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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대신 산티아고 순례길 다녀온 부부, 지금 하는 일은..

조회수 2021. 4. 9. 09:4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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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이자 기획자인 혜민은 퇴사 후 결혼식 행진 대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왔다. 콘텐츠 스튜디오 900KM를 창업해 지금까지 총 4권의 책을 냈고, ‘요즘 것들의 사생활(요즘사)’ 유튜브에 다양한 인터뷰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요즘사에는 한 발짝 정도 앞서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요즘 것들’의 레퍼런스가 모여있다.


콘텐츠를 주도적으로 만들고 있는 혜민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벚꽃이 피며 봄의 ‘시작’을 알리던 4월의 첫 날. 혜민이 여러 가지를 시작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물었다.

42일간의 결혼행진, 산티아고로 떠났다

백구 부부가 결혼식 대신 산티아고로 떠났던 이유가 궁금해요. 어떻게 가게 된 건가요?

(*남편 현우의 애칭이 ‘백구’이고 혜민이 '구백킬로미터'를 운영하면서 백구와 구백을 합쳐 ‘백구 부부’로 불린다)


둘 다 취준생일 때 어렵게 준비해서 좋아하는 일로 회사에 들어갔지만, ‘프로 야근러’로 일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여름 휴가를 같이 가기로 했다가, 일 때문에 가을로 미뤘는데 또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비행기표를 취소하게 된 거예요.


그때 펑펑 울었어요. 그 시기 즈음에 결혼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요, ‘결혼’ 이야기가 나오니까 갑자기 아빠도 아는 분이 예식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예단, 예물과 같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나오고, 돈도 많이 들고... ‘이게 다 뭐지?’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에 다른 방법을 찾았어요.


현우가 던진 “산티아고 순례길 같이 걸을까?”라는 한마디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어요. 드넓은 들판에 둘이 손잡고 걸어가는 게 상상되면서 결혼 대신에 할만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혼이 가진 상징성과도 잘 들어맞는 것 같았고요. 그 길의 거리가 900km 정도 된다고 해서 여행의 제목도 “이건 900km 웨딩마치다"라고 정했어요.

역시 기획자답네요. 부모님이 반대하진 않으셨나요.


결혼은 둘이 주인공이고 같이 걸어가는 상상을 했는데, 일반적인 결혼은 제가 생각한 것과는 거리가 멀더라고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같이 걷는 건 우리 둘이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고, 완전히 판을 깰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바로 갈 수가 없어서 얘기가 나오고 2년 후에 둘다 각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가게 됐어요.


물론 우려가 많았죠. 작전을 짜서 각자 부모님들에게 조금씩 이야기했어요. 독특하게 결혼하는 분들 링크 보내면서 요즘에는 이런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얼마나 다녀왔어요?


3개월을 다녀왔어요. 42일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나머지는 스페인 주변을 여행했어요. 걸어가는 게 결혼식이고, 끝난 이후엔 신혼여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우리의 하객이고요. 나비넥타이와 면사포를 챙겨 들고, 곳곳마다 사진을 찍었어요. 즐거울 줄 알았는데, 우리가 걸었던 날의 절반 이상이 비가 왔어요. 매일 진흙밭을 걸어야 했죠.


저는 진짜 체력이 약하거든요. 한국에서 여름휴가도 제주 올레길로 떠나서 전지훈련도 하고, 잘 준비하고 갔는데요. 산티아고 순례길은 제가 생각한 ‘평지’가 아니더라고요. 매일 관악산 하나쯤은 건너야 해요.


중간까지는 너무 힘들어서 매일 울었어요. 나중에는 걷는 요령도 파악하고, 이 생활에도 익숙해졌지만요. 첫날이 제일 힘들었어요. 가파르고 악명 높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야 하는데, 3월 중순에 눈이 쌓여 있어서 우회길로 갔어요. 거기서 10시간을 헤맸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신나서 한발 걷고 사진 찍고 하다가 나중에 보니까 주변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먹을 것도 다 떨어지고… 우리의 목적지였던 수도원 표지판 보자마자 엄청 울었어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죠.

0km에서 숫자가 점점 올라갈 때는 어땠어요?


몸소 겪은 일이라 몸에 체득된 게 있어요. 아무리 같이 걸어주는 사람이 있고, 누가 내 짐을 덜어주고 도와줘도 결국엔 내 걸음은 내가 걸어야 해요. 내가 걷지 않으면 목적지에 갈 수가 없어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루에 20~30km씩 매일 걸어야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막막했어요. 0km가 어떻게 900km가 되지? 우리가 겨우 20km를 걸었다고?


