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영화의 고전 <밀회>

조회수 2018. 10. 17. 17:0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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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짧은 고백 영화 BY.그라피

밀회
Brief Encounter, 1945

감독 데이비드 린 

주연 셀리아 존슨, 트레버 하워드

사랑은 한 가지 형태로 규정하기 힘든 매우 복잡한 감정이죠. 물론 도덕과 미풍양속이란 잣대를 들이대자면 대단히 상식적인 선에서 금지된 사랑을 몇 가지는 골라낼 수 있습니다. 국가가 지원하는 공교육 과정만 이수했다면 누구나 아는 내용일테니까요. 하지만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사처럼 어떤 사랑은 교통사고 같아서 언제, 누가, 어떻게 맞닥뜨리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 이렇게 느닷없이 사고처럼 다가오는 사랑은 대부분 치명적이라는게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영화 밀회 스크린 샷

처음 사랑에 빠진 소년 소녀도 아닌데 이상하게 뒤늦게 찾아온 사랑 앞에서 그들은 소년보다 들뜨고 소녀보다 설레기 일쑤입니다. 죄책감, 미안함에 노심초사하기보다 먼저 그를 만나기로 한 요일과 시간을 자꾸 확인하고 되새깁니다. 평범하고 감흥 없던 일상을 뒤흔든 바람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상으로 이끌어가죠. “이러면 안 된다”는 이성보다 “이 사랑을 멈출 수 없다”는 감정이 앞서버립니다.

목요일의 연인들

데이비드 린 감독의 1945년 작, <밀회>는 이런 사랑의 불가항력적인 마력과 이별 뒤에 찾아오는 후폭풍을 그린 로맨스의 고전입니다. 이듬해인 1946년 제1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작품이기도 하죠. 데이비드 린 감독은 <아라비아의 로렌스> (1962), <닥터 지바고>(1965) 같은 스케일이 큰 대작 영화로 각광을 받았지만요. 사실 그는 스케일뿐만 아니라 디테일을 다루는 재능도 남달랐던 거장입니다. <밀회>는 그런 자신을 유감없이 드러낸 사례라 할 수 있죠.

<밀회>의 원제는 ‘Brief Encounter’, 짧은 만남이란 뜻을 담고 있는데요. 이것을 일본에서는 ‘밀회’라는 야릇한 여운이 감도는 제목으로 바꿔서 개봉했습니다. 덩달아 국내까지 ‘밀회’로 소개가 됐죠. 가끔 일본 특유의 언어 윤색에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밀회> 역시 원제보다 훨씬 매끄럽고 멋스러운 제목입니다.

영화 밀회 스크린 샷

이 은밀한 만남의 주된 장소가 기차역이란 설정도 의미심장합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 정해진 경로를 이동하는 기차와 한 사람만을 위한 마음인 사랑은 항상성이란 측면에서 닮아 있죠. 하지만 이 엄격한 시간과 경로가 뜻밖의 사건을 만나 뒤틀릴 때, 일상은 무서운 속도로 궤도를 이탈합니다. 이 의외성이야말로 사랑의 또다른 성질인 셈이죠. 그런 사랑은 늘 불꽃처럼 왔다가 숙취처럼 사라집니다. 가슴 속에 커다란 응어리를 남긴 채 말입니다.

사랑했던 그대, 아름다웠던 그때

로라는 매주 목요일 밀포드에서 여가를 즐기는 평범한 가정주부입니다. 아니, 주부였습니다. 어느 날 기차역에서 알렉을 만나기 전까진 말이죠. 처음 그는 눈에 들어간 티끌 같았습니다. 후 불면 순순히 빠져버리는 작고 사소한 존재에 불과했죠.

그건 알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는 번듯한 의사였고 이미 가정이 있었으며 누구보다 가족들을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눈에 들어간 티끌을 빼준 잠깐의 인연일 뿐이었는데, 묘하게 그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매주 목요일, 둘만의 시간을 갖기로 합니다. 엄연히 각자의 반려자가 있는 두 사람인데, 이상하게 같이 있는 시간이 마냥 즐겁고 전에 없던 해방감마저 느껴졌죠. 의사로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알렉에게서 로라는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소년을 봅니다.

영화 밀회 스크린 샷

왜 이 남자와 계속 같이 있고 싶은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그녀도 양 갈래 머리의 소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머뭇거리면서도 만남은 계속되고 어느새 죄책감과 미안함은 뒤춤에 감춰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대신 행복한 기억들이 차곡차곡 달력을 채워갑니다. 이따금 왼쪽과 오른쪽도 구별 못할 만큼 정신이 나가기도 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장님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녀의 커다란 눈과 미소, 수줍음에 상기된 얼굴, 시답잖은 농담에도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만 눈에 들어오죠.

매일 오후 5시 40분에 떠나는 남자와 3분 뒤인 5시 43분 기차에 몸을 싣는 여자. 집에 가서도 온통 생각은 상대에게 꽂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엾은 연인들을 향해 잠시 봉인해뒀던 죄책감이 굶주린 들짐승처럼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죠. 알렉의 친구 집에서 억눌러왔던 격정을 토해내려는 순간, 그제야 자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깨닫습니다.

영화 밀회 스크린 샷

목요일이 그녀의 인생 전부를 책임져줄 순 없습니다. 그녀의 남은 인생에는 목요일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날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이성을 되찾은 알렉이 당신을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했을 때 순순히 그를 보내야 한다고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목요일 오후 5시 40분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불륜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지지리 궁상이거나 체액 범벅의 치정이 등장하진 않습니다. 육체적 관계만 없었을 뿐, 4주간의 짧은 사랑은 명백한 불륜의 혐의를 씌우기 충분하죠.

그럼에도 이 부정한 남녀의 사랑이 순수하고 안타깝게 비쳐지는 건 이들의 흔들림, 욕망과 도덕의 충돌, 사랑해서 미안하다는 사과 속에 담긴 애처로움을 우리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영혼이 남은 생애 동안 다시는 타오르지 않으리라는 것도 말이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처연하게 흐르는 가운데, 그녀는 슬픈 사슴처럼 오도카니 먼 곳만 응시하고 있습니다. 밀포드역에서 이별할 때 알렉의 손이 잠시 머물렀던 어깨가 불에 데인 듯 쓰라립니다. 지나고 나면 이것도 한때의 추억이 되겠죠. 그리고 무용담처럼 웃으며 얘기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어쩌면 지금 내가 그리워하는 건 그대가 아니라 ‘그때’일 거라고 말입니다.

영화 밀회 포스터

글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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