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g 재생종이 거치대로 5kg 무게 견디는 '디자인 마법'

조회수 2021. 4. 5. 13:4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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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웨이스트 친환경 디자인, 김민양 그레이프랩(주) 대표

2018년 문을 연 그레이프랩(주)은 재생용지를 소재로 재활용이 가능한 친환경 소품을 만드는 회사다. 대표적인 상품은 재생용지 한 장으로 만든 거치대다. 


50g이 채 되지 않는 종이 거치대가 최대 5kg의 무게를 견딘다. 화학 접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종이접기 방식으로만 제품을 완성한다. 종이를 접다 보면 튼튼하고 보기에도 예쁜 거치대가 만들어진다. 이 거치대는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연합, 일본, 중국에도 디자인 특허를 등록했다.

접착제와 코팅 없이 종이 한 장으로 만든 거치대. 그레이프랩의 대표 제품이다. [지호영 기자]

그레이프랩은 직원 14명 가운데 8명이 발달장애를 가진 예비사회적기업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재생용지는 사탕수수나 코코넛 껍질, 채석장의 돌가루, 폐지 같은 버려진 자원으로 만들어졌다. 재생용지에 기발한 디자인을 접목해 노트북이나 책을 올려놓는 거치대와 수첩, 다이어리, 무드 등 같은 생활용품을 선보이고 있다. 김민양(42) 그레이프랩 대표를 지난달 9일 서울 동작구 그레이프랩 본사에서 만났다.

쓰레기 될 제품은 디자인하지 않아

버려진 자원으로 만든 재생용지만 쓰는 이유가 있나.


“전 세계에서 베는 나무의 30~40%가 종이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종이를 재생용지로 바꾸면 그만큼 나무를 덜 베도 된다. 버려진 자원으로 만든 재생용지만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에너지 발생량도 일반 종이보다 재생지를 만들 때 현저히 떨어진다. 


재생지를 버려진 종이로만 만드는 게 아니다. 사탕수수나 코코넛, 대나무 껍질도 질 좋은 종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채석장에서 나오는 돌가루를 압착해 만든 재생용지는 일반 재생지와 달리 방수 기능이 있다. 종이로 재생지를 만들 때처럼 많은 물이 필요하지 않다. 돌가루 재생용지는 물이 전혀 없어도 만들 수 있다.”


화학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종이접기 기술로만 거치대를 만든다. 이런 디자인을 생각해낸 비결이 뭔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 샌드위치 박스를 친환경적 패키지로 디자인하는 과제가 있었다. 샌드위치를 먹고 나면 하나같이 플라스틱 삼각형 박스를 구겨 버리다 보니 배출되는 쓰레기 양이 엄청났다. 세상에서 가장 친환경적 패키지를 생각하다 문득 과일 껍질이 떠올랐다. 


자연 그대로의 과일 껍질처럼 친환경적이면서 유연한 특징을 가진 종이를 이용해 포장할 방법을 찾다가 접지 기법에 매료됐다. 다양한 접지 기법을 연구한 끝에 샌드위치를 먹고 나면 접어서 버릴 수 있는 종이 패키지를 만들었다. 한국에 와서 만든 거치대는 당시 만든 샌드위치 패키지의 일부다. 샌드위치를 먹고 나서 빈 박스 위에 무심코 쌓아 올린 책들이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던 점에 착안했다.”

출처: 그레이프랩

50g이 채 되지 않는 종이가 최대 5kg의 무게를 견딘다. 어떤 원리인가.


“종이를 접으면 여러 축이 생기면서 무게중심을 분산한다. 여러 개의 다리가 떠받드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무거운 책이나 노트북도 거뜬히 받칠 수 있다.”


재생용지를 사용하면 나무를 베는 양이 줄어들어 이산화탄소 감축 효과를 볼 수 있다던데.


“‘SK 사회성과 인센티브’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친환경 기업이 환경에 기여하는 정도를 측정하고 있다. 2019년 그레이프랩은 100% 재생용지를 사용하는 노트북 거치대가 플라스틱 제품에 비해 이산화탄소 감축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측정한 바 있다. 플라스틱 제품을 사용할 때보다 이산화탄소가 99% 가까이 줄어들고, 물 사용량도 90% 이상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해 기준으로 9000만 원에 달하는 사회성과를 거둬 이 금액의 20%인 1800만 원을 인센티브로 받았다.”

카톡 이모티콘 만들며 '상생' 관심 가져

김민양 대표는 홍익대학교에서 예술학과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영국 런던의 디자인 명문 킹스턴대학교에서 ‘지속가능한 디자인(Sustainable Design)’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2년 12월 영국으로 유학 가기 전에는 SBS와 KBS를 거쳐 카카오의 전신인 아이위랩에서 UX디자이너로 일했다. 이모티콘 유료화를 하나의 비즈니스 모델로 성공시키기도 했다.

