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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돼지'의 역습

조회수 2018. 6. 25. 09:1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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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의 가장 유명한 경주차 '분홍돼지'가 돌아왔다.
Writer 신동헌: 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 자동차 전문 블로거 '까남'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4년, 포르쉐가 다시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당시 그들은 16번의 종합 우승 타이틀을 갖고 있었고, 같은 그룹 내에 속한 아우디가 그 기록을 깨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붓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솥밥 먹는 식구끼리 피 흘리며 경쟁하는 이유가 이해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80년 넘는 르망의 역사 속에서도 가장 흥미진진한 순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16년 만에 돌아온 포르쉐도 총 열세 번의 우승 중 다섯 번을 연달아 차지한 신세대(?) 아우디를 꺾을 수는 없었다. 2014년 타이틀은 아우디가 차지했고, 포르쉐는 토요타팀은 물론 하위 클래스인 LMP2 경주차들에도 뒤지며 세월의 흐름을 맛봐야 했다.

2015년 레이스는 더더욱 흥미진진했다. 24시간 동안 아우디와 엎치락뒤치락 경쟁을 펼치다 결국 17년 만에 열일곱 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새로운 드라마를 썼다. 이후 2016년, 2017년까지 포르쉐는 계속 아우디와 토요타를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고, 총 열아홉 번의 르망 톱클래스 우승을 끝으로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의 톱클래스 무대에서 다시 사라져갔다. 아우디도 함께 르망 미출전을 선언했기 때문에 아마도 포르쉐의 기록은 당분간 깨지기 힘들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마치 한 시대의 끝을 고하는 것처럼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이제 르망의 LMP1에는 토요타 팩토리팀만 쓸쓸하게 남아 있으니, 100년도 채우지 못하고 르망 역사가 끝난다고 여긴 사람도 많을 것이다. 포르쉐가 그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물론 포르쉐가 레이스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스포츠카만을 만드는 브랜드가 모터스포츠를 떠날 수는 없는 법. 포르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전기차 레이스인 포뮬러e와 양산 차종을 베이스로 하는 GT 클래스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과거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는 트랙 한쪽에 레이싱카를 세워두고, 드라이버는 반대편에 서 있다가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면 쏜살같이 뛰어가 경주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건 후 출발하는 방식이었다. 포르쉐의 시동 키 꽂는 곳이 왼쪽에 있는 것도, 시동을 거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기어 변속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차의 곳곳에 르망 역사가 숨어 있는데, 쉽게 떠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포르쉐는 르망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대표 모델이자 존재 그 자체이기도 한 911에 좀 더 힘을 쏟기로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의 가장 인상적인 한 장면을 가져오기로 했다. 바로 ‘분홍돼지’를 되살려낸 것이다.

포르쉐가 르망의 톱클래스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것은 1970년이다. 포르쉐는 수평대향 12기통 엔진(현행 911의 엔진을 두 개 연결했다고 상상해보라!)을 장착한 917 경주차를 1969년부터 르망에 투입했다. 페라리와 벤틀리, 알파 로메오가 12기통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 포르쉐는 비틀의 자그마한 수평대향 4기통 엔진을 개조해 경량 스포츠카를 만들던 회사였다. 아무리 공학 천재 포르쉐 박사가 이끈다고 해도, 갑자기 최고의 12기통을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공기 역학을 이용해 직진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차체 뒷부분을 길게 늘려 통상 ‘롱 테일(Long Tail)’이라고 불리는 917L, 차체를 짧게 만들어 경쾌한 움직임에 집중한 ‘쇼트 테일(Short Tail)’ 917K 등으로 동시에 경기에 참가했다.

두 모델의 장점을 혼합하기 위한 에어로 다이내믹 테스트 모델도 있었는데, 이름은 917/20이었다. 이 차는 길이가 917K처럼 짧지만 폭이 더 넓어졌고, 공기의 흐름을 정류하기 위해 펜더를 부풀리고 뒤쪽에 날개처럼 생긴 핀을 추가하는 등 일반적인 911과 모양이 많이 달랐다. 이 차가 달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별명을 지어줬는데, 다름 아닌 ‘돼지’였다. 뚱뚱하고 땅딸한 데다 전면부의 공기흡입구가 돼지코처럼 생겨서였다.

1970년의 우승에 힘을 얻은 포르쉐는 다양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 1971년 르망에 917L, 917K와 함께 917/20도 출전시키기로 했다. 차체는 아예 핑크색으로 칠한 후 돼지고기 부위별 분류법을 새겨 넣었다. 놀림을 받느니 스스로 돼지임을 자처하기로 한 것이다. 이 차는 송로버섯을 찾는 데 돼지가 사용되는 것에 빗대어 ‘트러플 헌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해에 포르쉐는 페라리 512M 세 대를 누르고 원투 피니시로 경기를 끝냈다. 3~5위를 차지한 페라리 석 대만 빼면 여러 클래스를 아우르며 12위까지 모두 포르쉐였다. 석 대의 톱클래스 참가 차량 중 917/20만 경기를 끝마치지 못하고 리타이어했지만, 이 차는 독특한 컬러링과 귀여운 이미지의 디자인 덕분에 지금까지도 가장 유명한 포르쉐 경주차 중 하나다.


그리고 2018년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에서, 포르쉐는 LM-GTE 클래스에 이 분홍돼지를 다시 투입했다. 2018년형 911RSR을 1971년형 917/20과 같은 컬러로 도색해 경기에 내보낸 것이다. 포르쉐의 919RSR은 4리터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을 실은 LM-GTE 클래스 참가용 레이싱카다. 911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고, 형태도 거의 비슷하지만, 폭이 훨씬 넓은 게 외관상 차이점이다. 엔진이 뒷바퀴 앞에 놓여 있어 시판용 911과 달리 미드십 구조이며, 프런트 서스펜션도 맥퍼슨 스트럿 방식이 아니라 더블 위시본이다. 시판용 911에 요구되는 편의성이나 승차감, 정비성 등을 배제하고 오직 빨리 달리기 위한 목적을 위해 진화한 최종형 911인 셈이다.


Quick Facts

1971년은 스티브 맥퀸이 영화 <르망>을 찍은 해이기도 한데, 그 영화에 쓰였던 917은 1400만 달러에 팔려서 지금까지도 ‘가장 비싼 포르쉐’의 기록을 갖고 있다.


1971년 르망 우승 차량인 마티니 레이싱팀의 917K가 세운 24시간 동안의 주행 거리 기록은 2010년까지 깨지지 않았다. 이 차가 세운 패스티스트 랩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이 때 이후로 서킷 형태가 좀 달라지긴 했다).

917/20을 타고 리타이어한 라인홀트 요에스트는 후에 아우디와 함께 아우디-요에스트 스포츠팀을 꾸려 포르쉐의 영광을 이어가는 그 사람이다.


917의 설계는 한스 메츠거가 맡았는데, 그는 최초의 911, 최초의 911 터보 등을 개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설계한 엔진은 포르쉐가 르망에 복귀하기 전 마지막 우승 차량인 911 GT1에도 실렸으며, F1에 터보가 장착됐던 1980년대에 우승을 차지한 맥라렌 MP4/2에도 실렸다.


5374cc 수평대향 12기통 트윈 터보 엔진을 장착한 917/30은 1580마력을 발휘하며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 2.3초밖에 안 걸린다. 최고속도는 390km/h. 1973년에 만들어진 차지만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을 가진, 가장 강력한 파워를 가진 레이싱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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