낼모레 80세인 할머니 헤어 디자이너의 커트 요금은 15만원

조회수 2020. 11. 16. 12:18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BY.헤어전문매거진 그라피

미용 61년 째, 업스타일의 전설 '송부자'

아뜰리엔 뚱 원장(윤길찬)이 미용인들의 미용인, 송부자 선생을 만났다. 61년 째 현장을 지키고 있는 천상 미용인이자 선배, 스승이 전하는 미용 스토리. 

미용인들의 미용인 송부자 선생님


30년 전 미용을 시작한 시절부터 선생님으로 건재하신 미용인의 스승인 송부자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오늘 작품 하시는 걸 직접 보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오래된 고객들이 아직까지 찾아주어 종종 살롱으로 출근하고 있어요. 준오아카데미에서 교육을 하기도 하고요. 고령 사회에 접어드는 시류에 맞춰 중년과 노인들의 헤어 스타일을 교육 시키는 건 탁월한 기획이에요. 과거 한창 커트 교육을 할 때 가위춤을 추거나 커트 퍼포먼스를 하는 걸 봤어요. 그때는 기가 죽어 스타일링만 했죠. 오래 살다 보니 커트 교육을 다시 하게 되는 날이 오네요.


미용은 얼마나 하셨죠?

61년째인가 봐요. 제가 중학교까지 다니고 고등학교 진학을 못했어요. 어릴 때 집이 가난해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어요.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온 조부님이 하루는 불러서 제게 기술을 배우라고 하셨어요. 어린 생각에 기술은 망치로 두드리는 것이라고만 생각해서 배우고 싶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정화여자 고등기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요즘 친구들처럼 미용에 대한 꿈을 갖고 시작한 건 아니죠.

 

선생님이 미용을 시작하셨을 때도 미용 교육이 있었나요?

없었죠. 1970년대 말 이전에는 재교육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어요. 미용업계에 재교육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80년대부터였죠. 당시는 공부 좀 하려는 미용인들은 유명 미용실에 손님으로 가서 어떤 스타일이 잘 나가는지 직접 체험해야 했어요. 기술은 주로 현장에서 익혔어요. 섬길 스승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에요. 저는 누가 나를 가르쳤다고 내세울 수 있는 선생님이 없어 슬퍼요. 스승이 있는 사람은 본인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아야 해요.

그럼 선생님은 많은 분들에게 그런 기쁨을 주셨네요. 옛날 스태프로 일하기 참 고되셨죠?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손님을 받아야 했어요. 일이 끝나면 그날 하루 사용한 타월을 세탁해야 했는데, 새벽 1~2시가 돼야 끝났어요.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어 빨아야 했으니 손등이 항상 푸르스름하게 부어 있었죠. 재밌는 게 예전에는 샴푸대도 없었어요. 고객들 머리를 거꾸로 뒤집어 헹궜죠. 고데기도 숯불에서 시작해 연탄불, 가스로 갔다가 지금은 전기로 하고 있네요.


저도 1990년에 일을 시작했는데 직화 고데기에서 드라이로 넘어가던 시절이었어요. 아직도 신기한 게 그때 디지털 고데기가 없으니 코에 살짝 대고 젖은 수건이나 물로 온도를 맞추시더라고요.

갑자기 정화고등기술학교를 다닐 때 누가 옆에서 건드는 바람에 아이롱에 입을 댄 일이 떠오르네요. 그때는 10년은 돼야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면 아이롱으로 머리 태우는 엉망진창인 디자이너가 됐을 거예요. 뚱원장이 숯불 고데기의 온도를 어떻게 맞췄는지 물어봤는데 물에 젖은 타올에 고데기를 갖다 댔을 때 나는 소리로 알아요.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좀 복잡해요. 당시는 시대가 요구하는 기술을 제대로 갖춘 후에 디자이너가 됐어요. 요즘은 디자이너가 빨리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데 시대 흐름이라 나무랄 수는 없지만 그만큼 많이 노력하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교육이 없으면 절대 발전할 수 없죠. 열심히 공부하면서 일하면 좋겠어요. 주 2회씩 쉬는 살롱이 많으니 그만큼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죠.

 

예전의 머리가 요즘 스타일에 비해 단단하고 오래 가는 것 같아요. 드라이 효과가 일주일까지 갔던 기억이 있어요. 요즘은 미용실을 나가는 동시에 스타일이 무너지기도 하잖아요. 

요즘은 하다 만 것 같은 머리를 선호해서 과거와 다른 것 같아요. 디자이너들이 시대에 맞춰 잘 하고 있는거죠.