사진=지호영 기자

“카카오톡 앱 디자이너로 일하며 이모티콘을 만들었다. 지금도 무료로 서비스되는 다양한 표정의 동그라미 이모티콘이 내가 직접 그린 것들이다. 그러다 이모티콘을 유료화하면 좋은 비즈니스 모델이 될 것 같아 웹툰 작가들을 섭외했다. 대화를 재미있게 이어줄 이모티콘을 만들 창작자로 그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웹툰 작가는 배고픈 직업이었다. 그들이 창작의 대가를 제대로 가져갈 수 있도록 수익을 나누는 방식을 적용해 이모티콘 유료화 서비스를 시작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디자인의 영역을 넘어 시스템을 기획하면서 협업을 통한 상생 비즈니스가 성공하자 웹툰 산업 생태계에 활력이 생겼다. 


그때부터 웹툰 작가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한 재능 있는 이들과 어떻게 하면 상생 플랫폼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영국에 가서 지속 가능한 디자인을 전공하는 석사과정을 밟았다.”

이익 독식하지 않고 포도처럼 함께 성장

영국에서 보낸 시간이 창업의 발판이 됐다고 들었다. 상생 플랫폼의 해법을 찾았나.


“전공이 지속 가능한 디자인이다 보니 사회와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디자인으로 날로 심각해지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환경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알고 싶어 저개발국가를 연구하고 조사했다. 


특히 모로코, 터키 같은 나라의 시장 뒷골목에서 일하는 수공예 장인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경제적으로 비주류에 속한 그들이 주류사회로 진입해 재능과 기술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는 피라미드 구조가 아닌, 상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시하기 위해 심도 있는 조사를 바탕으로 ‘포도송이들(The Bunch of Grapes)’라는 논문을 썼다. 


포도는 영양분을 독식하지 않고 어느 정도 송이가 자라면 옆에 새로운 송이를 새끼 치는 방식으로 넝쿨에 주렁주렁 달리게 한다. 자기만 잘 살기 위해 이웃을 해치지 않고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원한다. 포도 같은 수익 배분이 가능한 상생 플랫폼이야말로 더불어 잘살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해법이 아닌가 싶다.”

출처: 그레이프랩

영국에서 석사학위를 딴 그는 2014년 12월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결혼에 골인한다. 이후 2년 동안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발달장애인과 상생할 해법을 찾았다. 포도송이처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수익 배분 방식을 추구하는 그레이프랩이 그것. 


2017년 처음 문을 연 그레이프랩은 법인이 아닌 김 대표의 개인 작업실이었다. 포도송이 이론을 현실화하는 일종의 디자인 실험실이라는 의미에서 이름도 그레이프랩이라 붙였다. 발달장애를 가진 아티스트와 협업해 만든 첫 작품은 ‘지스탠드(G.Stand)’라는 이름의 책 거치대다.


김 대표는 2017년 11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와디즈에 지스탠드 사진을 상세한 제품 설명과 함께 올렸다. 그런데 차 한 잔을 마시고 돌아온 10분 사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목표액을 훌쩍 넘겨 300만 원 이상의 펀딩이 이뤄졌고 최종 펀딩액은 약 2000만 원에 달했다. 그의 부연 설명은 이렇다.


“판매를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에요. 그렇게 큰 호응을 얻을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어요. 탄생 스토리가 진솔하고 재미있다, 제품이 예쁘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그때부터 지스탠드가 독특한 디자인의 친환경 거치대로 주목을 끌면서 창업을 권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사회적기업 성격이 강하니 그쪽으로 창업하라고요.”

출처: 그레이프랩

그레이프랩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는 뭔가.


“빼기와 더하기 개념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환경문제에 대한 가치는 빼기로 접근하고 있다. 최소한의 자원과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쓰레기를 줄이자는 것이다. 


상생 문제는 더하기 개념으로 풀고 있다. 우리 사회에 다양한 구성원이 있는데 여성이나 장애인은 여전히 소외돼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다양한 가치를 외면한 채 돈을 최고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하면서 다양한 가치를 추구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돈을 지원해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사회 구성원이 서로 연대감과 공감을 나누지 못하면 돈이 있어도 소외받을 수밖에 없다. 물질적 소외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소외를 살펴야 한다. 그레이프랩은 그래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함께 성장을 꿈꾸는 기업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지속 가능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의 역할이 중요한가.


“디자이너는 제품 형태뿐 아니라 자질까지 결정한다. 제품 생산과정에서 얼마나 에너지와 자원을 최소화할지도 디자이너의 판단에 따라 좌우된다. 디자이너가 어떤 마인드와 시각을 가졌는지가 지속 가능한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앞으로 주력하고 싶은 일은.


“전문성을 살려 친환경 솔루션을 제시하는 컨설팅 분야로 영역을 확장하고 싶다. 라이프스타일을 아우르는 다양한 친환경 제품 라인도 갖추고 싶다.”


신동아 2021 4월호 발췌·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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