈타인은 최대한 빨리 작전을 개시하자고 제안했다. 하르코프에서 이긴 독일군도 피해가 상당했으나 소련군도 탱크 등 많은 양의 장비를 손실해 전력이 더욱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이런 소련군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묵살하고 충분한 장비와 병력을 보충 받을 때까지 작전을 연기했다. 이는 만슈타인의 판단대로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시간을 번 소련군은 이 4개월 간 쿠르스크의 전선을 따라 겹겹의 방어선을 쳤고 수백 km에 달하는 참호를 팠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쿠르스크 전투 당시 쓰였던 전차. 쿠르스크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라고 불린다

비로소 작전이 개시되던 날, 북쪽에서는 중앙집단군이, 남쪽에서는 만슈타인이 이끄는 남부집단군이 각각 소련군을 공격해 서로 합류할 계획이었다. 남부집단군은 소련군의 저항을 뚫고 계획대로 진격했지만 중앙집단군은 제대로 전진하지 못하고 발이 묶여버렸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독일군의 손실보다 소련군의 손실이 훨씬 컸다.


그런데 작전 개시 후 일주일 뒤에 히틀러는 돌연 작전 중단을 명령했다. 7월10일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했으니 동부 전선에 투입된 전력의 상당 부분은 이를 막기 위해 전용(轉用)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에 만슈타인은 전력을 완전히 소진한 소련군은 더 이상 버틸 여력이 별로 없으니 아직 투입하지 않은 아군의 예비대를 이용해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전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당시 소련군은 실제로 더 이상 버틸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의견을 또 묵살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히틀러와 만슈타인

이후 히틀러와 만슈타인 간의 의견 충돌은 갈수록 더 심해졌다. 결국 1944년,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장군을 임명했다. 이후 히틀러는 더욱 깊숙이 작전에 개입하며 무리한 명령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이에 전선은 갈수록 엉망진창이 됐고, 이는 결국 동부 전선에서 패배를 앞당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히틀러는 큰 방향만 정해주고, 실제 작전은 일선 장군들에게 믿고 맡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몇 번의 큰 승리를 맛본 히틀러는 현장의 소리보다는 자신의 ‘영감’을 믿었다. 이후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히틀러가 직접 기획, 지휘한 ‘벌지 전투’에서 남은 전력을 쏟아붓고 패한 뒤 급속히 몰락해갔다.

미쓰비시의 록펠러센터 인수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록펠러센터에는 금융회사, 출판사, 방송사 등이 입주해있다. 록펠러센터는 미국 비즈니스의 상징이자 뉴욕 최고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부에는 록펠러센터라는 19개의 상업 빌딩으로 이루어진 큰 빌딩군이 있다. 석유왕 록펠러가 컬럼비아대로부터 이 부지를 임차한 후 건설한 곳이다. 그런데 1985년, 그때까지 대지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컬럼비아대가 이를 4억 달러(현재 환율 기준 약 4300억 원)에 부동산 관리업체인 RGI(Rockefeller Group Inc., 록펠러 트러스트가 소유한 기업)에 매각했다. 빌딩군의 19개 빌딩 중 5개는 이전에 다른 업체에 매각됐던 터라 결국 RGI는 총 14개의 빌딩과 대지를 소유하게 됐다.


그런데 대지 소유권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1989년, 일본 미쓰비시그룹의 계열사인 미쓰비시 이스테이트라는 부동산 개발 및 투자 업체가 RGI의 주식 대부분을 인수했다. 그 결과 록펠러센터의 소유권은 일본의 미쓰비시그룹에 넘어갔다.  


미쓰비시 이스테이트가 RGI 지분 확보에 14억 달러(약 1조 5000억 원)나 지불하고 록펠러센터를 인수한 것은 나름대로의 내부 논리가 있었다. 록펠러센터에 입주한 회사들의 상당수는 1990년대 초에 계약을 갱신하게 돼 있었다. 이에 경영진은 1980년대 초호황기의 일본 부동산 시장에서처럼 임대료를 크게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들은 14억 달러의 투자금액이 결코 과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출처: 유튜브 캡처
일본 버블 경제의 상징인 도쿄 줄리아나 클럽에서 사람들이 유흥을 즐기는 모습. 1980년대에 일본에서는 주가와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며 경제가 호황을 이루었다.

문제는 RGI가 이전에 록펠러 센터의 12개 빌딩을 담보로 13억 달러(약 1조 4000억 원)에 달하는 장기 모기지 대출을 받은 이력이 있다는 점이다. 미쓰비시가 인수할 당시에 이 모기지 대출에 대한 이자 지급 규모는 입주사들로부터 받는 임대료 수입을 크게 상회하고 있었다. 만약 미쓰비시의 예상이 빗나가서 세입자들과 임대료 갱신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임대료 수익이 대출 이자를 갚기에 모자랄 수도 있다는 리스크가 있었다. 하지만 임대료 인상을 낙관한 미쓰비시의 경영진은 인수 결정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991년 걸프전의 여파로 미국에도 불황의 그림자가 닥치자 미국 부동산 시장도 급랭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록펠러센터의 임대료 갱신도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임대료 수입으로 이자를 갚지 못하는 상황이 길어지자 RGI의 누적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결국 1995년 모회사인 미쓰비시 이스테이트는 법원에 RGI의 파산 보호 신청을 냈고 담보가 걸려 있는 12개 빌딩의 소유권을 채무변제 명목으로 채권단에 넘겼다. 이 결정 때문에 미쓰비시 이스테이트의 손익계산서에는 일본 돈으로 1600억 엔(약 1조 5000억 원)의 특별 손실이 반영됐다. 투자한 거의 모든 금액을 손해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1980년대 후반 미국의 학계 및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미국 부동산 시장의 활황이 버블이라고 경고했다. 한참 후에 나온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일본인 주재원들도 같은 내용을 경고했었다. 하지만 미쓰비시 이스테이트의 경영진은 이런 ‘현장의 목소리’를 묵살했다. 그때까지 제한적으로 해외영업을 하던 일본의 은행, 보험사 등의 최고 경영진은 글로벌화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매우 모자란 상태였다. 이 금융회사들로부터 자금을 공급받아 국내 시장에서만 영업을 해오던 일본 부동산 회사의 최고 경영진도 당연히 글로벌 시장에 대한 이해력이 모자랐다. 이 상태에서 국내 부동산 시장의 초호황으로 생긴 돈을 무작정 해외에 투자한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들의 투자 결정은 대부분 이런 낙관적인 가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만약 이들 회사에, 최종 투자 결정을 앞두고 몇 번이고 출장을 가서 현장의 의견을 청취했던 임원들이 단 몇 명만 있었어도 이런 손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97호
필자 김경원

필자 약력

-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장, CJ 그룹 전략기획 총괄 부사장, 디큐브시티 대표 역임

- 現 세종대 경영전문대학원장


인터비즈 박성지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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