산티아고를 다녀와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냐는 질문을 받아요. 걸으면서는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웃음) 그냥 하루하루 사느라 바빠요. 오늘은 어디 마을까지 몇 시쯤 도착할 거고, 어디서 밥을 먹고, 숙소를 잡아서 자야 한다. 빨래는 여기서 못했으니 거기서 해야 한다. 내일은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다. 이것만 생각하기에도 바빠요. 


기본으로 돌아가서 하루하루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게 돼요. 먹고, 자고, 입을 것. 삶이 단순해지니까 잡념이 사라지더라고요. 머리가 정화됐어요.


하루하루 오늘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고, 방향을 잘 설정해서 가니까 막막했지만 900km에 다다랐잖아요. 그 경험을 제 몸과 마음이 기억해요. 이 일을 하고 난 후의 저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겉으로 볼 때는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진짜 많이 달라졌어요.


산티아고에서의 경험이 여러 일을 시작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진짜 그래요. 막막할 때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이 있어요. 그럼 언젠가 원하는 곳에 닿을 거란 믿음도 생겼고요.


이전의 저는 제 자신에게 믿음이 부족했어요. 회사에서도 주눅 들고, 여기서 포기하면 실패라고 잘못 생각했어요. 자존감도 낮았고요. 회사를 나가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나오는 순간 ‘이게 다가 아니구나’를 느꼈어요. 길을 걸으면서 ‘내 힘으로 이만큼이나 갈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채워졌어요.

산티아고 다녀온 후
‘나의 일’을 만들었습니다

산티아고를 가기 전부터 책 만들 생각이 있었어요?


아니요. 자연스레 모인 기록으로 만들었어요. 그곳에서는 글을 쓰게 돼요. 안 쓸 수가 없어요. 제가 써둔 글이 있었고, 현우가 사진을 찍었어요. 처음에는 전시를 하고 싶었거든요. 결혼식을 안 올리고 간 거니까, 다녀와서 길을 펼쳐두고 전시하면서 고마운 사람들을 초대할 생각을 했어요. 막상 다녀오고 나니까 전시로 갈무리 하기에는 아쉬웠어요. 더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데, 제가 당장 만들 수 있는 게 책이더라고요.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 행진>은 처음에는 ISBN(국제 표준 도서 번호)도 없는 독립출판물로 만들었어요. 한 달만에 책이 다 팔리니까 주변에서 출판사를 차리라고 권유했어요. 그렇게 900KM(구백킬로미터)가 시작된 거예요.


원래부터 대안적인 삶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니면 어떤 계기가 있었어요?


저도 제가 왜 이런 길을 가게 됐나 생각을 해봤어요.(웃음) 저는 제가 성실하게 세상이 시키는 대로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항상 마음에는 어떤 반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겉으로 막 표현하지는 않아도 속으로는 ‘이건 왜 이래야 하지?’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어요. 


그런데 대학 친구들 만나서 얘기해보면 “너는 원래 마이웨이였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나 옳다고 믿는 것을 해야 하는 성향은 있었던 것 같아요.

900KM에서 - 기획, 에디팅을 담당하는 혜민 & 영상, 디자인을 담당하는 현우

그럼 산티아고에 다녀와서 900KM를 창업해 책을 내고, 요즘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결혼식 대신에 산티아고를 다녀왔잖아요. 세상에 돌을 던지면서 판을 깨고 결혼했는데 돌아오니까 기성의 결혼 문화가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거예요. 우리 가족들이 유난스러운 것도 아니고 잘 대해 주시는 데 이전의 제 생활과는 그래도 너무 다른 거예요. 듣는 말도 달라지고. 


제가 혼자 살 때는 부모님 뵈러 1년에 두 번 정도 내려갔는데, 갑자기 한 달에 한 번 내려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나는 조신한 며느리가 되어야 할 것만 같고, 제가 사는 세계가 급격히 변했어요. 거의 21세기에서 조선 시대로 간 것처럼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라는 의문이 생겼어요. 제가 느끼는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을 들여다보고, 그 질문에 관한 답을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요즘사’ 예요.


‘요즘 것들’이란 단어에서 혜민이 아까 말한 반감이 떠오르네요.


기성세대가 “요즘 것들은 이래서 안 돼"라고 하는 말의 반어법처럼 만들었어요. “그래도 요즘 것들은 이런 생각을 해"라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첫 프로젝트로 당시의 제가 느끼고 있던 게 ‘결혼 문화’니까 ‘우리처럼 되바라진 생각을 하는 부부’를 인터뷰해보기로 한 거예요.


처음 요즘사를 시작할 때 ‘결혼’ 얘기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큰 그림은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우리는 ‘남들만큼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이 있는 것처럼 교육을 받잖아요. 정답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는데, 그 사례를 저도 직접 보면서 확신을 갖고 싶었던 것 같아요.

