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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D 파먹기

조회수 2019. 9. 17. 14:3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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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보다 더 선택의 폭이 넓은 방구석 1열 추천작

Writer 정준화 : 디지털 기획자. 틈나는 대로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쓴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언더 더 스킨>은 모종의 임무를 띄고 지구에 배치돼 희생자들을 사냥하는 외계인 노동자에 관한 로드 무비다. 몇 년 전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 위해 주인공 스칼렛 요한슨처럼 길고 쓸쓸한 여정을 떠나야 했다. 서울 내 상영관은 단 한 곳이었고 기회는 07:00과 25:00, 하루 두 차례뿐이었다(그렇다. 극장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다). 그나마도 개봉 일주일 뒤 주말에는 간판이 아예 내려갈 상황이었기 때문에 평일 연차 찬스까지 동원하고서야 간신히 관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는 조나단 글레이저와 스칼렛 요한슨 모두의 팬이지만 두 사람이 차기작에서 재회한다고 해도 같은 시도를 반복할 자신은 없다.


극장은 많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마블의 신작이나 1천만 관객 달성의 야심을 불태우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이외의 작품이 보고 싶다면 방법은 두 가지다. 평일 연차를 써서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 시간대의 티켓을 곱빼기 커피와 함께 구입하거나, 집에서 VOD 서비스 업데이트 상황을 꼼꼼하게 체크하거나. 요즘은 정식 개봉을 생략하고 2차 매체로 직행하는 경우가 점점 더 늘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예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도 많다. 흥행 여부가 불투명해 보인다면 유명 감독이나 스타급 배우의 프로젝트라고 해도 딱히 특별한 대접을 받기가 어렵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파이크 리, 이안 같은 거물들도 모두 한국에서 상영관을 잡는 데 실패한 이력이 있다.


그래서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은 점점 줄고 있지만 TV로 확인해야 할 영화는 학습지처럼 자꾸 쌓여가는 중이다. 별다른 약속이 없었던 어느 주말에 묵은 식재료 처리를 하는 기분으로 VOD 서비스를 털어 보기로 했다. 냉장고 파먹기가 아닌 TV 파먹기 정도가 될까. 언젠가는 감상해야겠다고 마음속의 장바구니에 담아뒀다가 잊었던 작품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극장에서는 끝내 제 자리를 찾지 못했던, 하지만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다소 아쉬운 몇 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로데오 카우보이

출처: Sony Pictures Classics

마블 스튜디오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확실한 티켓 파워를 발휘하는 이름이다. 브랜드 자체가 이미 막강한 만큼, 인력 기용에서는 검증된 카드보다 참신한 가능성에 배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토르 : 라그나로크> <토르 : 러브 앤 썬더>의 타이카 와이티티, <스파이더맨 : 홈커밍> <스파이더맨 : 파프롬홈>의 존 왓츠, <블랙 위도우>의 케이트 쇼트랜드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목받는 신인 감독 클로이 자오도 안젤리나 졸리, 마동석 등이 출연할 <이터널스>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에 합류하게 됐다.


그녀의 전작인 <로데오 카우보이>는 2017년 칸 영화제 감독 주간을 시작으로 수많은 국제 영화제에 초청되며 호평을 받았다. 낙마 사고로 큰 부상을 입은 뒤 후유증에 시달리는 카우보이 브래디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되찾고 싶어 하지만 상황은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크립토나이트를 쬔 슈퍼맨이나 묠니르를 잃어버린 토르처럼 한순간에 힘을 잃어버린 영웅의 서사인 셈이다. 감독은 마초적인 세계의 압박감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직시해야 하는 주인공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어쩌면 이 섬세한 드라마에는 <이터널스>가 그리려는 슈퍼 히어로들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극장 개봉 없이 2차 매체로 조용하게 소개된 <로데오 카우보이>는 픽션과 현실을 교묘하게 뒤섞은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주연을 맡은 브래디 잰드로는 실제로 주인공과 비슷한 사고를 겪었던 카우보이 출신 아마추어 배우다. 극중 가족으로 등장하는 연기자들도 그의 친 아버지와 동생이다. 캐릭터와 배우는 그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기 힘들 정도로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다. 연기적 테크닉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단단한 순간들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위도우즈

출처: Twentieth Century Fox

<노예 12년> <셰임>의 스티브 맥퀸이 연출을 맡았고, <나를 찾아줘>의 원작자인 길리언 플린이 시나리오를 맡았다. 바이올라 데이비스, 미셸 로드리게즈, 리암 니슨, 콜린 패럴 등으로 구성된 출연진도 쟁쟁하다. 이쯤 되면 극장 개봉이 당연해 보이는 프로젝트지만, 1983년에 방영된 동명의 영국 미니시리즈를 각색한 <위도우즈>는 한국에서 2차 매체로만 소개된 뒤 조용히 잊혀 버렸다.


설정은 흥미진진하다. 네 명의 강도단이 경찰과의 추격전 끝에 전원 사망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리더였던 해리의 아내인 베로니카는 남편에게 받아야 할 빚이 있다고 주장하는 갱단의 협박까지 받게 된다. 궁지에 몰린 그녀는 다른 미망인들에게 연락을 취한다. 팀을 꾸려 남편들이 실패한 범죄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다. 스티브 맥퀸은 하이스트 무비의 공식을 자신만의 리듬으로 변주하는 데 성공한다. 액션의 쾌감과 흥분보다는 캐릭터들의 긴장감과 드라마의 힘이 더 중요한 스릴러다. 각색을 담당한 작가 길리언 플린 역시 남성들에게 독점되다시피 했던 장르를 여성의 관점으로 믿음직스럽게 재구축했다.




에이스 그레이드

출처: A24

존 휴즈의 <조찬 클럽>부터 켈리 프레몬의 <지랄발광 17세>까지, 모든 세대는 저마다의 성장 영화를 적어도 하나씩은 갖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디테일은 달라지지만 캐릭터들이 느끼는 감정의 본질은 엇비슷하다. 성장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흥분되면서도 고통스러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참 나이를 먹은 뒤에도 틴에이저 무비에 공감할 수 있는 건 그 세계에 충분히 과거의 나를 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 번햄의 <에이스 그레이드>는 중학교 졸업반, 즉 8학년을 일주일 남짓 남겨둔 레일라의 이야기다. 학교에서 ‘가장 조용한 아이’로 꼽힐 만큼 존재감이 희미한 주인공은 고등학교에 가기 전,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한 걸음을 더 내디딜 결심을 한다. 일기장 대신 브이로그에 속마음을 털어놓고 페이스북은 한물갔다고 생각하며 스냅챗을 섹스팅 채널 정도로 취급하는 10대들의 좁은 커뮤니티를 다루고 있지만, 스스로에 대해 거듭 실망하면서도 다시 한번 불확실한 기대를 걸어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이 영화의 엔딩을 오래 기억하게 될 거다. 북미 개봉 당시 영화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신선도 지수 99%를 기록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고 흥행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둔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최근 극장 개봉 없이 2차 매체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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