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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에게 떳떳한 과학자

'청부 과학자' 판치는 시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편에 선 백도명 교수 인터뷰
H21 작성일자2016.05.17. | 15,465  view
source : 정용일 기자
피해자의 목소리가 나온다.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절박한 목소리다. 이때 피해자 편에서 지식과 정보를 제시해줄 ‘사려 깊은’ 과학자 등의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과학은 객관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과학 지식을 동원하느냐에 따라 객관성의 맥락이 달라진다. 옥시와 김앤장이 서울대 조아무개 수의과대학 교수의 흡입독성실험 연구보고서를 근거로 ‘과학적 불확실성’을 강조하고 나섰던 게 대표적이다. 과학 대 과학이 경합하는 순간이다. 

과학기술사회학에서는 이때 피해자,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과학자를 ‘대항과학자’ 또는 ‘시민과학자’라고 부른다. 그때부터 제도 개선 등으로 사회는 한 발짝씩 변화하게 된다.
기업들은 이런 (과학) 싸움으로 손해를 본 적이 없다. 조작된 연구를 폭로해도 ‘그것도 연구고 이것도 연구’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청부 과학자들이 판치는 시대가 된 거다. 백도명 교수는 이걸 어떻게 뒤집을까 고민해온 과학자다. 시시비비를 말로 따지는 게 아니라 옳은 연구 결과를 내놓음으로써 밝혀냈다. 연구자로서 훨씬 더 어려운 싸움, 쉽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 싸움을 해온 거다.

_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김신범 화학물질센터 실장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 '청부 과학'은 뻔한 클리셰다. 기업이  과학을 어떻게 악용하는지, 과학자들이 산학협력이라는 명분 아래 기업·정부와 얼마나 유착돼 있는지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담배, 석면, 아스피린 등 온갖 위험을 일으키는 제품을 만드는 거대 기업들은 과학자에게 연구비를 주면서 유리한 연구를 종용한다.

그러나 모든 과학자가 ‘청부 과학자’는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역학조사를 위해 주머니를 털어 제 발로 피해자들을 찾아다닌 과학자들도 있다.
source : 정용일 기자
백도명(60).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다. 서울대를 졸업한 뒤 영국 런던대학에서 석사,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백도명 교수는 국내 산업보건학계에서 첫 손에 꼽히는 권위자다.

직업병 등 노동·환경보건 분야에서는 유명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를 잘 모른다. 그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모임’과 함께하는 환경보건시민센터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2011년 질병관리본부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 역학조사 결과를 발 표한 뒤, 환경보건시민센터에는 수백 건의 피해 신고 사례가 쏟아졌다. 그러나 정부가 하기로 했던 피해 조사는 감감무소식인 상황. 백 교수는 2012년 자신이 학회장으로 있는 환경보건학회 소속 과학자 9명과 함께 나섰다.
source : 정용일 기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례 95건을 6개월간 직접 조사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노출실태와 건강영향 조사’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를 펴냈다.

잠을 잘 때 가습기와의 거리가 짧을수록, 유아·임산부 등 민감군일수록 질병이 위중했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다. 연구보고서 발간비는 과학자들이 수십만원씩 갹출했다.

결국 과학자들이 정부를 움직였다. 질병관리본부는 폐손상 의심 사례에 대해 개인마다 관련성을 평가하는 공동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고, 백도명 교수는 폐손상 조사위원회 1차 조사위원장을 맡았다. 1차 조사가 끝난 뒤에도 그는 직간접적으로 정부 및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협업 중이다. 
source : 정용일 기자
윙~윙~. 5분마다 한 번씩 휴대전화의 진동음이 울려댔다. 가 습기 살균제 사건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차례 기자와 정부 관계자 등이 그를 찾는다. 5월12일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실에서 진행된 백교수와의 2시간여 인터뷰는 전화 때문에 수시로 대화가 끊겼다.
-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깊이 간여하게 된 계기는?
2011년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피해 신고를 받고 보니, 어린아이와 임산부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매우 다양했다.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차 폐손상 조사위원장도 맡았다. 그런데 (원료물질의) 독성 확인까지 하고 나서 정부가 손을 떼더라.
(가습기 살균제와 질환 사이의) 인과관계를 이야기하려면 물질이든 환경이든 원인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정부가 파악한 내용에는 피해 원인을 입증할 부분이 별로 없었다. 피해자 개인들이나 몇몇 사람이 다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왜 유독 한국에서만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하나. 정부가 나선 지 5년 이나 지났는데도 해결이 더디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정부가 제 역할을 못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몇 가지 문제를 짚어봐야 한다.
우선 우리나라가 새로운 원료물질이나 제품을 만든 경험이 많지 않다보니, 화학물질 독성실험 자체가 적었던 것 같다. 외국법을 베껴와서 화학물질등록제도를 만들어놓긴 했는데 신규 화학물질을 검토할 때 필요한 자료가 뭐고, 어떤 등록 규정이 필요한지 등도 충분히 알지 못했다. 소비자가 제품이나 환경 때문에 발생하는 건강 문제를 접수할 통로도 제대로 없었다. 기업들이 독성물질이나 안전 위험처럼 ‘노하우’가 아닌 것도 ‘영업비밀’이라며 공개하지 않는 태도도 문제다.
source : 정용일 기자
백 교수는 노동건강연대 상임대표,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공동대표, 녹색병원 부설 진폐센터 초대 소장,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 등의 직책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분 무보수였다.

