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상담소

조회수 2019. 6. 17. 15:1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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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나란히 초청된 봉준호와 쿠엔틴 타란티노는 기자들에게 비슷한 부탁을 했다. 리뷰 작성 시 가능한 한 줄거리 노출을 피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전에는 <어벤져스 : 엔드게임>의 스포일러 금지 캠페인이 화제였다. 감독과 출연진은 투표 독려라도 하듯 #DontSpoilTheEndgame 이라는 해시태그를 홍보했다. 


SNS 활용이 일상이 되면서 스포일러의 유통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제작진이나 관객 모두 프로젝트의 보안에 예민해지고 있다. ‘사전 정보가 감상의 즐거움에 실제로 해가 되는가’의 여부는 이미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관람 전까지 스포일러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것 자체가 일종의 미션형 게임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화제작 개봉 무렵이면 온오프라인 모두에서 크고 작은 언쟁이 잦아진다. 누군가의 발언이 스포일러인지 아닌지, 책임을 따질 수 있는 상황이긴 한 건지 서로 목소리를 높이거나 바쁘게 자판을 두들긴다. 가끔은 시비를 뚜렷하게 가려줄 사설기관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한시적으로나마 문을 열었다. 이름하여 하우디 스포일러 법률 상담소. 참고로 이 글에 <기생충>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혹은 기타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다.


Q1. 해외여행 중 길을 걷다가 우연히 <어벤져스 : 엔드게임>의 캐릭터 포스터를 보게 됐습니다. 어떤 인물의 사진 아래 추모의 꽃다발이 놓여있더군요. 이번 작품을 끝으로 시리즈에서 퇴장하게 된 바로 그 캐릭터였습니다. 아직 영화 관람 전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기습적인 스포일링에 당한 셈입니다.


A1. 불특정 다수를 노린 기발하게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스포일링이다. 단 이번 사건의 경우 발생 시점이 관건이다. 감독인 안소니 & 조 루소 형제가 5월 5일 이후부터는 누구나 <어벤져스 : 엔드게임>의 결말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인터뷰를 통해 밝혔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 내용에 대한 보안이 필요했던 기간은 개봉일로부터 약 2주 정도였던 셈이다. 제작진이 직접 스포일러 금지령 해제 시점을 명시한 건 매우 예외적이라 앞으로 유사한 분쟁에서 시비를 가릴 때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듯하다. 즉, 해당 사건이 5월 5일 전에 발생했다면 유죄지만 그 이후라면 무죄다.





Q2. 봉준호의 <기생충>에 영향을 준 작품들이 언급된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김기영의 <하녀>,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 조셉 로지의 <하인> 등이 소개되던데요. 저 스포 당한 건가요?


A2. 그런 식이라면 <왕좌의 게임> 제작진에게도 <아스달 연대기> 스포일링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거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계급 갈등을 테마로 삼은 실내극이라는 연결 고리가 존재하기는 하나 <기생충>의 내용과 구체적으로 포개지는 대목은 없는 작품들이다. 게다가 전부 재미있는 영화들이니 이번 기회에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녀>의 경우,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www.kmdb.or.kr)의 VOD 서비스를 통해 무료로 감상할 수도 있다.




Q3. <퍼펙션>이라는 넷플릭스 신작이 화제더군요. 음악 경력이 단절된 첼리스트가 한창 주목받는 현역 연주자와 만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스릴러라고 합니다. 이 작품이 여러 면에서 어떤 한국 영화를 연상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건 스포일러일까요? 아닐까요?


A3. Q2의 <기생충> 사건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경우다. 혹시 칸 영화제와 인연이 깊지만 봉준호는 아닌 그 감독의 작품이라는 정보도 접했을까? 더 나아가 해당 영화의 제목까지 이미 알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당신은 <퍼펙션>의 반전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이미 통보받은 셈이다. 하지만 내용의 흐름을 어느 정도 짐작한 상태로 보더라도 기괴하면서도 강렬한 결말의 충격은 유효하다.


Q4. 상영 직전에 들른 극장 화장실에서 잠시 후 제가 관람할 영화를 막 보고 나온 두 사람이 결말에 대해 대화하는 걸 듣고야 말았습니다. 손으로 귀를 막을 수도 없었어요. 뭔가 다른 걸 잡고 있었거든요. 이런 경우, 어떻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요?


A5. 마지막 순간까지 안심해서는 안된다. 관람을 막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출몰하는 극장 로비나 화장실은 스포일러에 노출될 위험이 상당히 높은 우범지대다. 안타까운 사연이지만 정황상 피의자의 고의성을 입증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기껏해야 과실치사 정도? 스포일러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싶다면 상영관 입장 전까지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착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우디에서 뱅앤올룹슨 등 품질과 디자인이 뛰어난 제품들을 쇼핑할 수 있다.


Q5. 쿠엔틴 타란티노가 칸 영화제에서 신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대한 스포일링을 자제해달라고 기자들에게 부탁했다더군요. 그런데 마고 로비가 연기한 샤론 테이트는 실존 인물이고 그 사람에게 벌어진 비극이야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잖아요.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도 스포일러의 개념이 유효할까요?


A5. 배우이자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이기도 했던 샤론 테이트의 죽음은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다. 1969년 8월 9일,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그녀는 악명 높은 살인마 찰스 맨슨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당시 샤론 테이트는 임신 8개월 상태였다.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을 하는 건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은 특정 픽션의 스포일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에게 벌어질 일을 짐작 못했다면 그 책임은 국사 공부를 게을리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게다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실제 사건을 아는 상태에서 봐야 더 흥미로울 작품이라는 게 칸 영화제를 직접 취재하고 돌아온 저널리스트의 전언이다. 영화가 한국에서 공개될 8월이 되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Q6. 그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운 오후였어요. 개봉일에 <엑스맨 : 다크 피닉스>를 보러 간 동생이 메신저로 스포일러를 전송해왔습니다. 퇴근 후에 죽여도 정상참작이 될까요?


A6. 물론이다. 답장으로 동생의 예상 수명에 대해 먼저 스포일링을 할 것.


Q7. 자기가 보지 못한 작품의 내용을 언급하면 무조건 화를 내는 친구가 있습니다. <타이타닉>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저체온증으로 죽는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이번 주말에 보려던 영화였다면서 정색을 하더라고요.


A7. 게으른 사람들이 늘 하는 핑계다. 지난 20여년 간 관심 없던 영화가 이번 주말에 갑자기 궁금해질 가능성도 희박하다. 정식 개봉 이후로 6개월 이상이 지난 작품들이라면 반전 내용으로 프리스타일 랩을 해도 당신은 무죄다.





Writer 정준화 : 디지털 기획자. 틈나는 대로 영화, TV, 책, 전시 등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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