‘요즘사’에서 인터뷰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다 다르다는 게 공통점이에요. 정의 내릴 수 없음이 공통점이에요. 키워드는 있어요. 사이드 프로젝트, N 잡러, 디지털 노마드. 그런데 그게 한 가지로 귀결되지는 않아요. 한 명의 사람 안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지금 그 일을 할 수 있는 거더라고요. “요즘 것들은 이렇다"라고 함부로 정의 내릴 수가 없어요.


제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생각만 하기보다는 한보에서 반보 정도 먼저 시도해본 사람들이에요. 모두가 다른 가치를 갖고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에는 자기 주체적으로, 일도 삶도 살아내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죠. 그게 인터뷰이를 선정하는 기준이에요. 너무 유명하거나 잘난 사람이 아니라, 나랑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우리 또래인데 이 사람은 이런 선택을 했네? 생각이 들면, 조금 더 쉽게 나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잖아요. 그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처음 시작할 때는 유튜브 구독자가 0명이었죠?


네. 이것도 산티아고 걸을 때와 똑같아요. 0에서 1,000명 되는 게 제일 어렵고 오래 걸렸어요. 저희 유튜브 2017년 여름에 개설했어요. 물론 처음부터 본격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1,000명이 되는 데 거의 2년이 걸렸어요.

와… 대단해요. 처음에 반응이 없는데도 계속하게 된 원동력이 있어요?


저는 뭔가를 뛰어나게 잘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글을 엄청 잘 쓰지도 않고요. 한 가지 잘하는 게 있다면 꾸준함이에요. 포기하지 않는 거요. 그리고 저는 되게 느린 편이에요. 요즘 같은 세상에 하나의 프로젝트를 1년씩 하고 그러잖아요. 느려도 꿋꿋하게 제 방식대로 해요. 느려도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생각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어요.


얘기 들으면서 계속 산티아고가 떠올라요.


네 하하. 이상하게 기승전-산티아고로 가는데요, 가기 전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다녀와서는 제가 저에게 확신을 가지게 됐어요.

울타리에서 나온 뒤 깨달은 것

“회사를 나와서도 지금은 ‘자발적 야근러’처럼 일하고 있어요(웃음). 저는 완벽주의에 워커홀릭 성향이 있어서 홀릭까지는 안 되게 ‘블랜딩'을 잘해보자고 하고 있어요. 애초에 일상에서 출발한 콘텐츠라 분리가 안 되더라고요. 생활 속에서 떠올리는 것들이 일이 되고, 일로서 풀어진 것이 일상으로 들어오고요. 처음에는 너무 일만 하나?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같이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괜찮아요. 다만 오래 하려면 체력이 필요할 것 같아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을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나에게 만들어준 일을 하면서 포기해야 했던 것이 있어요?


세상이 나에게 쥐어주는 안정감을 포기해야 했어요. 이를테면 어떤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면 오늘은 열심히 일을 못했어도, 저는 그 회사 소속이고 기획자이잖아요.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간편함을 놓아야했어요. 지금보다 더 아무것도 아닐 때는 구구절절 나를 소개해야 했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어요.


제가 벌인 일을 하는 과정에서 괴로운 것도 많아요. 일주일 내내 편집해서 올렸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시큰둥하고, 댓글이 없으면 좀 시무룩해지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이유가 있어요? 언제 뿌듯함을 느껴요?


저는 아무도 안 해본 걸 하는 것을 좋아해요.


사람들이 잘 도전하지 않는 것에 ‘처음’이 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에요. 그게 누군가의 시작이 될 수 있어요. 우리가 결혼 행진 책을 내고 나서, 마켓에도 나가고, 뉴스에도 나가고,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우리 책을 보고 비슷한 꿈을 꾸게 된 커플부터, 이 책을 부모님에게 보여주고 결혼 승낙을 받은 커플까지.


그때 소름이 끼쳤어요. 처음 시작을 만든다는 게 어떻게 보면 영향력을 끼치는 거잖아요. 작든 크든 내가 시작한 어떤 일이 물꼬를 튼 덕분에 누군가가 용기를 내고, 조금 더 쉽게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 너무 의미 있고 기쁜 일이에요.

“어떻게 하면 시간과 에너지를 좀 더 주체적으로 쓸 수 있을지가 늘 고민이다. 여행을 가면 시장과 책방, 화방에 들르길 좋아하고, 정해진 길보다 지도에 없는 길을 발견하길 좋아하는 소심한 모험가.”

혜민의 첫 책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 행진>에 적힌 소개글이다. 


900km는 절대 한 번에 오지는 않는다. 비 내리는 진흙밭을 지나가면 꽃길도 나오고, 발걸음을 옮기는 한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한다. [글=정혜윤]


이것저것 하고 싶은 다능인을 위한 커뮤니티, 사이드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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