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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 수퍼패스트

조회수 2018. 8. 13. 10:0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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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의 '마지막' 3종 세트

지난 20년간 수많은 페라리를 몰아봤고, 그때마다 좋은 차라고 생각했을지언정 사랑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졌다.

Writer 신동헌: 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 자동차 전문 블로거 '까남'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간혹 평생 경험해보지 못할 것과 사랑에 빠지곤 한다. 피가 뜨거운 청년기에는 스크린 속 여배우의 눈빛에 운명적인 무언가를 느끼기도 하고,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지나가는 이성에게 폭발적인 심장 박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거야 뭐 호르몬 분비가 안정을 찾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창피하고도 흐뭇한 추억으로 남겨놓으면 되지만, 나잇살이나 먹은 남자가 실현 가능성이 극도로 낮은 것과 사랑에 빠져버리면 그야말로 답이 없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소년들은 철이 들면 벽에 붙여놓은 페라리 포스터를 떼어낸다. 절벽 위에 핀 꽃처럼 우러러보다가도, 절대 손에 닿지 않을 것임을 아는 순간 본능적으로 감정이 사라진다. 일종의 자기방어 본능인 셈이다.

그런데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페라리와 사랑에 빠졌다.


모양은 멋진 1990년대의 페라리 FR 스포츠카를 망치로 몇 대 친 것처럼 생겼고, 공기역학을 위해 설계했을 구멍들은 망치질에 찢어진 것처럼 볼품없는데도 사랑에 빠졌다. 시동을 걸고 엔진이 돌기 시작하고, 뒷바퀴가 구르면서 달려나가는 일련의 과정은 지금까지 만난 여느 페라리와 다르지 않은데도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페라리를 처음 몰아본다면 사랑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겠으나, 나는 지난 20년간 수많은 페라리를 몰아봤고, 그때마다 좋은 차라고 생각했을지언정 사랑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린 적은 없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런데 사랑에 빠졌다.

이 차의 이름은 812 슈퍼패스트.


기다란 보닛 안에 V형 자연흡기 12기통 엔진을 장착하고 뒷바퀴를 굴리는 평범한(?) 페라리다. 12기통 엔진을 앞에 싣고 뒷바퀴를 굴리는 그란 투리스모 성향의 페라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50년이었다. 엔초 페라리의 취향은 좀 더 날렵해서 트랙에서도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차였지만, 페라리의 가장 큰 시장으로 떠오른 미국 사람들은 좀 더 느긋하고 여유롭게 달릴 수 있는 차를 원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아메리카’ 시리즈였다. 1950년 340 아메리카로 시작해 342 아메리카, 375 아메리카로 이어지다 1955년에 등장한 410부터는 ‘아메리카’ 대신 ‘슈퍼아메리카’라는 이름이 붙었다. 숫자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더 큰 엔진으로 향상된 성능과 편안해진 항속 능력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64년에 등장한 아메리카 라인의 최고봉 모델에는 ‘슈퍼아메리카’ 이상의 차라는 의미로 ‘슈퍼패스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피닌파리나 디자인의 차체를 채택했고, 5리터 V12 엔진으로 400마력을 냈다. 1998년에 등장해 우는 아이도 그치는 카리스마를 떨쳤던 BMW E39 M5와 같은 출력을 34년 먼저 낸 셈이다.

500 슈퍼패스트가 단종된 1966년 이래 50여 년 만에 다시 ‘슈퍼패스트’라는 이름이 부활한 이유는 분명하다. 1950년대 페라리의 여명기를 풍요롭게 했던 아메리카 시리즈의 마지막을 슈퍼패스트로 장식한 것처럼, 550 마라넬로, 599 GTB 피오라노, F12를 거쳐온 자연흡기 V 12기통 엔진 FR 시대의 마지막을 ‘슈퍼패스트’라는 이름으로 정리하려는 것이다.

이 차는 마지막 자연흡기 엔진, 마지막 V 12기통, 마지막 FR이 될 가능성이 높다.


