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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한 이들의 무수한 죽음

조회수 2016. 5. 31. 14:4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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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적절] 파울 첼란과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
h21이 매주 시와 음악을 차려놓고
‘시음회’를 엽니다.

36년 전 5월 
‘빛 광(光)’ 자를 쓰는 도시가
빛을 뺏겼습니다.

5월에 제사 없는 집안이 드물다는 광주
그곳에 ‘빛 없이 있던 것’(이브 본푸아)을
그려볼 거예요. 
출처: 이종근 기자
빛이 없으면 
빛깔, 그러니까 이 없죠.
어둠.
그곳이 그랬습니다.
어둠 상태에선 
색이 빠지고 만 있죠. 
문제는, 
분명히 있는데 지각이 어렵단 것.

“색채가 풍부해질수록 
형태도 충실해진다”는
화가 폴 세잔의 의견은
색(빛)과 꼴의 관계를
충실히 지각하게 해줍니다.
출처: designtimeline.co.kr
물리학의 주장도 비슷해요.
광(光)학에서는 어둠을 
‘비존재’로 치고 있어요.
빛이 없으면 존재도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둠
‘빛의 반대’가 아니라
‘빛의 부재’를 일컫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우주의 기본 세팅이
어둠이죠, 즉
빛이 필요한 상태죠.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 중 한 명인 
황현산 선생은 일찍이
빛과 어둠의 성질을 꿰뚫는
문학적 발화를 했어요.
빛은 어둠을 견디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으며
빛이 습관이 될 때, 어둠도 함께 잃는다.
출처: 로이터 연합뉴스
암흑 속에서 형체가 흐려진 광주를 
그럼 어떻게 그려볼까요.

학살 책임자와 정확한 피해 규모가
여전히 미궁인 불분명한 현실에서
시가 불빛이 된다면
조금은 더 잘 보이지 않을까요.

“시는 우리 발걸음에 불을 붙인다”

말한 이가 있습니다.
루마니아 출신 유대계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 1920~70)입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서정시는 야만이다.
_ 아도르노
많이 들어보신 명제죠. 
그런데 이 문장의 수정문
저만큼 알려져 있지 않아요.

아우슈비츠 이후의 서정시는 불가능하다.
아우슈비츠를 바탕에 둔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아우슈비츠를 기억한다면
아우슈비츠 이후의 서정시는
가능하다는 말이죠.

헝가리의 언어학자
페테르 손디(Peter Szondi)의 의견인데
바로 파울 첼란을 두고 나왔답니다.

후에 아도르노도 이 견해에 공감했죠.
출처: 한겨레 자료
첼란의 부모는 강제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그런 첼란은 독일어로 시를 썼어요.
아우슈비츠를 새기고 또 새기면서
아름답다 못해 황홀한 시를 씁니다.

전후 독일시단에서 첼란 시는
큰 각광을 받아요.
독일이 나치즘이란 광기를
해감하고 토하는 데
독일어로 쓰인 이 유대인의 명시가
작지 않은 구실을 했겠지요.
<죽음의 푸가>가 
그의 대표작입니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로 시작돼요.

강렬한 모순의 이미지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박진하는 
시의 리듬이 독자를 긴장시켜요.
36행인 전문을 싣진 않지만
대신 첼란이 이 시를
직접 낭송한 음성파일을 싣습니다.
‘검은 우유’는 죄 없는 죽음의 은유. 
“거울 속은 일요일”(‘코로나’ 일부)인데
우연히도 한국의 518이 일요일이라
사회적 야만을 점검할 때
광주라는 거울 앞에
설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저는
첼란 시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었어요.
출처: 5·18 기념재단
검은 우유를 ‘마신다’는
시어의 반복 또 반복. 
셀 수 없이 되풀이된 죽음이죠.
제목에 쓰인 ‘푸가’는
모방반복의 악곡인데
이 시는 곡성의 합창으로 들려요.
푸가(Fugue)엔
‘일시적 실종’이란 뜻이 있어요.

이 의미를 생각하면
‘죽음의 푸가’라는 시에선
무죄한 이들의 무수한 죽음에
어떤 기다림이 생깁니다.
지나갔으나 벗어날 수 없는, 
벗어나면 안 되는 일에 대한 자세
첼란 시에서 몇 가지
더 들어봐요.
죽은 이들…… 그이들이 아직도 구걸하고 있나이다

_ ‘아시시’ 일부
죽은 자의 해소되지 않은 비참을 잊지 않고
너를 써넣지 마라
세계들 사이로는,

일어나라
의미들의 다양(多樣)에 맞서,

눈물 자국을 믿으라
삶을 배우라.

_ ‘너를 써넣지 마라’
진실을 억압하는 난폭한 자유도 
다양성이란 모던한 말로 거둬지는 세계에선
삶은, 눈물 자국으로 배우고
언젠가, 죽음이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신이 내 안에 몸을 숨겼다.

_ ‘언젠가,’
내 안에 그 죽음이 들어와 있음을 아는 것. 
출처: AFP연합
* <죽음의 푸가>는 악곡 형식에 들어맞게 쓰였습니다. 6개 파트가 푸가의 짜임새를 갖추고 있어요. 파울 첼란의 낭송을 그대로 음악이라 볼 수 있을 듯해요. 

압니다. 저만의 판단일 수 있죠 ^^ 동의하지 않는 분들을 위해 다음 두 곡을 준비합니다. 80년 5월18일, 그리고 19, 20, 21일… 그날들을 당장 오늘처럼 느끼게 하는 노래예요. 주고받는 푸가처럼 들어주세요.
그대 떠난 그날 오후 그대 모습 잊을 수가 없네

밀려들던 사람들의 함성 소리 얼어붙은 거리

문밖을 나가 그대를 찾아

아무리 그대 울어봐도 소용없었네

서서히 밀려오던 군화 소리 대검의 빛

멀어지는 사람 죽어가던 사람들 싸늘하게 쓰러져

빛을 잃은 빛나던 도시

믿을 수 없던 비명 소리 이제는 믿을 수밖에

그대는 오지 않으니 … 아직 날 울리는 사람

어떻게 그댈 잊어요
지나가는 당신 얼굴, 당신 얼굴, 당신 얼굴

아무리 빈 공간에 눈을 둬도 어김없이 웃고 있는 당신

이제 그만 잊혀질 때도 됐지만 당신 얼굴, 당신 얼굴

나를 깎아 만든 조각일까

나를 태워 만든 불꽃일까

눈이 되지 못한 비처럼 서럽게 흐르던 눈물

눈물 같은 세상

내게 하나뿐인 그대처럼

차갑기만 한 사람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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