미용인들의 미용인 송부자 선생님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 작품 촬영 때 스타일링은 피거나 구부리거나 두 개를 섞는 것 밖에 없다고 명쾌하게 설명하셨어요.

스타일링의 기본은 스트레이트와 컬밖에 없어요. 다만 컬 굵기에 따라 디자인이 달라지죠. 컬을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따라 웨이브가 되고 C컬이 나오죠. 스타일링은 스트레이트와 컬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스타일링과 특히 업스타일은 국내에서 독보적이신데 원래 손재주가 좋으셨나요?

우리가 밥을 먹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밥을 먹어야 살듯 연습도 시간 나는 대로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업스타일은 간결해요. 1970년대 말부터 90년대까지 앙드레김, 강숙희, 김정아 선생님의 패션쇼 헤어스타일은 거의 담당했어요. 스태프 2~3명으로 한번에 40~50명의 업스타일을 해야 했죠. 엉터리든, 제대로든 그것이 반복되어 오늘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복보다 중요한 훈련은 없어요.

아까 하신 스타일링을 제가 한다면 핀을 30개쯤은 꽂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이 실핀 하나로 끝내시는 걸 보고 충격 받았습니다. 어떻게 저리 단단할 수가 있죠?

핀 꽂기도 반복 훈련의 결과에요. 어디 가서 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제와 일주일 후 연습할 때 느낌은 전혀달라요.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탁 오는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제 것이 되는 순간이에요. 타고나서 핀 몇 개로 끝내는 게 아니라 많은 시간 반복해온 결과입니다.

2000년도에 개인 헤어쇼를 호암아트홀에서 하셨어요. 특히 호암아트홀은 예술 공연만 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있었는데 당시 어떻게 헤어쇼를 하시게 됐나요? 

대관하러 호암아트홀에 방문했더니 어떤 공연인지를 묻더라고요. 처음엔 떳떳하게 얘기를 못했어요. 헤어쇼를 한다고 했더니 역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때 수치심은 말도 못해요. 제가 미용 인생 41년 되는 해에 40주년 행사를 했어요. 그 정도 했으면 후배들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대관을 강행했죠.

작품에 대한 영감은 어떻게 얻으세요?

찰나의 순간이죠. 어느 순간 탁 부딪히는 게 있는데, 자기 전에 생각이 잘 나요. 일정에 좇기다 보면 잊어버려요. 그래서 머리맡에 종이와 볼펜을 놓고 생각 날 때마다 어떤 작품을 하고 싶은지 메모합니다. 미용은 그 시대 문화를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에 시대 자체를 잘 읽어야 해요.

 

유럽이나 일본의 기술을 따라 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선생님은 그 시절에도 해외로 수백 번을 나가셨으니 k-뷰티의 선구자시죠. 뷰티 시장, 어떻게 보시나요?

내 손님에 맞게 기술을 갖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비참한 건 요금 문제인 것 같아요. 왜 자신 있게 요금을 올릴 수 없을까? 내 고객의 3분의 1만 남긴다고 생각하면 되거든요. 요금 인상으로 떨어져나간 고객들도 3개월 후면 되돌아와요. 옆집이 만원을 받기 때문에 내가 9천원 받아야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단골이 있는 거예요. 낼모레 80인 할머니 헤어 디자이너에게 커트 요금 15만원을 내주고 하러 오는 손님도 있어요. 펌 요금부터 올리면 커트 요금도 당연히 올랐다고 고객들은 생각해요. 저는 일반 펌 요금을 40만원 받고 있습니다. 제 기술이 좋아서라기보다 고객들이 제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물가와 인건비, 세금은 올라가는데 미용 요금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선생님이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어요. 미용 외에 다른 공부도 하셨나요?

눈썰미가 있는 편이라 모델 옷을 해 입혀가며 헤어쇼를 하기도 했어요. 그런 잔재주는 있는 것 같아요. 요즘은 그림 그리기와 일주일에 한 번 영어를 배워요. 늙어서 왜 그러느냐 하겠지만 머릿속을 정화하는 목적도 있어요. 일찌감치 철이 들어 일주일에 단어 하나씩만 외웠어도 지금 영어가 얼마나 유창했을까 싶어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배워보자는 생각입니다.


61년 간 미용인으로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매장을 운영할 때 영업 마감을 빨리했어요. 공무원은 못 됐지만 그들처럼 일찍 퇴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직원이 20명 넘었을 때에도 과감히 일을 일찍 끝냈어요. 커트 손님 외에는 4시 전에 들어오는 손님만 받았어요. 복지에서만큼은 후배들에게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이태원 외인주택 안에서 20년 동안 미용실을 했는데 당시 다른 미용실이 밤 10시나 11시까지 운영할 때, 저희 매장은 일찍 닫곤 해서 고객들이 서둘러 왔어요.

