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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어준 사람" 최순실

조회수 2016. 11. 15. 00: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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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바랄 때" 만나 '순수한 마음'으로 이어진 40년 인연

최순실은 최태민의 3남6녀 중 다섯째딸로 알려져 있다.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은 1976년 처음 만나 40여 년간 친분을 이어왔다.


그들의 첫 연결고리 '최태민'

1974년 육영수 여사 사망 뒤 최태민은 박 대통령에게 꿈에서 육영수 여사를 만났다며 수차례 편지를 보냈다.

최순실은 이런 최태민의

종교적·정신적 후계자로 알려졌다.


출처: 비즈한국
75년 9월, 대한구국선교단과 서울시의사회가 자매결연을 맺는 자리에서의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 팔에 ‘멸공’글씨와 십자가가 그려진 완장을 찬 사람이 최태민이다.
  • 대한구국선교단에서의 인연


최태민이 1975년 설립한 대한구국선교단은 1976년 구국여성봉사단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았다. 1978년 이 단체는 새마음봉사단으로 다시 이름이 바뀐다. 이때 최순실이 대학생회장을 맡으며 박근혜와 더욱 가까워졌다.


최순실은 박근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새마음봉사단에서 함께 일하던 당시 월간 <새마음> 1978년 12월호에 글을 실으면서 존재를 드러낸 적은 있다. 그 글에서 최순실은 “‘여러분의 정신세계가 훌륭한 가치관 위에서 나날이 풍요로워지고 또한 그것이 여러분의 굳은 신념과 상상이 되어 한평생 여러분을 인도하게 된다면 이보다 더 큰 보람과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씀하신 박 총재님의 격려사를 통해서 더욱 굳굳하고(꿋꿋하고) 의욕적으로 삶을 전개시킬 수 있었습니다”라고 쓰며 박근혜를 지지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살로

박근혜는 양친을 모두 잃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출처: 한겨레

박근혜는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박정희 사후 느낀 배신과 분노의 감정을 수차례 피력했다. “처음 추모사업을 꾸려갈 무렵, 이 일을 도와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대부분이 날 만나는 것조차 꺼려했다. …그러나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나와 뜻을 같이한다는 이유로 강제 해산되었던 사람들이 어렵게 다시 모여 아버지의 추모사업을 진행하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박근혜, 최태민, 최순실이 주축이 되었던 새마음운동회는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1980년대 후반 양친의 추모사업을 추진하려던 박근혜는 벽에 부딪혔고, 이때 도움을 준 이들이 최태민과 최순실이다. 


자서전에서는 이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박근혜는 1990년 육영재단을 둘러싼 분규 당시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누구로부터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최 목사는 1988년 박정희기념사업회를 만들 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 개월 동안 나를 도와주었을 뿐 아무런 관계가 없다.”


출처: 뉴스타파

최순실은 박근혜가 육영재단 이사장이던 1986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유치원 원장을 맡아 일했다. 이 시기 육영재단에서는 ‘최태민의 전횡에 반대한다’며 내부 반발이 극에 달했다. 재단이 최순실씨가 운영하던 유치원에 특혜를 줬다는 의혹도 나왔다.


갈등이 정점을 찍었던 1990년 박근혜의 동생 박근령과 박지만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최태민을 엄벌하고 언니를 구출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냈다.


당시 박근령을 중심으로 한 숭모회가 제작, 배포한 소책자 <7개의 이름을 가진 최태민, 그는 누구인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폐간된 <어깨동무>, <꿈나라> 등의 편집에 자신의 딸이 관여하게 했고, 육영이 목적인 어린이회관을 수익 사업체로 전환시키려 했다.”(<고독의 리더십-인간 박근혜의 60년>, 천영식)


당시 육영재단에서 발간하는 <어깨동무> <꿈나라> 운영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근혜씨가 이사장이 된 뒤부터 말단 직원 한 사람을 채용하는 일에도 과장·부장급 간부들이 직접 결재 서류나 메모를 들고 최씨 집을 찾아가 승인을 받고 나서야 박 이사장의 결재 도장이 찍힐 정도였다”(<동아일보> 1990년 11월23일치)고 밝혔다.

최순실
오랜 세월 그림자조차 내비치지 않았지만
박근혜가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분기점을 맞을 때마다 언론과 접촉했다.

최태민이 고문을 맡았던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 출범(1988년)에 앞선 1987년 가을 한 여성지 기자와 만나 박근혜와 그들 일가의 관계를 해명하겠다고 나섰다.


“아버지가 갑자기 구국여성봉사단을 맡고 난 뒤부터 갖가지 유언비어가 흘러나왔는데 모두가 중상모략이었어요. 그런 유언비어는 박근혜씨 귀에도 들어갔지만 박근혜씨는 무시해버렸어요. (중략) 아버지는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신 후 기독교 몇몇 목사와 신자들을 중심으로 육 여사 충격으로 인한 위기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해가자는 의도에서 구국여성봉사단을 만들었어요.”(<여성중앙> 1987년 10월호)


인터뷰 내용은 세간의 의혹을 해소하진 못했다.


출처: 연합뉴스
1994년 5월 최태민 사망 뒤에도 “나의 아버지 최태민과 박근혜 사이에 나돌던 소문에 대해 밝힌다”며 <우먼센스>(1994년 8월호)와 인터뷰했지만 새로 밝혀진 사실은 없었다. 최순실은 ‘최태민의 셋째딸 최민희’라는 가명으로 인터뷰에 응했지만 당시 “서울 영동에서 9년째 유치원을 경영하고 있다”며 신분을 드러냈다. 이듬해인 1995년 박근혜는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맡았다.

‘신의’ ‘순수한 마음’ 같은 말들은 30대 청년 박근혜와 최순실 시절부터 지금까지 둘 사이를 잇는다.


박근혜는 자서전 <절망은…>에서 1988년 양친 추모사업과 관련해 사람들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동시에 최씨 일가에 깊은 신뢰의 감정을 드러냈다. 

출처: 미주중앙일보
60년대에 촬영된 박근혜 대통령의 가족사진
“상대의 믿음과 신의를 한번 배신하고 나면 그 다음 배신은 더 쉬워지며, 결국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말처럼 순수한 마음 하나로 함께한 그분들이야말로 진정 용기와 소신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박근혜는 배신에 대한 깊은 분노

일상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MBC 기자 시절 박근혜와 인터뷰를 했다.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이 <동물의 왕국>과 EBS 어학 프로그램이라는 말에 박영선이 물었다.


“왜 <동물의 왕국>을 즐겨 보세요?”


박근혜가 답변했다.

“동물은 배신하지 않으니까요”

(박영선, <누가 지도자인가>).


박근혜 대통령은 10월25일 대국민 사과에서 “저로서는 (연설문을) 좀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라고 언급했고, 최순실은 10월26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의 때문에 했는데 이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말했다.

글 / 신소윤 기자

편집 및 제작 / 천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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