백 교수님이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놓은 ‘전국 고압송 전로 주변 지역 주민 암 관련 건강영향조사 최종보고서’에서) 정부에 불리하게 해석될 정보가 빠졌다는 점을 지적해주셨다. '전자파와 암 사이에 유의미한 관계가 없다'는 정부 기조 자체를 뒤집는 연구 결과여서 밀양에 큰 힘이 됐다.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_ 이계삼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사무국장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연구활동을 유달리 많이 해왔다. 현장에 밀착한 과학자 중 가장 어른이다. 서울대 의대 수재였다고 들었는데 굳이 돈 안 되는 산업의학과를 택한 이유가 있었나
내가 75학번이라 유신 말기에 대학생활을 했다. 본과 2학년 때 기숙사에서 어느 날 깨보니 대통령이 숨졌다고 웅성웅성하고, 다음해에는 군인들이 들어와서 사람을 두들겨 팼다고 하더라. 5·18 광주민중항쟁 이야기였다. 그 뒤 산업의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유학을 갔다. 그땐 그저 막연했다. 다행히 1992년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노동보건 쪽을 들여다볼 틈이 조금씩 넓어져 있었다.
-대학 시절 이후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때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힘은 뭔가. 
내가 하는 일에 떳떳하려면, 나 자신에게도 떳떳해야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떳떳해지고 싶다. 거기엔 현장에서 만나는 피해자들도 포함된다. 그게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온 힘이 아닌가 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과학자로서의 사명, 그리고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건강권은 인간의 사회적 권리다. 그 안에는 정보를 알 권리, 그 정보에 바탕을 두고 선택할 권리, 행동할 권리가 모두 속한다.
과학은 공개적이어야 한다. 누구나 참여하고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의 역할이란, 사람들이 지식·정보를 얻고 그에 따라 선택할 기반을 마련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다. 내가 하는 일이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항과학자? 시민과학자?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따를 뿐이다. 나는 보건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개 인의 건강권에서 나아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은 거다.
source : 정용일 기자
백 교수는 2013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임의장을 맡은 바 있다. 하지만 사회적인 정치 발언보다는 조사·연구를 통한 실증적 반박에 집중해왔다.

백 교수는 2013년 ‘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에서 발표 한 ‘한국에서의 기업과 연구자’라는 글에서 자신을 ‘연구활동가’라고 표현했다.
연구자로서 원인과 대안이 각각 따로 조사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활동가로서는 원인과 대안이 서로 다른 수준이더라도 같은 체계 안에서 연결되어야지만 문제가 조금이라도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연구활동가이다.
이 때문인지 그는 정부나 기업뿐만 아니라 다른 교수들의 연구 결과물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반박 의견을 낸다.

지난 3월 발표한 ‘고리 원전지역 환경방사능 방출과 갑상선암 발생에 대한 거주기간 및 거주시점에 대한 분석’ 연구는 1980년대 초반과 1992년 이후 원전 주변에 거주하기 시작한 주민들에게서 암 발생률이 높게 나타난다는 점을 밝혀냈다. 다른 서울대 의대 ㄱ 교수의 애초 역학조사 결과를 정면으로 뒤집는 내용이었다.
한국 학자들은 이런저런 인맥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서로 비판하는 문화가 흔하지 않은데, 백도명 교수는 연구방법론 잘못 등을 정면 반박하곤 한다. 이 때문에 괴로움도 많은 걸로 안다.
_ 연구공동체 ‘건강과 대안’ 이상윤 연구위원
ㄱ 교수는 자신의 연구자료를 가져다 분석한 게 저작권 위반이라며 백 교수를 연구윤리위원회에 제소했다. 백 교수는 누군가를 비판할 때는 단어 선택이 더 신중해졌다. 평소에도 느린 말이 더더욱 느려졌다.
-조 교수 사건을 계기로 ‘청부 과학’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아주 좋게 보면, 기업이 문제 해결에 있어 외부의 조언이나 객관적 판단을 구하려고 연구용역을 맡기는 거다.
그런데 과학의 공개성이 없어져버리면, 취사선택하는 방식으로 왜곡되거나 전체 조사의 완결성이 깨져버리게 된다.
source : 정용일 기자
-기업들은 자신이 의뢰한 연구보고서에 불리한 내용이 나오면 이른바 ‘마사 지’를 요구하지 않는가. 
보통 갑을 관계니까…. 계약서상 갑이 요구하는 대로 꼭 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기도 한다.
-삼성전자가 백혈병 문제를 공개사과한 지 5월14일이면 2년이 된다. 조정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반올림’은 200일 넘게 삼성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 중이 고 해결 기미가 안 보이는데 조정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인터뷰 시작 2시간 만에 처음으로 눈을 감은 채 10여 초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옥시 본사인 레킷벤키저가 주주총회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인해 회사가 입은 이미지 훼손을 주주들 한테 제대로 보고했느냐?’ ‘사과-보상-재발방지는 충분히 했느냐?’고 문제제기하는 외신 보도를 봤다. 외신은 ‘너무 늦었다’고 평가했다. 삼성도 그걸 보면서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이후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우선 병원비 등 피해자들의 급한 불을 끄게 해줘야 한다. 화학 물질 관리에서도 바이오사이드(살생물제)는 관리하겠다고 했지만 모든 독성물질을 사용량에 관계없이 무조건 관리해야 한다.
몇 년 전 등산복에 방수 스프레이를 뿌려놓고 잠들었다가 새벽에 응급실에 실려간 피해 사례도 봤다. 생활제품 곳곳에 위험한 화학물질이 숨어 있다.
작업장의 화학물질 사용 문제도 심각하다. 삼성전자 협력업체에서 일하다가 메탄올 때문에 시력을 잃은 노동자들 문제만 하더라도, 누가 옆에서 일하는지도 모르는 파견노동자들이 피해자 아니었나. 더 열악할수록, 더 고립되는 시스템이다. 환경보건 못지않게 노동보건 문제도 중요하다.
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편집 김효실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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