미용인들의 미용인 송부자 선생님

미용하면서 가장 후회한 순간이 있나요?

송부자 미용에는 없는데 교육에 관해서는 후회가 있어요. 학생 교육을 2주 코스로 모집했는데 너무 짧아 교육이 제대로 안됐습니다. 그 상태로 수료증을 준 게 가장 후회가 돼요. 3개월 코스로 교육을 시켰다면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즘 안타까운 것 중 하나가 젊은 후배 미용인들에게 스승이 있을까 하는 점이에요. 제게 송부자 선생님 같은 분이 있는 것처럼 요즘 후배들에게도 있을까요?

선생의 열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마음만큼 표현하거나 안 되거나의 차이죠. 특히 교육 기간이 문제인 것 같아요. 배우는 시간이 길수록 깊이 들어갈 수 있는데 기간이 짧으면 쉽지 않아요.

제가 1990년 말에 미용실을 오픈하고 헤어 안에 피부를 분리한다고 해서 과천 데모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요즘은 업스타일이 미용실에서 분리되는 상황이에요. 업스타일만 하는 분들, 업스타일을 못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많아요.

국민 소득이 2만5천불 정도 되면 파티 문화가 형성돼 세미 업스타일이 많아진다는데 우리 문화는 다른 거 같아요. 그렇다고 업스타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늙은 우리가 하는 거 같아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제게 없는 감성을 갖고 있어요. 그게 얼마나 큰 건지 몰라요. 기술이 아무리 탁월해도 젊은 세대의 감성은 따라가지 못하죠. 그래도 기술이 안 되면 힘들어요.

너무 공감합니다. ‘미용은 예술이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갈수록 미용의 기능적인 부분만 중요시 되는 것 같아요.

미용은 당연히 예술인데 이 말은 예술의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죠. 내가 경지에 도달해서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면 됩니다. 미용으로는 실험 논문이 안 나와요. 헤어 전공자도 스타일링 쪽으로 접근해서 다양하게 논문을 쓰면 좋겠어요. 구획을 나눠서 제대로 들어가는 거죠. 고전 머리와 현대 머리를 섞지 말고 고전 머리는 고전 머리대로, 근대는 근대대로 쓰면 좋겠습니다.

뚱원장 그라피 에서도 작품 사진 공모전을 하는데 ‘실용성이 없고 너무 추상적이다’라는 비판도 있어요. 작품과 실용적인 스타일의 차이는 뭘까요?

추상적인 건 자기 감성과 시대적 요구가 어우러져 나오는 거고, 실용적인 건 실용적인 것일 뿐입니다. 제대로 갖추려면 다 할 수 있어야죠.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합니다. 안타까운 건 교수님들이 교육을 좀 받으면 좋겠어요. 업스타일의 경우에는 학위만으로는 안 돼요. 방학 때 무료로 교육해주겠다고 한 적도 있어요. 감사하다고는 하는데 별 반응이 없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자기 실력이 드러나는 게 무서웠던 것 같아요. 교수들은 교수대로 공부하자고 해도 못하고, 업계에서 자리 잡은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나서지 못하는 거죠.

선생님 손을 봤어요. 박지성 씨 발과 강수진 발레리나 발을 봤는데 선생님 손에서 그런 느낌이 들어요.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곧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마무리 지으면서 제자들이 헌정식을 개최한다고 하지 않을까 싶어요. 미용 예술로 예술의전당까지 오를 수 있을 지 확신은 없지만 예술의전당은 1년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몇 년 후라도 신청은 해놨어요.

마지막으로 후배 미용들에게 당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요금을 많이 받는다고 했는데요. 그 요금을 받기 위해 하는 노력은 기술뿐이 아니에요. 고객 한 분 한 분에게 최선을 다하고 정중하게 대해요. 미용인들 스스로 권위를 세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매너나 의상도 신경 써야 하고요. 출발은 했으나 어쩌면 집으로 향할지 모르는 그 길을 경유하고 있는 후배들 모두 용기내기 바랍니다. 무언가를 이루려면 미쳐야 해요. 정신 차려 보면 원하는 길에 자신이 존재해 있을 거예요. 최고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이 최고가 되도록 하세요!

* 더 많은 인터뷰 내용은 [그라피] 11월호에서 만나보세요!



에디터 이수지(beautygraphy@naver.com) 포토그래퍼 심균수 제작지원 와칸프로페셔널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