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사랑 - 영화 리뷰 '페드라'

조회수 2019. 10. 1. 14: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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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헤어전문매거진 그라피
영화 '페드라' 포스터

신화처럼 아름다운, 신화보다 비극적인

사랑이란 이름으로 결행되는 모든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기본적으로 축복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누구로부터도 결코 축복받을 수 없는 불온한 사랑도 있죠.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금지된 욕망, 그 욕망은 그들의 삶에 잠시 열정을 꽃피우지만 이내 파국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금기를 깨트린 파격적인 로맨스는 수많은 설화와 문학, 예술작품, 특히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데요. 현실에선 절대 용인 되지 않는 금기의 욕망이란 점에서 카타르시스와 연민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특히 그리스 신화는 이렇듯 관습과 통념에 반하는 비극적 사랑의 종합 선물 세트라고 부를 수 있죠. 


금기의 사랑이라면 줄스 다신 감독의 1962년작, <페드라(Phaedra)>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의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히폴리투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인데요. 국내에선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개봉됐었죠. 죽어도 좋아. 제목부터 느낌 충만하지 않나요? 죽음조차 불사하게 만드는 사랑이라니.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숨어 있을 겁니다. 

영화 '페드라' 스크린 샷

‘히폴리투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크레타섬의 왕 미노스는 그의 딸 페드라를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시집보냅니다. 그런데 페드라는 엉뚱하게도 테세우스가 아닌 그의 아들 히폴리투스에게 반해버리죠. 하지만 히폴리투스는 그녀의 사랑을 매몰차게 거부합니다. 배신감과 치욕에 몸을 떨던 페드라는 음모를 꾸며 히폴리투스를 처형당하게 만들고 자신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죠.


영화는 신화보다 더 애절하고 비극적입니다. 줄스 다신의 흠잡을데 없는 각본과 연출, 페드라 역의 멜리나 메르쿠리가 보여준 비감한 오라, 알렉시스 역을 맡은 안소니 퍼킨스의 유약하지만 불 같은매력, 그리스의 거장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이 신화와 현재사이의 간극을 훌륭히 메우고 있죠.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참담한파멸로 치닫는 두 남녀의 사랑은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가슴에 물이 차듯 먹먹한 슬픔을 안겨줍니다.


욕망의 세 가지 층위 

한 여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파티를 지켜봅니다. 즐거운 대화, 흥이 넘치는 음악, 살과 살이 스치는 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불길한 활력으로 가득 차 있죠. 육감적인 입술 클로즈업이 빠르게 반복될 때마다 나쁜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듯 고조되는 히스테리. 아무도 이 가련한 여인이 지금 어떤 고통에 휩싸여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을 알기 위해선 그녀가 파리로 떠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화 '페드라' 스크린 샷

페드라는 그리스의 선박왕 타노스의 부인입니다. 미모, 기품, 혈통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여인이죠. 자신의 이름을 딴 ‘페드라 호’가 출항할 때만 해도 온 세상이 그녀를 경배했습니다. 타노스가 일종의 특사 자격으로 그녀를 전처 소생인 알렉시스에게 보내기 전까진 말이죠.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요? 그 만남이 세 사람의 안온한 현재와 보장된 미래를 모두 파괴해버릴 거라는 걸.


내키지 않는 걸음이지만 파리로 건너간 페드라는 자신의 눈을 의심합니다. 앳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늠름하게 자란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의붓아들이란 사실도 까맣게 잊을 만큼.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묘한 감정에 빠져들기는 알렉시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후 두 사람이 어떤 비극에 빠지고 얼마나 비참한 결말을 맞게될지는 상상하는 그대로입니다. 


신의 노여움을 산 듯 수많은 선원과함께 침몰한 페드라 호는 타노스가 평생 일궈놓은 왕국의 파멸로까지 이어지죠. 졸지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여인들의 검은 슬픔을 뚫고 홀로 자신의 욕망에만 취해 돌진하는 페드라는 밉다기보다 딱하고 처연합니다. 결국 그녀의 불온한 욕망이 모든 걸 파멸로 몰아넣었지만 페드라만 탓할 순 없는 노릇.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죽여버리겠다는 무사의 다짐처럼 페드라는 절실했고 오늘에만 충실했으며 한없이 사랑했을 뿐이니까요. 


여기서 잠깐. 그런데 왜 아무도 타노스의 어깨를 두드려주진 않는 걸까요? 세상의 전부였고 삶의 이유였던 두 사람에게 동시에 배신당한 그인데. 남겨진 자의 슬픔은 떠나간 자들의 비극에 밀려 늘 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씁쓸히 복기하게 되는 건 역시 생각이 너무 많은 탓이겠죠.

영화 '페드라' 스크린 샷

페드라, 1962

감독 줄스 다신

주연 멜리나 메르쿠리, 안소니 퍼킨스, 라프 발로네


글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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