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식사의 즐거움

조회수 2019. 3. 26. 16: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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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아침식사는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교토에서 경험한 어느 인상적인 아침식사 이야기.

아침식사에 대해서는 과대평가와 과소평가가 공존한다. 거르지 말고 꼭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제대로 먹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침에 얼마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식사를 할 것인지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챙겨 먹기 쉽지 않다.아침 식사는 어쩌면 메뉴의 문제라기보다는 시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바쁜 아침에는 눈앞에 어떤 진수성찬이 차려진다고 해도 달콤한 아침잠 앞에서 무력하다. 


아침식사의 즐거움을 되찾는 때는 그래서 여행이다. 꼭 일어나야 하는 시간도 없고 전철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알람이 울리지도 않다. 내가 직접 음식을 차릴 필요도 없다. 호텔 조식당에서 끊임없이 채워주는 커피를 마시며 평소엔 생전 보지 않던 종이신문을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읽는다. 매일매일 비슷한 음식이 나오는 호텔 조식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다. 호텔 밖으로 나와서 제대로 아침을 즐길 식당을 찾아보는 즐거움 역시 놓치고 싶지 않다. 교토 같은 도시라면 더더욱.



조식 키신(朝食 喜心)


“아침식사(朝食)”와 “즐거운 마음(喜心)”이라는 단어의 조합에서부터 벌써 즐거운 아침식사를 제공하겠다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카운터 앞에 선 젊은 셰프는 ‘교토의 아침을 고민한다’고 했다. 그동안 수많은 식당을 다녔지만 어떤 셰프에게서도 아침식사를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가 고민한 교토의 아침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자리에 앉자 카운터 너머로 묵직한 뚝배기가 보인다. 일본 요리집에서는 주로 토기 뚝배기인 도나베(土鍋)로 밥을 짓는다. 흙으로 두툼하게 빚은 도나베 특유의 안정적인 열전도 덕분에 밥이 더 맛있게 지어진다. 어디 것인지 물어보니 시가현 히코네의 나카카와 이치시로(中川一志?) 라는 작가의 작품이었다. 수 년의 연구 끝에 한정 제작된 도나베라니 밥맛이 더 기대가 된다. 밥이 익기 기다리는 동안 밥그릇을 골라달라고 했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에 드는 걸 집었다. 이 밥그릇들은 가마쿠라의 그릇가게 쇼켄(うつわ祥見)의 것들이라고 했다.

밥이 막 끓었다며 밥솥을 들고 자리까지 왔다. 쌀이 끓은 직후에 갓 익은 밥을 ‘니에바나煮え花’ 라고 부른다. 직역하면 ‘끓고 있는 꽃’, 뜸을 들이기 직전의 밥이다. 아까 고른 밥그릇에 한 숟갈 담아주었다. 잘 익은 밥 냄새가 작은 그릇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코를 대고 밥의 향기를 마지막으로 맡아본 것이 언제였던가? 아직 뜸이 들기 전이라 쌀알이 촉촉하게 다 살아 있다. 조금 덜어 입안에 넣자 식욕이 확 돌았다. 막 익은 흰쌀만이 줄 수 있는 특유의 단맛. 밥 자체가 그야말로 훌륭한 애피타이저였다.

뜸이 다 든 밥은 된장국과 함께 나왔다. 국과 반찬 두 가지의 단출한 차림. 이 음식들이 왜 교토의 아침인지를 알려주는 시로 미소(白味?)국과 그 위에 올려진 붉은 빛이 선명한 교닌진(京人?,교토 당근)과 나노하나(菜の花).두 야채 모두 교토의 늦겨울과 초봄을 대표하는 재료들이다.교토 사람들은 단 맛이 도는 흰 된장만으로 된장국을 끓인다. 갓 지은 밥과 돼지고기의 지방의 고소함이 된장국의 단 맛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한 그릇 금세 비우고 또 한 그릇을 청했다. 그리고 계란을 추가했다. 교토 근교의 오하라(大原)의 농장에서 생산된 계란은 숟가락을 대도 노른자의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신선했다. 간장을 살짝 부어서 밥과 함께 비벼 먹는다. 두 번째 그릇도 순식간에 비워졌다. 빈 그릇에 누룽지를 한 조각 떼어다 얹어주었다. 잘 익은 누룽지에서는 구수한 향이 났다. 



오직 밥의 힘만으로 애피타이저와 메인, 그리고 후식으로 이어지는 서사를 납득하게 만드는 식사였다. 밥이 익는 모든 과정을 차분하게 즐기도록 설계된 하나의 완결된 코스요리를 먹은 기분이 들었다. 잘 지어진 밥의 향기, 오늘은 어떤 그릇을 쓸까 고르는 차분한 마음, 갓 지은 밥을 퍼서 맛을 보는 순간, 반찬 가짓수는 많지 않지만 잘 끓인 국과 함께 차분하게 먹는 흰 쌀밥, 입 맛이 돌아 조금 더 먹을지 망설이는 마음, 신선한 계란을 비벼 마지막 밥 한 톨까지 먹는 아침 식사, 그렇게 하루를 든든하게 시작하는 느낌. ‘아, 원래 이런 것이 아침식사의 즐거움이었지’라는 기분이 환기되는 경험이었다. 



아마도 매일 이렇게 1시간 넘는 아침을 먹기는 어려울 것이다. 교토에 사는 생활인들의 아침도 우리의 평범한 아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식당은 이상적인 아침식사를 재현해주는 곳,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즐기게 해주는 곳이다. 그야말로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결국 다시 아침마다 알람 시계가 울려대는 일상으로 돌아가야겠지만, 이 단단한 아침의 느낌만큼은 잊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식당을 나섰다.


이카로(イカロ)

교토의 명점 기쿠노이(菊乃井)출신의 젊은 셰프가 2016년에 차린 식당. 원래는 편안한 느낌의 가이세키 요리를 내는 곳이지만 미리 예약하면 아침식사도 가능하다. 아침에는 딱 두 팀만 받기 때문에 일찍 예약하는 편이 좋다. 일본 각지의 고시히카리 쌀을 가지고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도나베 가마도상(かまどさん)으로 밥을 짓는다. 아침 식사지만 기본적인 가이세키의 틀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 이른 아침부터 튀김이라니 좀 헤비하지 않나 싶지만 자기도 모르게 맥주를 주문할 수도 있게 된다.


효테이(瓢亭)

이 곳은400년 전부터 난젠지의 순례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미슐랭 3스타의 가이세키집이 되었다. 풀코스로 식사하긴 가격이 부담스럽지만 아침식사는 적당한 가격에 이 식당의 음식을 경험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구성. 특히 수백 년 동안 상에 올라온 이 식당의 대표 메뉴 반숙 계란도 포함되어 있다. 조롱박이 효테이의 상징인데 그걸 활용한 삼단 도시락에 음식이 담겨 나온다. 식사로 죽이 나오는데 계절마다 재료를 조금씩 달리해서 쓴다. 올겨울에는 미나리 닭죽이 나왔다. 기름기를 거의 남기지 않고 끓여내서 가벼운 감칠맛과 미나리 특유의 상큼함의 조합이 매우 인상적.




WRITER 신현호 : 여행, 음식, 그릇에 관심이 많은 뉴욕 거주 푸드 칼럼니스트. 부업은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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