환경 규제 때문에 자연흡기 방식은 이미 다른 스포츠카 메이커들도 모두 포기한 지 오래다. 배기가스를 컨트롤하기 쉬운 터보가 이미 자리 잡았고, 페라리도 812 슈퍼패스트를 제외한 다른 모델은 이미 터보화가 진행됐다. 12기통 엔진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상징성 때문에 페라리와 람보르기니, 애스턴 마틴 등의 스포츠카 브랜드와 롤스로이스, 벤틀리 등 럭셔리 세단 브랜드들이 아직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부여잡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더 작은 엔진으로도 12기통 못잖은 효율과 성능을 낼 수 있는 상황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12기통의 특성이라면 이제는 무거운 회전감이나 코너링 시의 과도한 엔진 무게 정도일 뿐이다. 정신적인 부분만을 위해서 유지하기에 12개의 피스톤은 너무 많다. 페라리는 이미 F1에서 전기모터를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익혔으니 피스톤 몇 개 줄이고 모터 집어넣어서 12기통 뺨치게 부드럽고 강력한 힘을 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후륜구동은 ‘싸나이’의 구동 방식이기는 하지만, 요즘 ‘싸나이’가 너무 적은 게 문제다. 후륜구동을 존재 이유로 삼던 수많은 브랜드들이 전륜구동과 AWD로 옮겨 타고, 소비자도 그걸 반갑게 여기는 분위기다. 액셀러레이터를 과격하게 밟아서 꽁무니를 미끄러뜨리는 건, 머리를 기르고 가죽 바지를 입고 전자기타를 치는 것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다. 스케이트보드도 이제 더 이상 틱택을 하지 않고 그냥 발로 슥슥 밀면서 달리는 크루저 보드가 대세인 시대. 후륜구동을 타는 사람 중에 뒷바퀴를 미끄러뜨릴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AWD로 전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페라리도 이미 FF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한 바 있다. FF를 타보면 AWD가 무겁다느니 핸들링이 안 좋다느니 하는 말도 할 수 없다. 충분히 재미있고 충분히 가볍고 충분히 안정적이다.


페라리는 자연흡기도, V12도, 후륜구동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냥 털어버리고 이미 개발이 완료된 다음 세대의 기술을 투입하기만 하면 된다. 전 세계 페라리 오너들은 현금 다발을 쥐고 새로운 모델 만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전륜구동 패밀리밴을 만들어도 1년씩 줄을 설 거다(사실 페라리가 패밀리밴을 만들면 3년쯤 줄서야 할지도 모른다. 안 만들어서 문제지).

그러나 페라리가 차가워 보여도 의외로 정이 많다. 엔초 페라리 시절부터 ‘츤데레’ 기질이 있어서 자기 뜻 외에는 무시하는 척하면서도 알고 보면 다 들어주는 게 페라리다. 아메리카도 그렇게 태어난 라인이고, 2+2 시트 구성의 차들도 오너의 어리광을 들어준 결과다. 페라리의 투 시터 그란 투리스모가 앞으로 어떤 형태로 바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시대의 끝을 기념하는 의미로 ‘슈퍼패스트’라는 이름을 다시 컴백시킨 거다. 오너들은 이 차를 타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연흡기 12기통 후륜구동 쿠페를 마지막으로 추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운전석에 앉아보면 보닛은 저 멀리까지 뻗어 있다. 쉽게 볼 수 있는 4기통과는 사이즈가 완전히 다른 V형 12기통 엔진은 보닛 안에서 넉넉하게 자리해 있고, 앞바퀴는 그 엔진 너머에 멀찌감치 자리 잡아서, 스티어링 휠을 돌려보면 내 차가 아니라 앞차 바퀴를 돌리는 느낌이다. 빡빡한 답력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공기를 힘껏 들이마신 엔진이 돌기 시작한다. 크랭크 길이가 12m는 되는 것 같다. 무겁게 슝슝 돌기 시작하는데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줘서 밟으면 그 무게가 갑자기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회전수가 치솟는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굉음을 내며 회전하는 엔진의 존재감만으로도 황홀경에 빠진다. 가속감이나 코너링 성능은 사실 논할 의미가 없다. 페라리 빠른 거 모르는 사람도 없고, 이 차로 그렇게 빨리 달리고 싶어 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속도를 위해 태어났지만 속도는 별 의미 없는 차이기 때문에 ‘슈퍼패스트’라는 낯 뜨거운 이름을 달 수 있는 거다.


이 차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실감한 순간 오래된 데자뷔를 느낀다. 피가 뜨거웠던 시절 어디에선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던 때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아직 살아 있다. 아직 늙지 않았다. 뭐 그런 자아도취의 감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사랑에 빠진 거다. 앞뒤 재지 않고 사랑에 눈멀었던 시절의 감각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우리 집 주차장에 들어가는지, 기름 값이 한 달에 얼마나 되는지, 신용등급이 나오기는 하는지 뭐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꽂히기 때문에 사랑인 거다. 이 차를 탈 수 있다면, 이 사랑을 이룰 수 있다면 야반도주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끝내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허황된 망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페라리는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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