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에 불려간 광주항쟁 시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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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주.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그는 총을 든 고3 시민군이었습니다.
무너져가는 도청을 보면서 그는 카빈총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게 평생의 멍에가 됐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 때 광주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전두환은 독재자 박정희가 없어진 자리에 필 수 있었던 민주주의의 꽃을 짓밟고 정권을 잡습니다.
12.12 사태입니다.
군부 세력이 들어서면 한국 사회는 또다시 민주주의와 멀어질 것이란 생각에 광주에서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이 연일 시위를 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국민을 대상으로 총, 칼, 군사무기가 동원됐습니다.
이에 학생 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합류해 저항했습니다.
진압은 살상에 가까웠습니다. 전시에나 동원될 법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최근 국과수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군부는 시민들에게 기관총으로 집중사격까지 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모든 통신 수단을 끊고 통행을 막아 광주를 고립시켰습니다.
그러고서 바깥엔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광주는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참상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일반 성인은 물론이고 어린아이, 학생, 할아버지, 할머니 등 상대를 가리지 않은 폭력이었습니다.
당시 통수권자였던 전두환은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 오히려 자신이 5.18의 희생자라고 주장했죠.
이런 지옥을 경험한 강용주는 대학에 가서도 전두환 정권과의 악연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멀쩡히 의대에 다니던 그를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엮어 35일 간 고문했습니다.
개처럼 포박돼 무릎을 꿇고 밥을 먹을 때 그가 지키려고 한 것은 사상이나 신념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었다고 합니다.
강용주는 옥중에서 전향제도에 저항해 도합 300일을 단식 투쟁했고 결국 사상 전향제도를 무너뜨렸습니다. 국제앰네스티는 그를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선정했습니다.
출소해 대학을 마친 그는 2016년까지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을 지냈습니다.
보안관찰법은 이미 실형을 산 사람에게 부과되는 또하나의 형벌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끊임없이 기억해도 모자랍니다.
그러나 지금 어떤가요?
광주민주화운동을 비하하고 희화화하는 언어들이 활개를 치고 있진 않나요?
보상받지 못한 민주화운동의 피해자가 아직도 국가 권력에 고통받고 있지 않나요?
얼마 전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비유했듯이, 드라마 <시그널>에서처럼 1980년 광주에서 스러져갔던 시민군들이 현세대에게 연락을 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참고
'죽을 때까지 강용주', 이명수, 한겨레, 2017.4.17.
'강용주, "인간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 이지선 기자, 경향신문, 2008.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